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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44. 재일본 한국Y 4대총무 이기윤(李基潤) 선생

by yunheePathos 2018. 12. 4.

재일본 한국Y 4대총무

이기윤(李基潤) 선생



-YMCA활동과 함께 성북고교 설립 등 교육사업에 헌신

 

재일본 한국YMCA의 제 4대 총무를 지낸 바 있는 이기윤(李基潤) 선생의 약력을 찾아내기 위해 무척 고심을 하던 차에 문득 김희선(金熙善) 선생을 우연히 어느 모임에서 만나, 그의 도움으로 이 글을 쓰게 됐다.

이기윤 선생은 1879년 함경남도 단천(端川)군 단천읍 태생이다. 단천은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예를 들면 한국 현대사에 혜성과 같이 나타났던 이동휘(李東輝) 선생, 북한의 괴뢰 김일성이 아닌 진짜 김일성(金一成) , 건국대학의 창설자인 고 유석창(劉錫昶) 선생, 세종대학의 창설자이며 이사장인 주영하(朱永夏) 박사, 일본 동경교회의 목사이며 전 재일본 한국Y의 이사장이던 오윤태(吳允台) 목사, 반공산주의 이론가이며 재일본한국YMCA의 부총무이던 김준성(金俊星) 목사 등도 들 수 있다.

단천읍에서 북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 예동(禮洞)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본래 호예(胡禮)마을이었다. 호예란 여진어에서 나온 지명이라 하는데 그 동네는 황해도 소래松川나 원산의 명사십리처럼 여름철이 되면 선교사들이 피서와 휴양을 즐기던 명승지이다. 이 마을은 한국 교회사의 유명한 전도자 김계안(金桂顔) 장로, 여류소설가 최정희(崔貞熙) 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처럼 단천읍과 그 주변에서는 기독교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 중 재일본 한국YMCA의 총무, 부총무, 이사장도 배출됐는데, 아마 단천 사람들은 빨리 예수를 믿고 깨어서 일본 유학도 많이 갔던 모양이다.

이기윤 선생은 17세가 되던 1905년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27세 되는 1915년부터는 단천읍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이 교회는 1899년 관북지방의 성자의 칭호를 받던 차을경(車乙慶) 장로의 전도로 교회가 설립됐다.

초대 교인 중에 김병수(金炳洙)란 분은 단천읍 교회를 개척한 장로이며 공로자이다. 그는 독실한 신앙가인 동시에 교육가, 실업가, 농촌계몽가, 독립투사를 겸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위에서 열거한 지도자들이 전부 그의 문하생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동휘 선생은 그의 친구로서,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있다가 1907년 군대 해산 직후에 김병수 장로의 감화로 교회 전도사가 됐는데, 그의 손자가 이기윤 선생에 관해 알려준 김희선 씨이기도 하다.

이기윤 선생은 1905, 예수를 믿기 시작한 때부터 김병수 장로가 세운 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상업에 종사했다.젊은이들은 많이 배우고 산업을 일으켜라. 그래야만 나라가 독립이 된다는 김병수 장로의 가르침을 듣고 큰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천읍과 성진항에서 장사를 했는데 콩, 석유 등 이익이 있다면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장사에 손을 대어 큰 밑천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경유학을 꿈꾸게 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됐다. 동경에 도착하자 그는 세이소꾸(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편이었으므로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신문팔이 등 고학을 했지만 그는 벌어놓은 돈이 많았기 때문에 부인과 가족까지 데려다가 살림을 하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9239월에 동경 대진재가 났을 때에는 귀국하여 동경에 없었기 때문에 화를 모면할 수가 있었으며, 전택보, 강봉우(姜鳳羽) 등은 그의 집 이층에서 자취하며 사는 등, 한국 유학생치고 작게라도 그의 신세를 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1925년에는 동경 법정(法政)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30년에 동 영문학부를 졸업했는데, 당시 재일본 한국YMCA의 총무로 있던 최승만(崔承萬) 씨가 동경 대진재 때에 소실된 Y회관을 새로 짓고 1929년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자, 그 후임 총무가 됐다. 이때 그의 나이는 41세였으나 아직 법정대학 재학생이었다. 그러나 새로 지은 Y 회관의 관리자로서는 당시에 최적임자였다.

1930년 그는 1년 간의 총무직과 5년 간의 법정대학 공부를 마치고 1931년에 금의환향의 영광을 갖게 됐다. 귀국하자 그는 서울 종로 수은동(授恩洞)에다 경성외국어학원을 설립하고 그 원장이 됐다. 이것이 곧 8.15해방 후 오늘날의 성북 중고등학교로 발전이 됐다.

이처럼 그가 귀국하자 외국어학원을 설립한 것은 그가 동경 유학시절에 세이소꾸 영어학교에서의 토대로 인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고향의 김병수 장로에게서 받은 교육입국 정신에 따라 성북 중고등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일경에게 검거되어 신흥우, 구자옥 등 YMCA 지도자들과 함께 10개월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말기에는 고향인 단천에서 지내면서 8.15해방을 맞았고 다시 상경하여 학교 설립에 헌신하여 교육사업을 계속 폈다. 그는 194665일 서울 성북동150번지 자택에서 58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등걸

-1982.3.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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