평화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평화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이 윤 희 / 고양YMCA 사무총장
* 이 글은 지난 2020년 11월 17일(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본관 2311, 오후 3시~5시30분) ‘民에 의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글로벌 民네트워크를 위한 국제평화심포지엄’ 준비를 위해 개최되었던 국내연구포럼에서 토론자로 참여해 토론했던 내용을 정리, 수정한 것이다.
문제의식
1) ‘누구의 평화이며,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거나 말하고 있는 평화는 강자의 힘에 의한 평화이거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의 평화 담론일 경우가 지배적이다. 온갖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평화가 힘에 의한 강자의 평화이고, 더구나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말해지는 평화 또한 그 울타리 안에서 머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 패러다임 안에서의 평화는 안전하다. 이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위협과 위험이 따르고 주류에서 벗어난 망상과 이념에 사로잡힌 철부지 소수로 매도당하기 쉽다. 강자의 평화가 아닌 약자의 평화, 소수자의 평화는 항상 위험시되고 핍박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정권이 ‘진보냐? 보수냐?’와 무관하게 제국과 권력을 항상 정면으로 응시하고 도전하기 때문이다.
2) 질문을 바꾸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이제 한국 시민사회의 평화 담론은 국가나 정부에 의한 평화 프로세스라는 정책적 담론과 틀에서 벗어나 ‘누구의 평화인가?’,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누구에 의한 평화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이와 같은 질문이 없는 공학적 평화 정책 담론은 강자의 평화 프로세스나 국가와 정부가 말하는 평화 프로세스의 장식품으로 전락되거나 강자의 선처에 기댄 화려한 수사에 머물기 쉽다. UN과 미국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제재 그리고 지정학적 제재와 봉쇄를 바라보는 한국 시민사회의 논의가 강자의 평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말할 수 있다.
3) 온전한 평화’를 말하는 것, 지구시민사회에 대한 한국시민사회의 최소한의 책임
‘누구를 위한, 누구의 평화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民의 평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라는 약자와 소수자의 평화 담론에 대해 몇 가지 토론을 해보고자 한다. 한국 시민사회는 식민지와 전쟁, 독재라는 수난의 근·현대사를 세계 각국 평화의 사람들과 함께 극복해온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 시민사회는 제국의 힘에 의해 관리되는 ‘강자의 평화’를 거부하고, 약자의 ‘온전한 평화’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아직도 점령과 분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지구시민사회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가 갖는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고의 전환
1). ‘제국의 평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통제되고 관리되는 평화’가 아닌 ‘온전한 평화’가 되어야 한다.
○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갈등과 분쟁의 원인은 무엇이고, ‘평화’와 ‘인권’을 말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동일한 답에 대한 다른 질문이다. 우리는 한국 시민사회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평화는 ‘누구에 의한, 누구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단지 실현 가능성이라는 주어진 틀 안에서의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실현 불가능한 논쟁을 즐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 ‘그들이 말하는 평화가 제국의 질서에 의해 만들어지고 관리되는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 21세기 작금의 분쟁과 갈등의 핵심 원인은 18세기 이후 서구 제국의 식민지 침탈과 지배, 그리고 그들의 확장과 충돌에 따른 양차 세계대전의 결과물이다. 서구 제국에 의해 약탈당하고 지배당했던 사람들, 제국들의 이해관계와 편의에 따라 분리되고 갈라졌던 사람들, 아이러니하게도 수탈과 피지배의 억울함과 통곡의 눈물이 묻어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 분쟁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이고 제국의 평화에 의해 각종 제재와 봉쇄를 당하고 있거나 난민이 되어 세계를 떠돌고 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총칼을 앞세워 침탈을 일삼고 이들을 약탈하며 피식민지 민중의 눈물로 부를 쌓아왔던 제국은 누구인가? 지금 자칭 ‘인권과 자유, 평화를 주창하는 문명국가’는 누구인가? 평화와 인권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제재와 봉쇄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 서구 근대화의 역사는 선(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타 문명과 문화에 대한 수탈의 역사와 다름이 없다. 서구 제국이 식민지 민중들에게 사과하고 그들에게 배상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바가 있는가? 오히려 서구 제국은 식민지 민중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3등 시민으로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이질적인 문제 집단으로 낙인찍고 있지 않은가?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의 철통같은 영광 속에 쌓여 있는 문화의 상징들은 지금 우리에게 그들이 말하는 평화가 누구의 평화를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다시한번 묻게 한다. 그들의 평화는 그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평화, 가변성이 없는 평화이다. 서구 평화학자들에 의해 평화는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실천적인 함의를 갖는 실천 테제가 아닌 학문적으로 분해되고 세분화되어 단계론적 과정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치환된다.
○ 현대 사회의 평화를 헤치는 근본 원인은 19세기 이후 서구와 20세기 이후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제국의 지배 질서이다. 따라서 약자의 평화는 그들이 말하는 그들의 질서에 의해 관리되는 평화가 아닌 지금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가변성 있는 실천의 언어로써 ‘온전한 평화’가 되어야 한다. 제국의 평화 패러다임에서 그들의 선의에 기반하여 논의되는 평화를 거부해야만 한다.
- 정치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의 영역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 약자의 평화를 말할 수 있다.
2) 국가·정부 중심의 평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 국가·정부는 평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다만 평화의 과정을 정책화하고 제도화 하는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다. 수단이자 도구라는 것은 누구의 손에 잡혀있느냐에 따라 항상 그 쓰임 용도와 방향이 바뀔 수 있다. 또한 자본의 지배가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사회에서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상이한 세력들 간의 다양한 이해관계 안에서 균형과 조화, 조정과 중재를 거쳐 생산되는 평화는 약자의 평화일 수 없으며 강자의 평화일 가능성이 높다.
○ 약자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는 민에 의해 만들어지는 평화의 강물이고 평화체제는 그 일각의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평화를 만드는 민에 의한 거대한 강물의 흐름이 제도의 영역 안에서 일각의 빙산으로 치환되거나 대체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한국 시민사회의 평화운동은 거꾸로 규정되고 통제되며 주변화되어 있다. 정의로운 평화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고갈되고 제도의 범위 안으로 이념화되어 있다.
3. 民이 만드는 평화운동 – ‘온전한 평화’의 씨앗을 살리는 운동
○ 한국 근현대사는 미·일·러·중에 의한 패권의 각축장이 되었고, 한국 시민사회는 동학혁명과 일제강점,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서구 열강과 제국들에 의해 민족 내부 구성원 간의 참담한 수난의 역사를 감당해왔다. 한국 시민사회는 이와 같은 고난의 역사를 통해 ‘힘에 의한 강자의 평화’가 아닌 ‘협력과 연대에 의한 약자의 평화’의 필요성과 절실함을 배워왔다. 이것은 한국 시민사회가 21세기 글로벌 지구시민사회의 평화 리더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온전한 평화의 씨앗’이 되었다.
○ 그러나 한국 시민사회는 근현대사를 통해 한민족 내부에 누적된 역사적 갈등을 치유하고 해소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를 회피하거나 부정적 유산을 강화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로 인해 한국 시민사회는 아직도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 구성원 간의 다양한 갈등과 분쟁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 정부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민족 구성원 간 죽고 죽였던 뼈아픈 역사, 식민지와 전쟁의 비극적 경험이 남긴 民들의 상처와 집단적 트라우마(Trauma)를 치유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130여 년 동안 시대적 상황에 의지하며 생존해야 했던 힘없는 民들에게 이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과 숙제로 남아 있다. 한국 시민사회는 역사의 진실에 정면으로 대면하고 배움으로써 과거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기 위한 民 스스로의 평화 프로세스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남·남간, 남·북간 갈등을 해소하고 한반도 시민사회를 상생과 공존, 평화의 동산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다.
○ ‘民이 만드는 평화’는 ‘전쟁을 잃어버린 역사가 아닌 평화를 만드는 씨앗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일이며, 사회 구성원 간의 뼈아픈 갈등과 분쟁의 역사를 화해와 공존, 치유와 상생의 문화로 회복해가고자 하는 일이다. 잃어버리고 망각된 잔인한 역사가 아니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현재로 함께 살아 있는 생명의 평화운동으로 남·북·해외 한인사회와 이주민 등 모든 디아스포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 동행하는 생명의 물결이자 평화의 역사가 될 것이다.
○ ‘民이 만드는 평화’는 ‘전쟁을 평화를 만드는 씨앗으로 기억’하며 시민사회 공론 형성과 사회적 대화를 통해 사회 구성원 간의 화해와 공존, 치유와 상생의 평화문화를 형성하는 일이며, 청소년들에게는 평화의 미래를, 청년들에게는 글로벌 평화리더십으로서의 비전을 키우는 일이다.
'UN과 미국의 대 한반도 제재와 봉쇄는 평화를 만드는가?‘
- 한신대 글로벌피스센터 1차 국내연구포럼에 대한 단상
이윤희 고양YMCA
2020.11.9.
오늘 포럼의 원 제목은 'UN과 미국의 대 한반도 제재와 봉쇄는 평화를 만드는가?'이다. 이 제목의 주제에 따라 문제의식을 간단히 정리하면 대량살상무기와 핵이 없는 세상에 대한 전망을 공유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비핵 평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UN과 미국의 대 한반도 제재와 봉쇄가 많은 분들이 고민하는 평화의 수단으로써 유효한가라는 효과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 미국, 러시아, 영국, 중국, 프랑스의 핵 보유 권한은 누가 누구에게 부여한 것이고, 그 정당성은 무엇인가?
-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의 핵 보유는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의 대 아랍, 대 소련, 대 중국과의 이해관계 안에서 용인되었고 북한의 핵은 냉전체제의 끝자락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이외에 차이는 무엇인가?
2. 한반도 제재와 봉쇄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대응이 아닌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70년동안 이뤄져 온 것이고 북한의 핵개발은 그 부속적인 산물로 제재와 봉쇄가 강화된 계기이다.
- 한국전쟁의 종식과 냉전 해체 그리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핵무기 처리 문제를 봐야한다.
- 미국과 냉전체제의 대립축이었던 소련과 중국은 60년대, 70년대 데탕트 시대를 거치며 해소됐지만 북한과 한반도는 냉전체제의 대리 분쟁지역으로 남겨졌다.
3. 힘으로 강요되는 제국의 제재와 봉쇄는 평화에 기여하기보단 오히려 피봉쇄국의 민들에게 반인권적이고 반평화적인 행위라는 질문이다.
- 한반도와 팔레스타인에서 행해지고 있는 제재와 봉쇄는 평화를 만들기보다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거꾸로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 한반도 민들에 의한 스스로의 평화에 대한 노력과 선택권도 부정되고 미국의 이해관계 안에서 통제되고 있다.
4. UN과 미국, 정부의 결정은 선인가라는 질문이다.
- 많은 사람들은 제재와 봉쇄를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응으로 해석하며 UN과 미국 그리고 정부의 제재 정책 안에서 민의 역할을 찾는다. 미국의 허락을 받으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 평화를 만들어가는데 있어 국가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와 함께 한반도 평화정책에 관한 정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 이런 이유로 평화운동이라는 이름의 진영에서 정부 사이드로 영역을 옮긴 이들은 풍부한 정보와 관계를 바탕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들을 찾으며 그것을 최선의 현실안이라고 한다.
- 그러나 정부가 말하는 것이 과연 선이고 민이 추구하는 평화의 전부일까?
5. 민의 평화프로세스는 불가능한가?
- 미국의 이해를 반영하는 UN의 틀 안에서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평화정책에 대한 비판과 평가, 그리고 다양한 정부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민의 평화운동인가라는 질문.
- 한국전쟁의 종식과 이를 위한 다양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UN과 미국에 의해 강요되는 제재와 봉쇄를 거부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글로벌 지평에서의 민의 불복종운동, 평화자치운동은 불가능한가?
- 주요 강대국의 이해를 반영하며 반평화와 반인권을 강요하는 UN 기능의 타락을 -소위 냉엄한 국제현실- 극복해가기 위한 민의 평화행동그룹은 불가능한가?
- 국가연합으로서의 UN에 대응하는 글로벌 민의 연합으로서 대응체계는 불가능한가?
6. 11월 국제평화심포지엄을 기획한 이유.
- 특정 국가와 지배그룹에 의해 강요된 제재와 봉쇄를 평화를 위한 당연한 수단으로 인식하며 그 효과성을 판단하고 있는 한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제재와 봉쇄가 반인권적이고 반평화적이라는 화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또한 평화는 국가권력, 정부 차원의 정책으로 다뤄져야하며 민은 보조이거나 그 틀 안에서 평화를 말해야 한다거나, 국가의 평화와 민의 평화가 다르고 항상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민의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화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어쩌면 누군가에겐 현장의 몽상이라 불릴지 몰라도 민의 상식적인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5월에 기획했던 것을 코로나19로 미뤘지만 지금이라도 하는 이유다.
2020.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