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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28.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산업교육을 담당한 YMCA 초창기 공업부 간사 그레그(George A. Gregg, 具禮九)

by yunheePathos 2018. 12. 4.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산업교육을 담당한

YMCA 초창기 공업부 간사

그레그(George A. Gregg, 具禮九)

 

그는 캐나다 사람으로서 1906년 가을에 한국에 와서 황성기독교청년회 공업 간사가 되어 1928년까지 봉직했다. 한평생 독신생활로 일관하면서 온 정력을 YMCA에 바친 그는 성품이 아주 충직하고 부지런하며 믿음이 아주 신실한 분으로서 한평생 평신도로 교회에 헌신하였다. 처음에 그는 미국에 가서, 뉴욕에 있는 어느 철도회사의 기술자가 되었다. 거기서 몇 해 동안 일하는 동안에 인정을 받아 하트포드 공업학교(Industrial Institution in Hartford)의 교장이 되었다가 다시 YMCA 국제위원회의 요청으로 산업교육부 전문 간사가 되었다.

한국에 오게 된 동기는 그가 YMCA 국제위원회 산업부 간사가 된 뒤 한국으로부터 산업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1901년부터 한국에 와서 YMCA 창설작업을 서두르던 질레트(P. L. Gillett)는 한국 YMCA의 초창기 사업으로서 서구문명과 기술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서구문명과 기술도입은 한국민족인 동시에 한국YMCA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했다.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교육부위원회는 이상재 위원장을 비롯하여 윤치호, 유성준, 이원긍, 이익채, 여병현, 홍재기, 이상필, 김규식 등 쟁쟁한 인물로 구성되었는데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소년들에게 기독교신앙을 불어 넣어주고 과학과 기술을 가르쳐 주는 길 밖에 없다는 확신 밑에서, 처음에는 윤치호를 교육부 학감으로 초빙했다. 이것은 교육부위원회가 한국인만으로 조직되고, 외국인 간사(P. L. Gillett)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교육사업을 하고자 원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윤치호가 교육부 학감 취임을 거절하고 단독으로 개성에다 한영서원(韓英書院, 松都高普의 전신)을 창립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레그를 불러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의 청년회학관 학제를 보면, 2년제 보통과, 1년제와 2년제 일본어 특별과, 123년제 영어특별과, 6개월부터 3년제의 직업과 등이었는데 그 중 직업교육은 한국 근대사상 특기할 교육인 동시에 가장 역점을 두었던 교육이었다. 직업과의 최초의 과목은 염색, 비누와 양초 만들기, 가죽 이기기, 용기에다 그림 그리기, 도자기 굽기, 목공, 철공, 화공, 생리학, 부기, 산수 등이었다.

이상과 같은 산업교육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가장 긴급한 교육이었지만 일반 한국인 지도자들은 착안을 못했고, 또한 그 당시 조선통감부는 의식적으로 그러한 교육은 묵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토오(伊藤博文) 통감은 한국의 한정 개혁이란 보고서에서 한국은 일찌기 천 짜기, 도자기 만들기, 주물업 등이 발달된 나라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기술을 일본이 적지 않게 배워 왔다. 그러나 중세기에 이르러 한국인들은 앞치락 뒤치락 정치파동을 겪는 동안 오늘날에 와서는 그 사업이 부진상태에 있다고 지적을 하면서 YMCA의 산업교육을 감시의 눈으로 보아왔던 것이다.

그레그는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약 1천 평 대지(현 서울Y 대지)에다 현대식 3층 건물을 건축할 때에는 손수 벽돌을 물에다 넣어서 선별하여 건축공사를 감독했으며, 1916년 한국 최초의 실내 체육관을 지을 때에는 청년회학관 공업부 학생들을 데리고 직접 공사를 했다. 그리고 1911년부터 13년 사이에 105인 사건과 유신회 사건 등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여 심각한 운영난에 빠졌을 때에는 공업부 학생들과 함께 외부로부터 가구수선, 기계수리, 전기공사 등을 청부맡아 돈을 벌어들임으로써 경제난을 극복했다.

그를 통하여 많은 기술자가 배출되었다. 따라서 그는 사진기술자로서 공업부 안에다 사진부를 두고 교육함으로써 한국 활동사진운동에도 큰 구실을 했다. 또한 그는 첼로 명수로서 쉬는 시간에는 혼자 음악을 즐겼고, 김영환, 홍난파 등 현대음악가들을 많이 길러냈다.

그는 1928년까지 열심히 봉직하다가 건강을 잃고 한국을 떠났다.

등걸

-1980.7.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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