²YMCA운동의 형성 원리를 찾아서
청주YMCA 이사워크숍
2022. 9. 17. 청주YMCA
YMCA운동의 형성 원리를 찾아서
이 윤 희 고양YMCA 총무
#청주YMCA #이사교육 #워크숍(2022. 9. 17. 13:30, 청주나무호텔)
<워크숍 토론 주제>
1. YMCA운동의 형성원리
2. 문제진단 5W1H
3. 청주시민이 보는 Y
4. 내가보는 Y-평가 기준, 계량화
5. 비전•과제•책임(이사회와 사무국의 존중과 신뢰)
총체적 관계로서의 사회와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의 형성원리를 찾고자 한다면, 운동의 구성 요소를 밝히는 것이 우선 일 것이다.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은 이념, 조직, 사업 그리고 재정이 기본 구성 요소다. 조직은 사람과 조직체로 구분할 수 있으며 운동의 형성원리는 이처럼 다섯 가지 측면에서 다뤄질 수 있다.
운동은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는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여 퍼진다. 진리는 스스로 증명하는 힘을 갖고 있다. 말씀은 스스로 존재한다. 따라서 진리는 스스로 운동한다. 이념은 진리의 한 단면이며 현실을 비추는 빛이다. 이념 없는 운동은 없다. 이념이 없는 운동은 뿌리가 약한 나무와 같으며, 이념이 없는 조직은 친교 동아리일 뿐이다.
뜻(이념)을 세운 사람이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이 사업을 만들며 이를 위한 재정적 뒷받침이 운동을 확장한다. 뜻을 세운 사람이 운동의 본질이자 실체이다. 이념과 사람이 운동의 시작이며, 운동의 내용이며 핵심이다. 조직체와 사업은 그 형식이며 재원은 수단이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며 또한 형식과 수단이 내용을 규정한다. 내용과 형식은 따라서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의 운동을 평가할 때 사업이나 조직, 재정 등을 통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실체적 접근은 이념과 사람을 통해 평가하는 것이며 그것의 실현체로서 조직과 사업을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것이 진리가 진리이게 하고, 진리가 운동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 글에서는 YMCA운동의 탄생 과정과 현재를 개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YMCA운동의 이념적 지향과 YMCA를 YMCA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사견이며 논증이 아닌 주장이다. 다만 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 YMCA운동을 찾아갈 수 있는 작은 길이라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향기와 소명이 YMCA에 남아 있다면 스스로 그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1. 시대 상황(Context)으로부터 시작하는 보편적인 운동
YMCA는 특정 이념이나 정파,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한 운동체가 아니다. YMCA는 ‘당면한 시대 상황과 과제, 가치와 정신이 무엇인가?’라는 Context의 질문에 대한 응답을 찾고 실천하는 운동체다. 일견 모든 운동을 설명하는 당연한 명제처럼 생각되지만, 실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근현대사의 역사는 다른 듯 보이는 신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이성’이 교조화됐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비극적인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국 기독교의 많은 문제도 Context에 눈을 감거나 왜곡하는데 기인한다. 또한 Context와 끊임없이 통섭되어야 할 Text(성서, 예수운동)를 절대화하고 신격화함으로써 패권적 교권 세력이 되어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한 단면이다. Context에 무관심한 Text는 교조와 도그마의 폭력이 된다.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Context와 Text, 그 어디에도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며 그 관계마저 실패하고 있다.
YMCA운동은 Context에 기반하여 Text를 이해하고, Text를 통해 Context의 길을 찾는 운동이다. YMCA운동은 Context와 Text의 끊임없는 대화와 성찰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Context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YMCA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844년의 런던YMCA 또한 시대 상황에 대한 몇 몇 젊은이들의 복음적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24살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1844년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 잘 드러난다.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7살 어린이들의 아동 노동이 일상화됐고, 신분해방이라는 미명 하에 땅을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던 시대이다. 1844년은 ‘로버트 오웬’으로부터 시작된 협동조합운동이 ‘로치데일 협동조합’으로 구체화되었던 때이며, 그로부터 3년 후인 1847년에 공산당선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초기 한국YMCA는 구한말 ‘자립과 근대국가 설립’이라는 뚜렷한 시대 과제를 갖고 있었다. YMCA가 선교사들의 전도 수단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우 등 배재학당 출신들의 청년들과 독립협회 개화 청년들의 자발적 요구에 의해 YMCA운동이 요청(1899년 150여명 창립 청원)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결과로 1901년 배재학당YMCA가 5개월 만에 조직될 수 있었으며,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될 수 있었다. 상층 개화파 지식인들에 의해 시작된 YMCA는 1905년에 전덕기 등 하층의 청년들이 폭발적으로 참여했고 이로 인해 민족 독립운동의 모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YMCA운동은 구한말 동학농민혁명 이후 갈 길을 잃고 방황하던 청년들에 의해 ‘근대국가 수립’과 ‘국가 없는 사회에서의 민의 자치, 주권질서 수립’이라는 보편적인 시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정신, 가치운동으로 요청되고 시작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자리에서, YMCA가 고백하고 있는 시대 상황과 과제는 무엇인가 질문하게 된다. 오래된 미래의 새로운 YMCA를 기억하기보다는 오래된 역사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믈어야 한다.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한국YMCA운동에 필요한 것은 Context를 읽는 매서운 눈과 Context를 해석하고 대화를 나누는 Text에 대한 뜨거운 마음일 것이다.
2. 에큐메니컬 정신운동체 : 정신, 가치, 사회적 영성
YMCA운동은 에큐메니컬 정신운동체다. YMCA운동은 국가 권력과 제도에 의한 변화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한 사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혁명운동이다. 제도의 변화로만 궁극적 질서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에 도달하기 위한 공동체적 인간의 끊임없는 훈련을 강조한다. 개인의 내적 혁신과 사회 혁신이 구분되지 않으며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에큐메니컬운동은 신, 구교의 일치와 연합이라는 서구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과 이웃 종교 그리고 모든 만물의 상생과 생명의 일치로 확장되고 있다. 일치는 내 안에서 타자를 찾지 않고, 타자 안에서 나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다양성 안에서 찾는 일치다. 하나님을 절대화시키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정의와 평화, 생명의 질서를 추구하는 정신. 이것이지 않을까?
세상은 물질만능의 경쟁과 불안한 삶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며 공동체적 인간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내몰며 법인격(개인)의 자유를 위한 국가 기능은 강화되고, 구체적인 한 인간(개인)의 자유를 위한 기능은 축소된다. 이로 인해 초국적인 군산복합체와 기업(법인격으로써 개인)의 지배질서는 더욱 강화되고 약자인 개인(사람)은 흩어지고 불안한 존재가 된다. 19~20세기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생산력주의라는 공통의 기반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성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 생태계를 공존과 상생의 터전이 아닌 인간의 이용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서구 제국에 의해 빈곤과 절망의 땅으로 전락한 3세계는 자신과는 무관한 행동의 결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세계는 일국에서 세계로, 인간의 문제에서 지구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제도와 시스템에서 삶의 질서와 문명의 문제로 넓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서구 자본주의는 그 해답을 과학기술로부터 찾고 있다. 그 결과 인류는 지금, 생존 가능한 지구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다. 또한 현대 문명에 기초한 삶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가치와 시스템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슨 답을 할 수 있는가?
기독교의 시작인 야훼신앙은 노예들의 고백이다. 이집트 노예들의 해방에 대한 염원이자 찬미이다. 가족과 고향을 잃은 포로된 자들의 절망과 희망의 노래다. 국가 없는 해방자들의 자기 통치를 위한 질서이자 정신이며 훈련된 이들의 신앙이다. 예언자들은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고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해 죽기까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이들이다. 기독교는 세상의 질서와 다른 하나님나라의 질서와 주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희망의 노래다. 국가가 없는 이들의 삶의 질서이자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구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치유와 위로이자, 지치고 상처받은 세상 만물의 절망의 외침이자 희망의 찬가다. 사랑과 평화 그리고 생명을 향한 고백이다. 세상의 평화와 다른 예수의 평화를 추구하며, 이미 우리 안에 있지만 또 새롭게 와야 할 하나님나라를 소망한다.
기독운동은 이집트 노예들과 바벨론의 포로들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제국의 갈릴리 민중들에 의해 세상과 다른 하나님나라의 주권과 질서가 선포되고 국가를 잃은 조선 민중에게 희망으로 피어난 운동이다. 한국YMCA운동의 정신사적 맥락은 이처럼 일제 식민지 조선 민중의 해방에 대한 열망(Context)과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 전통(Text)이 맞닿아 있다.
한국YMCA 에큐메니컬운동은 이와 같은 사상적 전통을 이미 잉태하고 있으며 종교적 영역의 일치로만 제한되거나 갇히지 않는다. 세상과의 일치, 온 만물 우주와의 상생을 말한다. 또한 에큐메니컬운동은 지금의 세계가 제기하는 지구 시민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한 기본 태도이자 정신이며,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상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응답이다. 이처럼 에큐메니컬은 강자의 윤리가 아닌 약자의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생명의 울림이자 연대의 몸부림이며 예수운동의 핵심적 복음이다. 약자가 말하는 정의이자 평화이며 생명이다. 사랑이다. YMCA운동은 복음적 전통에 기초한 에큐메니컬운동의 시작이었다. 복음과 에큐메니컬은 구분되거나 양립되지 않는다. 하나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르고 구분하는 것이며 자신의 이해를 투영하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도는 상생의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권력이 주는 세상의 질서가 아닌 인간혁명을 꿈꾼 '하나님나라의 영성', '가나안 여정의 훈련', 그것이 에큐메니컬이다. 에큐메니컬 정신의 본연을 찾아가는 운동은 한국 기독교의 혁신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지구 시민사회의 변혁적 영성, 사회적 영성을 공유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기도와 연구, 나눔과 실천의 전통은 우리가 갖고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3. 청년 운동체 : 변화의 꿈, 사람을 키우는 운동
YMCA운동은 이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 청년들의 운동이다. 영국 산업혁명기 갈 곳을 잃어 헤매던 청년들의 정신적, 영적 각성과 개선을 위해 조지 윌리암스(George Williams) 등 12명의 젊은이들에 의해 창설된 런던YMCA로부터 시작된다. YMCA운동은 이처럼 청년들에 의해 청년들의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1855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YMCA 세계대회는 YMCA운동의 근본 원리가 되는 파리기준을 채택하고 세계YMCA연맹(The World Alliance of YMCAs)를 결성한다. ‘파리기준’의 근본 원리는 19~20세기의 모든 에큐메니컬운동체의 고전적 원칙이 되었으며, YMCA운동은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한국YMCA운동 또한 구한말 동학혁명의 실패와 청·일 주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근대 자주국가 수립을 위한 청년들의 정신적 가치운동체로 만들어진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듬해인 1899년, 150여명의 한국 청년들에 의해 YMCA 설립 청원운동이 일어나고 1901년 9월에 배재학당YMCA가 창립된다. 한국YMCA 창립의 책임자로 파견된 질레트가 한국에 온지 5개월만의 일이다. 이것은 1896년 당시 배재학당 협성회 멤버였던 신흥우 등 한국 청년들의 자발적 움직임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일 것이다. 한국YMCA전국연맹의 전신인 조선기독교청년회는 9개의 학생YMCA와 1개의 시청년회(황성기독교청년회)의 연합으로 창립되었다. 당대의 청년은 YMCA운동의 주동적 세력이었다. 이것은 이후 친교와 사업 중심의 시청년회와 운동성과 자발성을 생명으로 하는 학생 조직의 상호 견제와 보완이라는 YMCA운동의 중요한 조직적, 운동적 원칙이 된다. YMCA운동은 이상재의 ‘노인이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보고 노인이 되라 할 수 없다’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 청년을 모으고 육성하는데 힘썼으며 1910년부터 시작된 하령회는 1919년 3.1운동의 시작과 전국적인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YMCA운동의 발전은 역사적으로 학생Y 조직이 활성화되어 훈련된 지도력이 공급될 때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1910년 이후 10년 동안의 학생 하령회는 3.1운동의 청년 지도력과 20년대 협동조합운동의 지도력들을 제공하는 통로였으며, 1950~60년대 대학Y를 통해 성장한 지도력들에 의해 1970~80년대 YMCA운동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0~80년 학생기독운동과 노동운동, 청년Y 운동으로 육성된 청년 지도력들이 1980~90년대 YMCA운동을 이끌게 된다. 이것은 운동성과 자발성을 기초로 하는 학생Y와 청년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학생YMCA운동의 전통은 1969년 교회대학생운동(CSM)과의 통합으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으로 학생YMCA가 해소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단절되게 된다. KSCF는 학생기독운동의 통합적 선교 역량을 확대하고, 7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높은 기여 등 긍정적 평가가 높고 학생기독운동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YMCA운동 내부에서는 YMCA운동이 현재 겪고 있는 이념의 빈곤과 지도력 위기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1950~60년대 세계학생기독운동(WSCF)의 요청과 국내 지도자들의 이해 그리고 시대적 조건에 따라 추진되었던 대학YMCA(SCA)와 교회대학생운동(CSM)의 통합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통합 당시, 연대 방식에 대한 학생 지도부 내의 다양한 이견을 포함하여 깊게 숙고되어야 할 과제이다. 더불어 지금의 학생기독운동의 진로와 협력에 대한 깊은 성찰과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YMCA운동이 운동성과 자발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에 기초한 운동체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생과 청년들 가운데 자생적인 운동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세대로서 청년층이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YMCA운동의 정신과 이념을 자각한 세력으로서 청년층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60년대 말, 학생기독운동(SCM)을 포기했던 미국 기독교는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에 좋은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YMCA 내부적으로는 1970년대 초부터 조직되기 시작해 한 때, 700~80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수련회를 개최했던 청년YMCA운동이 시대적 조건에 맞는 운동체로 성장하지 못하고 좌초한 원인에 대해서도 진지한 탐구가 요청된다.
4. Volunteerism에 기초한 Association 운동
- 시민사회를 확장하는 운동, 운동을 만드는 운동
YMCA운동의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는 Association이다. Association운동은 신분해방과 근대 민족국가 수립 과정에서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지 못하던 民의 협동과 연대의 자발적 결사운동이며, 자기통치운동이자 자립 운동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은 1900년대 초반 이미 이와 관련한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자율적 통치 전통에 근거한 시민사회를 지지하였다. 토크빌이 볼런티어 운동과 정신에서 19세기 미국 민주주의의 힘을 찾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YMCA는 이와 같은 사상적 전통에 따라 형성된 운동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기독교 전통과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한국YMCA 조직 형성의 정신적 근간이기도 하다. ‘국가 없는 식민지 상황’의 민중들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자구적인 자치와 자립, 협력이 요구되었다. 초기 YMCA운동은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과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설립 초기 한국YMCA는 각종 근대화 교육과 스포츠를 통해 젊은이들을 불러 모았다. 20년대 조만식과 평양YMCA에 의해 추진되었던 물산장려운동, 민족기업과 민교 창립운동 과 신흥우와 홍병선 등에 의해 추진되었던 협동조합운동과 향촌Y운동 그리고 이상재의 신간회 운동은 YMCA운동의 이 같은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등장했던 이와 같은 국내 민족운동을 단순한 농촌계몽운동이나 민족자치운동으로만 폄하하거나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인도 간디의 물레가 식민지 지배를 인정한 자립의 상징이 아니었듯, 물산장려운동과 향촌Y 협동조합운동은 ‘국가 없는 사회에서 자기통치의 시민사회를 확장하기 위한 운동’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국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의 Association운동, 자기 통치운동 등에 대한 통합적인 평가가 필요한 대목이다.
이와 같은 운동의 전통은 시민사회의 공론을 조직하고 시민사회를 확장하는 운동으로 YMCA운동을 특징짓게 한다. YMCA운동은 이로 인해 운동을 만드는 운동, 조직을 만드는 조직이라 불리게 된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YMCA는 개인과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시설과 캠프 중심의 미국YMCA 프로그램들이 그대로 도입되면서 이와 같은 전통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서구 기독교, 특히 미국YMCA와 교계의 지원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 프로그램들이 활성화됨에 따라 일면 한국YMCA가 활성화되었던 측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YMCA운동의 기본 정신이라 할 ‘民의 자발적 결사와 자기 통치의 원리와 동력’이 쇠퇴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Association의 원리와 동력이 약화된 채 주장되는 청소년운동과 지역운동이 자칫 한국YMCA운동이 현실을 외면하거나 문제의 중심에 뛰어들지 못한 채 주변부에 머물게 하는 합리화의 수단이 되지는 않았는지 경계해야한다. 미국YMCA 인디언 캠프가 한국YMCA를 통해 유행했었다는 사실은 이 같은 한국YMCA 현실을 잘 보여주는 한 단면일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시청년회를 통해 시민논단과 같은 시민사회의 공론을 조직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대학Y를 통해 학생사회개발단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은 YMCA운동의 역사적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YMCA는 또한 1970년대 초반부터 ‘YMCA 정신과 구현되고 있는 프로그램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프로그램을 통해 어떻게 YMCA 가치를 구현하고 있으며, 사람을 육성하는데 기여하는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우간다 캄팔라선언의 영향으로 1974년, 한국YMCA 자체의 목적문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3년만인 1976년, 그 성과를 보게 된다. 그것이 지금의 한국YMCA 목적문이다. 1970년대 한국YMCA운동은 비전을 정립한 목적문을 발표하고, 간사 지도력 훈련을 위한 간사학교 등의 체계를 마련하는 등 운동의 기반을 다진 시기였다. 1980~90년대 한국YMCA운동은 1970년대 중반 양곡은행을 시작으로 농촌개발사업, 농민 지도자 교육과 향촌Y 재창립과 농민회 조직, 중등교사협의회 조직을 통한 교육운동의 시작, 노조 지도자 교육, 환경 지도자 교육 등을 통한 시민사회운동 리더십 육성, 소비자 교육과 시민자구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과 인간의 얼굴을 한 21세기 지역만들기 운동, 다양한 영역과 지역에서의 시민사회단체 조직 및 지원 등 시민사회 확장과 리더십 육성이라는 YMCA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국운동체로서 한국YMCA운동이 당면한 질문은 ‘볼런티어 정신과 Association이 살아 있는가?’라는 것이다. 한국YMCA운동은 ‘한국YMCA가 말하는 지역은 무엇인가?’, ‘지역에서 볼런티어 정신과 Association 운동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그리고 구현되어야 하는가?’, ‘지금의 시대정신을 무엇으로 읽고 있는가?’, ‘이를 위한 운동의 비전과 사람이 준비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리고 있다. 전국 65개 지역 10만 회원이 준비된 회원인지, 民의 구체적인 삶에 다가가지 못하고 단지 공간적 의미의 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역을 말하고 구체적인 생활현장을 말하는 것은 공동체적 삶의 자기 통치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연대하고 협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YMCA운동의 본질 중 하나이다. 지역이 단순한 행정구역이나 프로그램 설정 단위의 편의적 구분이나 공간적 범주로만 이해되거나 이에 제한되고 있다면 형식적 수준의 지방자치에 머물고 있는 한국의 지방자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시민사회와 호흡하며 지도력을 육성하고 재원을 만드는 운동체로서 YMCA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은지’, ‘서비스 전달체계로서 그 성격이 강화, 고착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또한 50년대 이후 미국YMCA 프로그램과 기구 경영논리를 그대로 직수입하고 외원에 의존했던 한국YMCA운동이 YMCA운동의 정신은 사라진 채 경영논리만이 지배하는 비대화되고 기구화된 YMCA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안타깝지만 정신적 발전소로서의 영적 전통과 사회 개혁운동의 진지로서 YMCA운동의 동력이 이미 소진된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에 한국YMCA는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5. 지구시민사회운동체로서 지역과 전 지구적 의제의 통합과 통섭
: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하나님의 평화
한국YMCA는 창립 초기 외국 선교사들의 필요성과 자립자강의 원리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당대 청년들의 필요성이 만나면서 형성되었다. 이런 필요성으로 만들어진 것이 배재학당YMCA(1901년 9월)이었고, 5개국의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참여해 만들어진 것이 황성기독교청년회(1903년 10월 28일)였다. 이와 같은 주객관적인 필요성과 당시 주변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라는 시대적 상황 그리고 초기 YMCA 지도부가 국제적인 선교사들과 인사들이라는 측면에서 한국YMCA운동은 국제적인 맥락에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윤치호 등 한국YMCA 인사들이 1910년 에딘버러(Edinburgh) 선교대회에 한국을 대표하여 최초로 참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학생YMCA는 1922년 세계기독학생총연맹(WSCF)에 한국 SCM을 대표하여 가입하게 되고 국제학생기독운동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된다. 또한 학생YMCA 출신들은 선교사들을 통해 외국 유학을 경험하며 이후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던 협동조합을 통한 향촌Y운동과 해방 이후 토지 개혁의 모태가 되었던 농촌 개혁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국제적 네트워크로서 YMCA와 현장의 통합이라는 Y운동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YMCA운동을 지역 현장에 근거한 지구시민사회운동체로서 설명하는 맥락이다. 전 지구적 생각과 지역에 기반한 활동, 지역적 사고와 전지구적 활동의 통합체, 지구시민사회운동체로서 YMCA운동의 원리이다. 세계YMCA는 현재, 에큐메니컬운동의 모태로 시작되어 현재 122개 나라에서 서로 협력하며 활동하고 있는 민간 영역의 최대 국제조직 중 하나이며 UN과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의 공식 파트너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측면에서 지구시민사회운동체로서 YMCA운동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특히나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 위기와 정의, 빈곤, 노동의 이주, 자원 쟁탈, 전쟁 등 초국적 자본의 지배질서가 획일화되고, 이에 따른 산업과 과학문명의 문제(AI(Artificial Intelligence)와 과학기술주의)가 지구 시민사회 공동의 문제로 등장한 이 때 지구시민사회운동체로서 YMCA운동의 재구성이 요청되고 있다.
우선, 한국YMCA가 지구시민사회운동체로서 준비되어 있는가의 문제다. 한국YMCA는 세계YMCA 운동사에서 독특한 성장 배경을 갖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나라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서구 제국의 식민지 경험에서 이식된 친교 중심의 조직체였다면, 한국YMCA는 식민지를 거부했던 운동체라는 역사적 경험이다. 이것은 지금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서구 제국의 관점이 아니라 약자의 관점에서 제기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3세계와 서구 제국을 연결하고 조정할 수 있는 역사적 권위를 한국YMCA는 갖고 있다. 패권과 힘에 의한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약자의 연대와 정의에 기반한 하나님의 평화를 한국YMCA는 말할 수 있다. 강자의 평화가 아닌 약자의 평화를.
그러나 한국YMCA는 이와 같은 훌륭한 역사적 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에 걸맞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YMCA라는 국제네트워크를 활용한 의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의 의제 또한 적극적으로 수렴하지 못하고 있다. 지역과 전 지구적 의제의 통합과 통섭이 단절된 채 단순한 교류와 협력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재원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지도력의 문제이다. 세계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이 없다는 것이 하나의 문제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지도력을 육성해 오지 못했다는 것이 두 번째다. 한국YMCA는 해방 이후 외원에 의존했던 체질에서 그 형태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그 본질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자원과 호흡하며 YMCA의 메시지로 깊은 수원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미 미국YMCA 스스로 벗어던진 건물 중심의 기구 경영에 지금도 발이 묶여 있다. 이것은 1950년대 미국YMCA의 뿌리 깊은 부정적 유산이다. 이로 인해 한국YMCA는 아직도 기존 틀에 갇힌 채 스스로 재원과 자립의 물적 토대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건물과 외원 중심으로 체질화된 운영방식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만이 생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채 사라진 거대한 공룡의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몇 몇 대도시 방식의 건물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새로운 발상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제안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흐름을 읽고 이를 적극적으로 개척해갈 수 있는 지도력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국YMCA는 지구시민운동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산과 국제 네트워크,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제 단순한 교류와 협력사업 중심에서 벗어나 지구 시민사회의 의제를 한국 시민사회의 현장과 조응할 수 있는 통찰력과 한국 시민사회의 의제를 지구 시민사회의 의제로 네트워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지구시민사회의 평화 의제에 정확히 조응하고 대응하며 이것을 이끌고 갈 리더십을 육성하는 섬세한 노력이 요청된다. 지구시민운동체로서 한국YMCA운동이 갖고 있는 훌륭한 밭에 작은 씨앗을 준비하는 자가 결국 한국YMCA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을 깨우게 될 것이다. 한국YMCA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제안되고 있는 생명평화센터의 역할이 소중한 이유다.
또 하나는, 근대 이후 한국YMCA가 서구의 가치 체계와 문화의 일방적인 전파 수단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물론 한국 기독교와 YMCA가 제국의 총부리에 의해 이식된 것이 아니라 청년 지식인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수용되었고, 교육과 산업, 스포츠 등 서구 근대화된 문물을 통해 개혁적이고 근대화된 세력을 형성했다는 측면은 여타 3세계와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민사회의 일천하기만 정신사와 문화사의 현실은 한국YMCA의 역할을 돌아보게 한다. 한국사회는 19세기 말 이후 한국 사상사와 정신사가 주체적으로 현대화되지 못하고 그 자취조차 찾기 쉽지 않다. 또한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 시기 친일, 부일세력을 재등장시키고 극우적 반공주의와 미국 중심주의 사고를 잉태한 일말의 책임은 없는가 자문할 필요가 있다. 100년의 한국YMCA운동사에서 소중히 다뤄야할 부분이며 그 과오에 대해 겸허히 지적되고 성찰되어야 할 사안이다.
초기 한국YMCA운동은 식민지 정복과 전쟁이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었던 민족국가 단위의 세계화 시기 가운데 길을 찾았다. 지금의 지구화는 다층적이다. 전반적으로는 민족국가를 약화시키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되기도 하며 생명과 문명의 문제가 일국의 문제에서 전 지구적인 문제로 전면화되는 시기이도 하다. 지구시민사회운동체로서 1기 YMCA운동의 목표가 민족자주국가 수립이었다면, 2기 지구시민사회운동체로서 YMCA운동의 목표는 전 지구적인 평화와 생명의 전기를 만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한국YMCA는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이제 지구시민운동체로서 한국YMCA운동의 정체성과 역할을 정립해가는 과정은 한국 정신사에 기반한 보편적 정신 운동체로 한국YMCA운동을 가다듬어가는 일일 것이다.
결론 삼아
한국YMCA운동을 지금 말한 다섯 가지로 설명하는 일은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의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YMCA운동을 이해하고 구상하는데 필요한 일면의 정답과 작은 밑돌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기대한다. 학생기독운동을 시작으로 한국 시민사회운동을 생의 일부로, 그리고 보편적 운동으로서 에큐메니컬운동가로 살고자 했던 여행의 한 자락에서 나누고자 한 것은 ‘말씀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스스로 운동하며 우리 안에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사랑으로 YMCA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YMCA라는 집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우주로 청주YMCA와 회원들이 이끌릴 수 있기만을 기도한다.
“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 (누가복음 4:18)
"
▢ 인물 해제
1. John R Mott는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의 중심적 인물로서 한국Y와 NCCK 창립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대학Y운동을 시작으로 YMCA 국제위원회 학생부간사(1888년~1915년), WSCF 창설(1895년) 및 회장 역임, 에큐운동의 결정적 사건이라 말하는 에딘바라 대회 주최(1910년) 및 회장, 학생자원봉사단(SVM) 회장(1915~1928), 국제선교협의회(MIC) 회장(1912~1942), 세계YMCA 회장(1926~1937) 등을 지냈으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한국Y와는 한국Y 창설을 위한 조사관 (라이언) 파견, 초대 총무 질레트 파송, 1907년 내한 강연, 황성기독교청년회 건물 신축 기금 지원, 1923년 농촌운동 지원, 1924년 NCCK 창립 등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에도 많은 공헌을 남겼다. 모트에 대해 소개를 하고 싶은 이유는 아마도 그에 의해 주창되었던 에큐메니컬운동의 정신과 연대의 기운이 그가 감리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파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았던 생활인기독자였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성직화된 목회자와 교권 중심의 한국교회에서는 다시 보기 힘든 지도자 유형일 것이다.
2. 김정식은 한국인 최초의 YMCA총무로서 1906년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유학생들을 조직하기 위한 재일본한국YMCA를 창립하고 초대 총무를 지냈다. 일본에 있는 기간 동안 우찌므라 간조와의 교류를 통해 무교회주의를 한국에 소개하였고, 일본에 최초의 한인교회를 창립했다. 한국에 소개된 무교회주의는 이후 김교신, 함석헌 등에 의해 ‘성서조선’운동으로 교권화된 성직사회에 큰 충격과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이단시되고 있다. 김정식은 연동교회 초대목사인 게일에 의해 전도되었으며 연동교회에서 이상재 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목회자의 길을 권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생활인기독자(평신도)로서 지내며 기독운동을 추구했던 그의 삶을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3. 이대위는 북경지역 한인YMCA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중앙YMCA 학생부 간사를 역임하며 연동교회에 기독동우회를 조직하여 연동교회가 작은 중앙YMCA운동의 요람으로 소문나기도 하였다.
4. 최흥종은 목사이자 선교사이며 광주YMCA 창립자. 나환자와 결핵환자와 평생을 함께하였지만, 광주 YMCA 설립, 노동공제회와 신간회 전남지회장을 역임하고 모루히네(아편) 방독회 회장, 재만인권위원회 회장, 그리고 해방 후 건국준비 위원회 전남지회장 역임하는 등 목회자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사회사업가로 활동했으며 최초로 광주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룬 인사이다.
5. 현영학은 1930년대 미국 펜들힐을 방문하고 돌아와 한국Y에 퀘이커를 소개하였으며, 구체적인 실천 형태로 Peace Maker Club(PMC)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무단통치기 일제하에서 평화주의 운동이 어떤 실천 형태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평가는 많은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현재 평화주의 운동 그룹이 갖고 있는 내적 수련과 공동체주의 그리고 사회제도와 구조의 문제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6. 정인세는 1920년대 선린상업학교에 다닐 때 서울YMCA 평화구락부에서 현동완의 지도를 받았으며, 유도를 잘했다고 한다. 평양신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광주에 내려가 광주YMCA 총무로 일했으며, 해방 이후 현동완 총무의 소개로 이세종선생을 소개 받고 함께 일하면서 맨발의 성자 이현필을 알게된다. 4살 아래인 이현필을 선생으로 모시면서 YMCA를 떠나게 되고 이현필과 함께 동광원을 세워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65년 광주에 귀일원을 창설하여 초대 원장을 지낸다.
7. 조만식이 국가없는 사회에서 민중 스스로의 자각과 연대를 통한 시민자치의 확장을 위해 노력했던 물산장려운동과 교육운동, 민족기업운동은 그를 한국의 간디로 불리게 한다. 조만식의 자치운동은 식민지라는 조건과 평안도가 역사적으로 중앙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으로 민 스스로의 자구운동과 강한 협동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시경의 국학운동과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의 얼과 혼을 일깨운 양대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만식은 1908년부터 1913년까지 5년간 일본에서 유학할 때, 학생Y운동의 개척자로서 또는 유학생Y운동의 선구자로서 재일본 한국YMCA에 관여하였으며, 192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YMCA를 창설하고 12년간 평양YMCA 총무로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