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영상) 에큐메니컬 YMCA 운동 이해 (안재웅, 한국YMCA전국연맹유지재단 이사장)
사무실에 얼른 영상 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또 가져본 날...
오늘 사무실에서 안재웅 이사장님 모시고 YMCA 간사학교 강의를 위한 '에큐메니즘, 에큐메니컬운동의 역사와 미래, YMCA운동'에 대한 영상을 제작(?)했다.
줌으로 강의하는 김에 영상으로 제작해 보다 많은 분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시도했지만, 노력에 비해 질이 보장이 안될 듯한 안타까움...
(영상 1) 안재웅의 에큐메니컬운동과 YMCA운동: 에큐메니즘과 역사 이해 1
https://youtu.be/8sanx-zBrtU?si=PPyamzlXXvAPs9wg
https://youtu.be/WUWnkExyM08?si=LGey_wrfSd_ADORx
https://youtu.be/eY5wOBrQi6s?si=osKI5samD9yF8QT5
에큐메니컬 YMCA 운동 이해
안재웅 (한국YMCA전국연맹유지재단 이사장)
1. 에큐메니컬 운동 이해
교회사학자들은 20세기에 일어난 에큐메니컬 운동을 16세기 종교개혁과 더불어 교회사의 양대 분수령으로 꼽는다.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갈라진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묶으려는 운동 이 바로 에큐메니컬 운동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의 자세라 하겠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은 지났지만 이를 계기로 에큐메니컬 운동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첫째: 에큐메니즘(Ecumenism)에 관한 이해
에큐메니컬 운동은 에큐메니즘을 이해하여야 하고 그 말의 뜻이 “오이쿠메네” (oikoumene)라는 그리스말에서 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오이쿠메네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the inhabited earth)이라는 포괄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오이쿠메네는 “오이케오”(oikeo) 즉 거주한다는 동사와 “오이코스”(oikos) 즉 집, 처소, 거처, 또는 가족 (household)이라는 명사를 모두 포함한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오이쿠메네는 우주 가운데서도 지구라는 곳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인간, 동물, 식물, 그리 고 광물 등 모든 피조물들이 한 식구처럼 살아가는 숙명적인 공동체를 뜻한다.
에큐메니즘은 성서적 의미로 보면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엡 4:5)라는 고백과 함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보편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이해하면 된다.
에큐메니즘의 핵심은 일치와 갱신을 앞세워 갈라진 교회를 하나의 교회가 되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절대 복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이다. 결국, 에큐메니즘은 교의학에 기반을 두고 선교신학, 상황신학, 정치신학, 과정신학, 실천신학 등을 포괄하는 동시에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 함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둘째: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 이해
초대교회의 하나인 고린도 교회를 보게 되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라는 바울의 서한에서 교회 분파를 걱정하는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초대교회는 1054년 대분열이 생길 때 까지는 하나의 교회였으나 결국 동방정교회와 서방가톨릭교회로 갈라지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 등 5대 교구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동방정교회는 두 줄기로 갈라지게 되는데 Greek Orthodox와 Russian Orthodox는 the Greater Oriental Churches로 Armenian, Syrian, Coptic 그리고 Jacobites Orthodox는 the Lesser Oriental Churches로 양분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Martin Luther가 1517년 종교개혁을 주도함으로써 개신교가 시작되었고 개신교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 역시 사소한 분열을 경험했지만 하나의 교회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1054년 대분열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정교회로 갈라진 원인의 하나가 바로 신학 적인 쟁점인 필리오케 (filioque)라는 이해 때문이었다. 라틴말의 filioque는 “그리고 아들로 부터”라는 뜻으로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정교회의 입장을 589년 톨레도에서 개최된 교회공의회가 filioque라는 문구를 넣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정교회는 지금까지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전통을 깨고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 나온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서방측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갈라진 후 에도 이 논쟁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800년 성탄절에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제국의 샤를 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고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시켰다. 갈등이 심 화되면서 서방교회의 교황과 동방교회의 총대주교는 정치세력과 연합하여 갈등이 점점 본격 화 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첫 번째 “에큐메니컬협의회" (Ecumenical Council)가 니케아 (325년)에서 열린 후 일곱 차례나 계속되었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381년)협의회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공동의 신앙고백으로 확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초창기 에큐메니컬 협의회가 만들어 낸 성과라 하겠다. 또한 교회와 국가와의 미묘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도 에큐메니컬 협의는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교회는 중세 암흑기 이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경험하였고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18-19세기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전성시대를 지나 20세기와 더불어 에큐메니컬 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가운데 한분인 W.A. Visser‘t Hooft는 에큐메니컬 운 동의 시작을 1910년 에든버러에서 개최한 “세계선교사대회" (World Missionary Conference)로 꼽는다. 물론 에큐메니컬 운동과 관련된 여러 모임을 거명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1910년을 에큐메니컬 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보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에든버러 선교사대회 앞서 1854년 New York과 London에서 세계선교를 위한 모임이 개최되었다. 그 후 1860년 Liverpool에서 그리고 1878년과 1888년 London과 1900년에는 New York에서 지속적으로 모임이 이어졌다. 1910년 에든버러 선교사대회를 주도한 사람은 John R. Mott이다. 그는 미국 감리교 평신자로 당대 에큐메니컬 운동의 여러 모임의 사회를 도맡아 할 만큼 지도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또한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가 암스테르담에서 열릴 때에도 John R. Mott가 사회를 하였고 그는 명예회장으로 추대된바 있다. John R. Mott는 1895년 WSCF를 창설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 기구의 총무직을 수십년간 감당하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획기적인 발전을 견인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1844년에 창설된 YMCA운동과 1895년에 시작한 세계학생기독교연맹 (WSCF)의 표어는 요 한복음서 17장 21절에 기록된 “그들 모두가 하나 되기를” (that they may all be one/ut omnes unum sint)바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담고 있다. 이 두 에큐메니컬 기구는 교 회로 하여금 분열을 극복하고 일치와 협력 그리고 선교와 봉사를 위해 나설 수 있도록 나름 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
Visser‘t Hooft는 그의 저서 “Has the Ecumenical Movement A Future” (1974) 라는 책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시대적 구분을 하고 있다.
1910-1934
이 시기에는 John R. Mott를 중심으로 “국제선교협의회”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1921)가 창설되었고, Charles Brent는 “신앙과 직제” (Faith and Order, 1927) 운동을, 그리고 Nathan Soederblom은 “삶과 사업” (Life and Work, 1925) 운동에 초석을 놓았다.
Mott는 “우리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하자” (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라는 기치로 세계의 복음화가 바로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교적 사명이요 과제 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또한 지금이야 말로 ”선교의 적정기“ (The Decisive Hour of Christian Mission) 라면서 선교의 긴박성을 호소한 바 있다.
Brent는 신앙과 직제 운동은 교파적 이해를 초월한 “교회의 가시적 일치” (The Visible Unity of the Churches)를 이룩하는 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임을 강조함으로서 일치 운동의 사도라는 명성을 얻었다.
Soederblom은 삶과 사업 운동의 목표를 “Serve Together" 라고 못 박고, 1914년을 계기 로 세계가 자국의 국익에 따라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게 되자 ”Life Together", 그리고 “Work Together"를 그리스도인의 이상으로 삼았고 기독청년들 (YMCA, YWCA)과 학생들 (WSCF)이 주축이 되어 당장 이를 실천하도록 촉구한 바 있다.
1934-1948
1934년을 시작으로 독일의 전체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되자 Joseph H. Oldham을 중심으 로 삶과 사업 운동을 “영성운동” (Spiritual Movement)에 초점을 두어 활발하게 전개하였 다. 독일의 경우는 Martin Niemoeller와 Dietrich Bonhoeffer 그리고 Karl Barth등 여러 교회지도자들이 “고백교회" (The Confessing Church)를 만들어 Nazi 정권에 저항하였다. 반면에 대 다수의 교회 세력은 Nazi정권에 순순히 따르게 되었는데 이 무리들을 “독일 크리스천” (German Christians)이라 부른다. 독일의 고백교회운동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 경우라 하겠다.
이런 혼란과 위기 속에서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신학자들 가운데 Karl Barth, Reinhold Niebuhr, Emil Brunner, Paul Tillich, 그리고 Nicholas Berdyaev와 같은 분들로 “위기신 학” 또는 “변증신학” 과 같은 신학적 담론이 참담해진 현상을 헤쳐 나가는 혜안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C. H. Dodd와 Hendrik Kraemer는 “성서신학” (Biblical Theology)에 역점을 두고 성서를 상황에 따라 새롭게 재해석하도록 실천적인 주장을 펼치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당면한 과제, 즉 전쟁, 갈등, 핍박, 착취, 소외, 그리고 인권침해 등을 이겨내기 위해 서 삶과 사업 (Life and Work)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48-1960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가 창설될 때만 하더라도 두 차례나 세계전쟁을 겪은 터라 허무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던 시기였다. 동서 냉전의 사상적 갈등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중심부가 될 WCC의 탄생을 환영하였다. Karl Barth는 “내 신학 도서실이 몽땅 이 모임에 와있다”라는 말로 WCC 창립총회의 인상을 감동적으로 피력한바 있다. WCC는 “우리는 함께 있기를 원한다” (We intend to stay together)라는 말을 Kathleen Bliss가 함으로써 에큐메니컬 운동의 이상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WCC는 “책임사회” (Responsible Society)라는 과제를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의제로 내 세우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전력을 기우렸다.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교회들이 대거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유럽교회와 서방교회와의 긴장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조율로 말미암아 분열과 갈등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가령 “Christian-Marxist Dialogue”와 같은 예는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1925년 "카나다연합교회“ (The United Church of Canada, 이하 UCC)와 1947년 “남인 도교회” (The Church of South India, 이하 CSI)가 그리고 1957년에는 “북인도교회” ( The Church of North India, 이하 CNI)가 조직 되었는데 이는 교회일치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CSI는 성공회, 장로교, 그리고 감리교가 하나가 된 연합교회의 면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그리스도교단 (The United Church of Christ in Japan, 이하 UCCJ)과 필리핀연합교회 (The 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이하 UCCP)는 국가의 통제에 의해 통합된 경우이다. 1977년 오스트렐리아는 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로 교단 통합을 하였으며 문호를 열어놓고 계속적인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은 중국기독교협회 (The China Christian Council, 이하 CCC)라 하여 교파 후기체제를 만들었다. 아시아교회는 연합한 (United), 연합해가는 (Uniting), 중국처럼 post-Denominational Church가 혼재해 있는 대륙이다. 아시아 에큐메니컬 운동은 예수 안에서 하나 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아시아기독교협의회"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이하 CCA)의 전신인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 (East Asia Christian Conference, 이하 EACC)가 1957년 인도네시아 프라팟에서 창설준비대회가 열렸고 1959년 말레이시아 쿠아라룸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선출된 EACC 지도력은 1961년 제3차 WCC 총회를 인도의 뉴델리로 유치해서 무난히 회무를 마무리함으로써 아시아 교회의 저력을 과시한 바 있다.
1960-현재
이 시기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중대한 획을 긋는 사건들이 줄을 잇게 된다. 제3차 WCC총 회가 1961년 뉴델리에서 개최되었고 이때 “국제선교협의회” (IMC)가 WCC로 통합한 일이다. 또한 러시아 정교회는 동유럽의 정교회들과 함께 제3세계에 속한 신생교회와 더불어 대거 WCC 회원이 되었다.
“세계학생기독교연맹” (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이하 WSCF)은 1960년 스 트라스브르그에서 “교회의 생명과 사명” (The Life and Mission of the Church)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 했는데 에큐메니컬 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이때의 지도자들은 D.T. Niles, Lesslie Newbigin, W.A. Visser't Hooft, Emil Brunner 그리고 Karl Barth와 같은 인물들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신학적으로 다듬어 내어 에큐메니컬 운동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WCC와 일치와 협력을 다루는 사무국을 개설하였고 신앙과 직제의 문 제를 폭 넓게 연구해 오고 있다. WCC는 교회와 사회문제, 인종차별 철폐문제, 개발에 관한 문제, 오늘의 구원문제, 세례 성만찬 사역의 문제,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문제, 인권 교육 질병, HIV and AIDS문제, 복음과 문화문제, 성 평등과 여성지도력 개발문제, 난민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을 다루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제10차 WCC 부산총회 이후에는 “평화와 정의의 순례” 프로그램을 적절하게 이끌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활성화하고 있다. 2013년 WCC 부산 총회는 “우리는 함께 움직이기를 원 한다” (We intend to move together)라는 새로운 각오로 에큐메니컬 운동의 거보를 내딛게 되었다. 2018년 6월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Francis 교황이 WCC창설 7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WCC본부를 방문하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남북교계 지도자들도 여럿이 참석해서 역사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의 증인이 되었으며 신구교간에 협력과 우애를 다지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셋째: 에큐메니컬 운동의 신학 이해
에큐메니컬 신학의 바탕은 가시적 교회의 일치를 돕는데 있다고 하겠다. 비록 “교리는 갈 라 졌지만 봉사는 함께 한다” (doctrine divides, service unites)는 구호는 에큐메니컬 운 동의 정신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에큐메니컬 신학은 그리스도 교회의 본성, 세상을 위한 교회. 흖어지는 교회, 그리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명제를 신학적으로 정리해 냄으로서 교회 분열의 속성을 지양하고 일치를 이루어 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지체이므로 교회는 “하나이며” (One), “거룩 하고” (Holy), “보편적” (Catholic)인 동시에 “사도성” (Apostolic)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삼아 에큐메니컬 신학은 잘 정리 해내고 있다.
에큐메니컬 신학은 어떤 특정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자의 학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서로 common ground를 마련해서 consensus를 이루어 가는 “과정신학” (Process Theology) 인 동시에 삶의 현장을 중시하는 “상황신학” (Contextual Theology)이며 정의와 평화를 이 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행동신학” (Doing Theology)이요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 하려는 “선교신학” (Mission Theology)이라 하겠다. 결국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와 ”교회 의 선교“ (missio ecclesae) 그리고 “인간의 선교” (missio hominum)을 골고루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선교적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려는 포괄적 시도가 에큐메니컬 신학의 내용이라 하겠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회의 신학적 common ground를 찾기 위해 consensus를 도출해내는 일 역시 에큐메니컬 신학의 과제중의 하나라 하겠다.
가령 리마 예식서 (Lima Liturgy)로 불리는 “세례, 성례전, 사역” (Baptism, Eucharist, Ministry)에 관한 문건은 로마 가톨릭교회,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가 에큐메니컬 신학의 consensus를 이루어 낸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에큐메니컬 신학은 Theo-ecumenics, Eco-ecumenics, 그리고 Geo-ecumenics를 보다 깊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신학적 명제를 나는 2002년 홍콩에서 열린 CCA 창설 45주년 국제심포지엄에서 제시한바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특성은 복음중심 (Gospel-centered)이며 생명중심 (Life-centered)이라 하겠다. 아울러 에큐메니컬 운동은 선교 지향적 (Mission-oriented)이며 평화 지향적 (Peace-oriented)이고 봉사 지향적 (Service-oriented)인 동시에 나눔 지향적 (Share-oriented)이라 하겠다.
넷째: 에큐메니컬 운동의 과제 이해
에큐메니컬 운동은 흔히 제2의 종교개혁이라 부를 만큼 그 파급의 효과가 크다고 하겠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하나님-인간-자연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때문에 신학, 인간학, 사회학, 윤리학, 생태학 등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내실을 채워주는 일차적 학문이란 사실이다.
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당면 과제를 다음과 같이 12대 운동방향으로 요약하여 강조하고 있다.
●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주도하는 운동
●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는 운동
●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운동
● 화해와 치유를 이루어가는 운동
● 생명과 환경을 살리는 운동
●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등을 솔선수범하는 운동
● 바닥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
● 돌봄의 선교를 실천하는 운동
●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운동
● 전통종교와 사상, 전통문화와 민담, 전통음악과 미술 등을 다듬어내는 운동
● 아시아신학을 발전시키는 운동
● 통일과 복지가 함께 성취되는 운동 (한국의 경우)
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점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 신학의 내실화
● 조직의 활성화
● 운동의 특성화
● 윤리의 생활화
● 참여의 보편화
● 재정의 자립화
● 인재의 저변화
나는 2005년 제12차 아시아기독교협의회 (CCA) 총회가 치앙마이에서 개최되었을 때 총 무 보고를 통해 에큐메니컬 운동의 방점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 생명의 존중 (Respect life)
● 폭력의 배제 (Reject violence)
● 갈등의 해결 (Resolve conflict)
● 정의평화의 증진 (Promote justpeace)
● 인권의 보호 (Protect human rights)
● 보편적 가치보전 (Preserve common value)
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결단을 이렇게 촉구하였다.
● 새로 시작하기 (창조성)
● 수리하기 (지속성)
● 허물고 새로 짓기 (차별성)
●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닮기 (정체성)
●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에 동참하기 (역동성)
이런 과제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함께 협의하는 것은 물론, 교회는 다른 종교 및 여러 시민사회와 연대하면서 당면과제 해결의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에큐메니컬 운동이라 하겠다.
다섯째: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
에큐메니컬 운동은 한 세기를 훨씬 넘겨 발전해 왔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공과를 다르게 평가하겠지만 에큐메니컬 운동이 축적한 자산은 놀랄 만큼 큰 것이 사실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배출해 낸 지도력은 말할 것도 없고 방대한 신학적 기여도는 놀랄 만큼 크다. 또한 교회와 사회의 문제, 지속 가능한 발전문제, 약자 보호와 인권문제, 긴급구조 문제, 인류공동체의 미래문제 그리고 에큐메니컬 신학 내실화문제 등을 꾸준히 다루어 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주변 환경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제약하고 있다. 때로는 한계를 스스로 인식한 나머지 마땅한 방안을 강구하기 위하여 노력 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는 인간과 더불어 있게 마련이고, 교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필요성을 점점 인식하게 될 것이므로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는 그리 어두운 것만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동서 냉전의 대립과 갈등을 겪으면서 발전해 왔다. 오늘 우리는 미국 과 중국이 주도하는 2극체제의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다. 경제적 세계화가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인지공학과 첨단과학이 무섭게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환경파괴로 말미암아 지구는 자정 능력을 잃고 있다. 핵위협으로 인류는 불확실한 미래를 살고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하고 운동의 이념과 틀을 재정비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은 다보스포럼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은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있다. 세계평화포럼(World Peace Forum)은 중국이 주도하고 있으며 한국은 세계생명포럼(Global Life Forum)을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이 중심적인 역할과 주도적 참여로 성과를 이루어 나가야 하겠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Oikoumene, 즉 우주적이면서 Oikoudome, 즉 지역적인 운동을 펼쳐 나가야 한다. 인도의 신학자 M. M Thomas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circle of friends"가 주 도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매우 탁월한 통찰이라 하겠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에큐메니컬 운동이야 말로 집단지성이 이끄는 visionary movement라고...
우리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계기로 에큐메니컬 운동의 활성화가 시급하다는 인식을 거듭 확인하였다. 또한 새로운 에큐메니컬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여야 한다면서 중지를 모으고 있다. Martin Luther가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성서 (sola scriptura)”라고 외친 교훈은 영원한 진실이라 하겠다. 우리는 500년이 지난 현실에서 오직 회개 (sola metanoia), 오직 봉사 (sola diakonia), 오직 친교 (sola koinonia), 오직 주께 영광 (sola gloria Deo)을 더해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하겠다. 종교개혁을 Reformation으로 표기하는데 말 그대로 개혁을 뜻한다. 또한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교회들을 Protestant라 부르며 저항 즉 protest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저항과 개혁은 종교 개혁의 두 뿌리이다. Konrad Raiser는 WCC 총무로 재직하는 동안 에큐메니컬 운동의 재구성 (Reconfiguration)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그는 수차례 에큐메니컬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을 모아 진지한 협의회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지금까지 초석이 되었던 “일치, 선교, 봉사”라는 틀을 확고하게 견지하는 입장으로 결론을 지었다. 여기에 갱신, 교육, 나눔을 추가하여 일치와 갱신, 선교와 교육, 봉사와 나눔의 기둥을 우뚝 세워 에큐메니컬 운동을 확산해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보태고 싶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아날로그시대의 산물이다. 아직도 에큐메니컬 운동의 사고와 운동방식은 아날로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정보 통신 (IT)시대이며 인공지능 (AI)이요 디지털시대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하고 “드럼이 바뀌면 리듬도 바뀐다. 따라서 스탭도 바뀌어야한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에큐메니컬 운동의 대 전환이 요청된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지났지만 이를 계기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해서 더욱 간절하게 “구하고 (ask), 찾고 (seek), 두드리는 (knock)” 에큐메니컬 집단 지성과 에큐메니컬 일꾼들이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불의와 억압에 저항하며 정의와 평화, 생명과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릴 때 밝은 미래를 전망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일에 우리 모두는 부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이다. 아울러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요원이라는 자각과 자부심을 가지고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하겠다.
2. YMCA운동 이해
어느덧 YMCA가 창설 된지도 올 해로 179년이 되었다. YMCA는 지구시민운동체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기구로 평가받고 있다. 1844년 런던에서 시작된 YMCA운동은 1855년 파리에서 세계YMCA연맹(World Alliance of YMCAs)을 창립하였다. 1955년 파리에서 세계YMCA연맹 창립 100주년기념대회를 70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이 때만해도 국제연합(UN)의 회원국은 50개국 정도였다. 현재 YMCA는 126회원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유엔 다음가는 국제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YMCA가 창설된 후 소수의 국제기구들이 생겨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1920년에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이 조직되었으나 20년 정도 존속하다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45년 국제연합(The United Nations)이 조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세기부터 크고 작은 시민운동기구가 개신교를 중심으로 영국, 유럽, 미국에서 생겨났지만 흐지부지 소멸하고 말았다.
William Shipton에 의하면 1632년 런던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 건강과 도덕적 성품 함양을 위한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만나 기도회와 성서연구 등을 하면서 모임을 지속해 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698년 런던에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조직 등이 생겨나 1758년까지 40여 년 동안 버티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1729년 John Wesley는 옥스퍼드대학교 교수(Fellow)로 활약하였다. 그는 한 추종자로부터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다가 천국 가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까?”라는 도전적인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Wesley는 “혼자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함께 이 일을 성취시킬 추종자가 필요 합니다.”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 후 동생 Charles Wesley와 추종자들을 묶어 “신성회(Holy Club)”를 만들었다. 이들은 빈틈없이 주기적인 모임을 가지게 되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Methodist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신성회는 성장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감리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감리교는 믿음의 생활화를 강조하면서 교회 밖 현장을 중시하는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선봉장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스팀엔진의 발달로 교통이 크게 원활해졌다. 전신의 발명은 통신의 혁명을 이루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큰 폭으로 확대되었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1840년대의 런던은 매우 역동적인 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영제국의 수도답게 런던은 세계 중심도시로 손꼽히게 되었다. 런던은 상업중심의 도시가 되었고 세계자본이 몰려오는 복합도시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런던은 산업화 덕분에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환상의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피폐는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정신세계가 점점 메말라가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 스스로가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Hitchcock & Rogers라는 포목회사에 근무하는 젊은 청년들이었다. YMCA의 새로운 역사는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YMCA운동의 기원과 성장배경
잘 알려진 바와 같이 YMCA운동의 시작은 1844년 6월 6일 George Williams의 주도로 12인의 동지들에 의해서 창립되었다. 창립동료회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George Williams, C.W. Smith, Norton Smith, Edward Valentine, Edward Beaumont, M. Glasson, William Creese, Francies John Cracket, E. Rogers, John Harvey, John C. Symons and James Smith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감리교, 영국국교회, 장로교, 독립교회 등에서 각각 3인씩 참여하는 공평성을 보여주었다. 12인 중에는 James Smith 한사람만 J.D. Owen & Co 포목회사에 소속한 인물이었다. George Williams는 James Smith를 특별히 초청하여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들은 영적, 지적, 그리고 신체적으로 균형 잡힌 젊은이로 성장하기 위하여 성서연구와 기도회 그리고 토론회와 독서회 등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Williams의 룸메이트인 Christopher Smith는 이 단체의 이름을 “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YMCA)”로 명명하자는 제안을 하자 만장일치로 받아드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YMCA운동의 성장배경에는 George Williams의 헌신적인 열정과 신실한 신앙심이 토대가 되었다. 그는 Hitchcock 포목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는 동안 타고난 성실성과 근면성이 회사대표인 George Hitchcock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Hitchcock은 1853년 그의 딸 Helen을 Williams와 결혼 시키고 회사운영을 George Williams에게 물려주었다. Williams는 회사대표가 되면서 Hitchcock회사를 크게 발전시켰고 일약 사회적인 명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 태어난 YMCA를 부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Williams는 YMCA가 회원중심의 운동체가 될 것과 반듯이 회비를 납부해야 하며 스스로의 잘못을 회개함으로써 새사람으로 거듭날 것을 강조하였다. 대부분 초기 YMCA회원들은 집을 떠나 객지로 나와 포목상회에 고용되었던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가정과 기업의 중요성 그리고 크리스천의 정체성 함양을 위하여 기도회와 성서연구에 집착하게 되었다. 초기 회원의 범위를 포목상회에 고용된 자들에서 일반 직장인들로 점차 확대하였다. 특히 기도주간(Week of Prayer)은 YMCA의 상징적인 행사가 되었다. YMCA는 Grass-roots를 기반으로 한 조직으로 출발하였다. 기초단위의 운동체인 YMCA는 밑으로부터 위로 이어지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하였다. 많은 지역YMCA는 연합회라는 상위 조직체를 두게 되었고 전국연맹을 구성하였다. 또한 이사회와 실행이사회 그리고 임원진을 선출하여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효율성을 극대화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런던YMCA의 구조적 체제안정은 세계적인 표본이 되었다. 런던YMCA는 초창기에 3대 지주를 확고히 하였다. 즉 (1) 영적 (Spirituality), (2) 보편적 (Catholic), 그리고 (3) 선교적 (Missionary) 성장에 균형을 이루어 회원들의 품성을 잘 보듬어 나갔다. Williams는 1845년 급료를 받는 전임 실무자로 Thomas Henry Tarlton을 임명하였다. Tarlton은 YMCA의 회원 확장에 전력을 기우리면서 적절한 프로그람 개발과 집행 등 운영의 묘를 극대화하였다. Tarlton은 런던YMCA 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면서 지역YMCA 창설과 조직 확대에 심혈을 기우렸다.
런던YMCA는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여 빌딩중심의 프로그람을 개발하고 운영하였다. 회원들은 빌딩을 오가면서 예배와 기도회, 성서연구와 독서회, 그리고 강연회와 토론회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전통을 세웠다. 빌딩의 공간에는 식당과 카페를 운영하면서 친교와 모임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회원들은 회비를 납부하고 운영에 손실이 생길 때는 임원들이 나서서 기업이나 부유층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메꾸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YMCA생존에 기본적인 운영전략으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846년부터 시작한 런던YMCA의 “The Exeter Hall Lectures”는 회원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무려 20여 년간 이 강연회가 지속될 만큼 회원들과 일반인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YMCA운동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YMCA운동은 영국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1851년에는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미국의 보스턴을 포함한 북미대륙으로 확산되었다. 1855년 전후해서는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과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스리랑카와 인도 등지로 확장되었다.
Williams와 Shipton은 1855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YMCA연맹 창설을 돕는 준비모임에 적극적성을 보였다. 파리대회의 중심인물은 스위스 출신인 Jean Henry Dunant이다. 뒤낭은 1852년 11월 30일 스위스 제네바에 YMCA를 창설한 인물이다. 그리고 1855년 8월 20일~22일, 파리에서 세계YMCA연맹을 창설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William Langdon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으로 1855년 8월 9개국으로부터 99명의 젊은 대표들이 모여 세계YMCA연맹을 창설하였다. George Williams는 런던에서 시작한 YMCA가 자기 생전에 국제적인 기구로 세계연맹이 탄생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런던, 파리, 제네바, 보스턴, 몬트리올과 호주, 남아프리카, 인도와 독일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파리 대회에 참석한 인물들은 네 부류이다. (1) 지식인/intellectuals), (2) 교육자/educationists, (3) 기업인/businessmen 그리고 (4) 평신도 지도자/lay leaders로 당대의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영국에서 George Williams, T.H. Tarlton, W.E. Shipton, J.H. Gladstone; 프랑스에서 J.P. Cook, Frederic Monnier, M. Laget; 스위스에서 Max Perrot, Eugene Renevier, Edouard Barde, M. Cuenod, Henry Dunant; 홀랜드에서 E.W. Heyblom; 미국에서 Abel Stevens, Stuart; 독일에서 Durselan, F. Klein 등의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창립총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Henry Durant과 William Langdon, J.P. Cook과 그리고 George Williams의 합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창립총회는 파리기준(The Paris Basis)을 채택함으로써 YMCA의 목적문으로 설립정신을 분명하게 밝혔다. 다음은 파리기준 전문이다.
“기독교청년회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믿어 그 신앙과 생활에서 그의 제자되기를 원하는 청년들을 하나로 뭉치고 또 그 힘을 합하여 청년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seek to unite those young men who, regarding Jesus Christ as their God and Saviour according to the Holy Scripture, desire to be His disciples in their doctrine and in their life, and to associate their efforts for the extension of His Kingdom amongst young men”) (1855년 8월 22일 세계기독청년회연맹 창립총회에서 채택, 1955년 8월 파리 백년세계대회에서 확인).
1878년 세계YMCA연맹국제중앙위원회가 조직될 때 까지는 런던에서 William Edwyn Shipton이 급여를 받지 않고 세계YMCA연맹 간사로 활약하였다. 1879년 세계YMCA연맹 본부를 제네바에 두게 되면서 급여를 받는 초대 총무로 Charles Fermaud가 취임하였다. George Williams는 “당신은 모세로 선택받은 인물입니다”라는 축하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세계YMCA연맹은 운동의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기장(insignia)를 채택하였다. 요한복음서 17장 21절 “그들로 모두 하나가 되기를 (that they may all be one)” 바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기도와 평화를 상징하는 PAX라는 글자도 함께 넣었다. YMCA운동은 일치 (unity)와 형제애(brotherhood)와 에큐메니즘(ecumenism)의 균형을 이루고자 초기부터 힘을 모았다.
1891년 미국의 스프링필드대학의 Luther H. Gulick교수는 빨간 삼각형(The Red Triangle)상징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퍼트린 인물이다. YMCA는 영적(spirit), 지적(mind) 그리고 신체적(body)으로 균형 잡힌 전인적 인격을 겸비한 인물을 양성하는 빨간 삼각형 상징은 마침내 1895년 정식으로 채택되어 YMCA Badge가 되었다.
John R. Mott는 미국 학생YMCA전국연맹 총무로 활약한분인데 Richard Morse가 은퇴하게 되자 뒤를 이어 후임이 된 인물이다. 그는 런던YMCA창설 50주년기념대회 때 런던에서 열린 세계YMCA연맹국제위원회 위원으로 참석하면서 일약 명성을 얻게 되었다. George Williams가 YMCA의 전반 반세기를 지배하였다면 후반 반세기는 John R. Mott의 시대였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에서의 학생YMCA운동은 1855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동안 심령부흥운동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당대의 부흥사인 Dwight L. Moody와 Charles G. Finney는 많은 청년 학생들에게 복음을 통한 선교의 열정을 뜨겁게 불타도록 기름을 부었다. 이들은 젊은 청년과 학생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었고 선교의 현장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노스필드의 Mount Hermon에 있는 Moody’s Institute에서는 Moody와 Luther Wishard와 Richard Morse가 함께 모여 학생들로 하여금 해외선교에 전심전력하도록 간절히 기도하였다. 1886년 학생심령부흥회가 허먼 산(mount)에서 열렸다. 전국 96개 대학에서 250명이 참석한 가운데 26일 동안 집회를 하였다. 무려 100여명이 해외선교에 자원하기로 서약하는 대역사가 일어났다. 그중에는 John R. Mott, David McNaughy, John Swift, Robert Wilder와 Myron Clark등을 꼽을 수 있다.
최초의 선교사로 한국에 온 Horace Grant Underwood와 Henry Gerhard Appenzeller도 이 때 결심하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David McNaughy, John Swift와 Myron Clark는 인도, 일본, 브라질 YMCA의 총무로 파송되어 활약하였다. 1877년 루이빌에서 개최된 학생YMCA전국대회는 Mott가 젊은이들에게 복음전파에 필요성을 호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Luther Wishard를 만나 국제선교에 앞장서는 동지가 되기로 의기투합하였다. Mott는 Wishard와 함께 비서구 기독교 국가에 복음전도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SVM)”을 벌리게 되었다. 많은 참가학생들이 세계의 여러 비기독교 국가에 전도 할 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다. 특히 아시아대륙을 향한 선교적 열정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Luther Wishard는 세계학생기독교연맹(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WSCF)의 창설을 1885년 기획하였으나 10년이 지난 후 1895년 John R. Mott가 스웨덴에서 Wishard의 꿈을 이루었다. Mott는 이 기구의 총무로 취임한 후 에큐메니컬운동의 지도자로 각광을 받으면서 종횡무진 활약하게 되었다.
뒤낭은 1863년 10월 26일 제네바에서 최초로 국제적십자위원회를 개최한 인물이다. 1948년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창립자 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세계적십자와 적신월사의 날”로 제정하였다. 뒤낭은 1901년 YMCA와 적십자사운동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첫 번째 공동으로 수상한 인물이 되었다. 또한 George Williams는 1894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John R. Mott는 1946년 멕시코와 러시아의 전쟁난민 구호 캠페인특임을 Wilson대통령으로부터 부여받고 2억 달러를 모금하여 지원하였다. 이런 공헌과 YMCA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6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이 세분은 YMCA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지도자들이다.
아시아YMCA연맹
초기 아시아YMCA 설립에는 John R. Mott와 Luther Wishard의 공로가 크다. Wishard는 미국 선교사로 1888년부터 5년 가까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YMCA의 창립을 도왔다. Wishard는 1888년 12월 18일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항해하였다. 일본에 상주하면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YMCA를 소개하고 창립을 도왔다. 아시아는 불교, 힌두교, 유교,신도(神道)등 여러 종교가 뒤섞여 있는 대륙이다. Wishard는 일본에 학생YMCA를 조직하였고 1889년에는 12개의 학생YMCA 소속 회원을 모아 합동 수련회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여러 시청년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인도학생YMCA는 David McConaughy가 중심이 되어 35개 YMCA대표들을 체나이로 모아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1891년에는 인도YMCA전국연맹을 결성됨으로써 비서구권 최초로 전국조직체를 가지게 되었다. 1891년에는 세계YMCA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순차적으로 중국과 일본YMCA가 세계YMCA에 참여하게 되었다. 인도YMCA 지도자로는 V.S. Azariah가 학생YMCA 조력간사로 활약하다가 얼마 후에 첫 번째 성공회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그 밖에 K.T. Paul과 S.K. Datta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Wishard는 1889년에서 1890년 기간에 중국을 방문한 기록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는 중국 YMCA가 15개의 시청년회로 조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4개는 학생YMCA이고 3개는 새로 조직을 마친 상태였다. John R. Mott는 중국을 방문한 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이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개종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Mott는 Wishard가 YMCA를 조직하는데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고 학생기독교운동 지원에도 전심전력을 기우렸다.
1933년 필리핀의 바가오에서 아시아 최초로 YMCA지도자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자들은 아시아의 현안을 분석하고 YMCA가 해야 할 6대 과제를 다듬어 냈다. 그리고 아시아YMCA연맹 결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 후 1949년 방콕에서 제2차 아시아YMCA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고 아시아지역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아시아YMCA는 상호 친교와 협력을 바탕으로 자립해 가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지역사회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아시아YMCA연맹은 1953년 바기오에서 제3차 지역위원회를 개최하고 “영성의 강화, 지도력 훈련의 강화, 문서 활동의 강화, 상호교류의 강화, 세계적 운동성의 강화, 교육과 기술향상의 강화, 국제적 협력의 강화”를 아시아YMCA운동의 과제로 채택하였다. 중국YMCA의 걸출한 지도자인 Leung Siu Chah가 중심이 되어 1949년 아시아YMCA연맹 사무국을 홍콩에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는 1950년부터 초대 상임총무로 홍콩사무국에 부임하였다. 그동안 여러 상임총무들이 홍콩에서 근무하였다. 지금은 한국의 남부원 사무총장이 금융의 도시 홍콩에서 평화의 도시 제주로 사무국 이전을 확정하고 올해 말쯤 완전히 이전 할 목표를 세우고 있다. 아시아태평양YMCA연맹은 이수민 사무총장과 Bart Shaha 사무총장을 세계YMCA연맹 사무총장으로 배출하였다. 한국은 故 서광선 교수가 세계YMCA연맹 회장을 역임하였고 박재창 교수는 아시아태평양YMCA연맹의 회장을 지냈다. (끝)
< * 2023.8.31 YMCA 간사학교 강의를 위해 작성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