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48. 3.1독립운동 민족대표 양전백(梁甸伯) 목사

by yunheePathos 2018. 12. 4.

3.1독립운동 민족대표

양전백(梁甸伯) 목사


-학생Y 운동의 개척자로 지도력 발휘

 

한국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로 손꼽히는 분이며 3.1독립운동의 33인 민족 대표이신 고() 양전백(梁甸伯) 목사. 1869년에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태어난 그는 타고난 학자의 기질과 재능으로 한학을 수학한 후 곧바로 마을 서당의 훈장이 되었다.

때마침 만주에서 예수를 믿고 돌아온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등 초대교인들은 의주를 중심으로 철산, 구성, 선천의 각 군인(君人)들에게 만주로부터 들여온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게 되었다. 이때 소년 양전백은 처음으로 기독교 서적을 보게 되었고, 구성 사람 김이련(金利鍊)과 김관근(金灌根) 부자(父子)의 전도로 26세가 되던 해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때마침 청일전쟁으로 학당건물이 파괴되었으므로 양전백은 자기 집을 교회당 겸 학당으로 제공하였는데, 이것이 곧 구성군 신신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1897년에 선천에 와서 살면서 선교를 시작한 윗테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와 함께 선천교회를 창설하여 초대 지사가 되었고 1902년 겨울에는 초대 장로가 되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는 졸업과 동시에 선천읍 교회의 목사로서 선천을 비롯해서 구성, 철산 등지에 전도활동을 폈다.

또한 1906년에는 김석창(金錫昌), 노정관(魯晶權) 등과 함께 신성(信聖)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교육에 주력했다.

철저한 민족교육과 기독교 교육으로써 신성학교는 일제의 주목을 받아, 1911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즉 조선 제 1대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1910115일에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 신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는 흉계로 일제탄압이 가해지게 되었는데, 양전백 목사는 윤치호,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체포되어 5년형의 언도를 받고 3년 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제의 날조사건으로서 양전백 목사는 신성학교 학생YMCA 창설자이고 학생Y 하령회의 주임강사였기 때문에 주모자로 돌리게 되었다. 1910년과 1911년 여름, 두 차례에 걸친 학생Y 하령회를 통해 양목사는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부회장이던 윤치호 씨를 비롯해서 이상재, 이승만, 에디(G. S. Eddy), 화이트(G. C. White), 와이어(H. H. Wire), 브록크만(F. M. Brockman), 질레트(P. L. Gillett) 등과 함께 학생Y 회원들을 지도하였는데, 이것이 일제에게는 눈의 가시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제는 1910년부터 국내의 모든 민간단체를 해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YMCA만이 끝까지 살아남아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최후의 탄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흔히 105인 사건이라고 하면 사북지방의 기독교 세력과 안창호(安昌浩) 등의 신민회(新民會) 지하조직을 뿌리뽑기 위해 날조된 탄압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YMCA 총무이던 질레트 씨는 이것을 완전히 YMCA 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음모라고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다.

작년도(1911)에 있은 두 차례의 학생Y 하령회에서는 대회장이던 존경하는 윤치호 선생으로부터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으나 양전백 목사의 학생대표이던 양준명(梁濬明)씨 등은 총독살해 음모자라는 혐의로 체포당했다.

일본경찰은 이 하령회가 총독살해 음모를 위해 조직되었다고 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한 증인을 내세우기도 했다고 국제선교협의회(I. M. C.)의 의장이며 에딘바라 계속위원회(Edinburgh Continuation Committee) 위원장이던 모트(J. R. Mott) 박사에게 보고했다.

이처럼 양전백 목사는 목회자뿐 아니라 학생Y 운동의 개척자였으며 항일투사이었기 때문에 3년 간 옥고를 치루게 되었고 출감해서도 계속 학생Y 운동에 지도력을 발휘했다.

19193.1독립운동 때에는 33인 민족대표로 헌신하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고, 2년 만에 석방되어 교회목회와 선천YMCA 육성에 힘쓰다가 65세를 일기로 1933년에 선천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양 목사는 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정신과 이 세상에 나긴 공로는 많은 이의 교훈으로 남아,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복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등걸

-1982.8.1 청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