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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없는 세상

2023 제11차 핵그련 총회 개회예배 말씀 -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장윤재 목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by yunheePathos 2023. 6. 15.
핵그련 총회 개회예배 말씀 (2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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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그련 총회 개회예배 말씀 (2023.6.13.)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 누가복음 22:40 -

 

장윤재 목사(이화여대대 기독교학과 교수)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이 아니라 ‘유혹’이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점을 주목해주십시오.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은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둘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4:1-10)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1절, 이하 공동번역)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예수께서 굶주리신지라, “유혹하는 자(the temper, NRSV)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3절) 광야는 모래로 된 황무지가 아닙니다. 떡 덩어리와 같은 작은 석회석 조각으로 뒤덮여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면 흉년으로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을 풍성하게 먹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나쁜 짓을 하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신명기 8:3] 하지 않았느냐?”(4절) 라고 말씀하시며 거절하셨습니다. 악마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진 능력을 사용하도록 유혹했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두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의 성전 꼭대기에서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시편 91:11] 하지 않았소?”(6절)였습니다. 유혹하는 자는 지금 교묘하게 성서를 인용합니다. 우리보다 성경을 더 잘 압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능력을 발휘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라. 그러면 당신의 뜻을 이루는 데 훨씬 쉽지 않겠는가!’ 이것이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마귀의 방법을 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기 6:16]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7절)라고 성서를 인용하시며 악마의 제안을 거절하십니다.
 
벌써 두 번이나 좌절한 유혹자(the tempter)는 이제 본색을 드러냅니다.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9절)라고 유혹합니다. 어떤 유혹이었습니까? ‘인간들은 다 내 수중에 있다. 그러니 나와 흥정하자. 나와 조금만 타협하자. 너처럼 그렇게 높은 데 기준을 두면 안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대를 따를 것이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메시아적 통치를 사탄의 주권 아래 굴복시켰다면 그 나라는 악과의 싸움 없이, 아무 반대 없이, 그래서 십자가 없이도 이룰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한 ‘노’(No)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기 6:13] 하시지 않았느냐?”(10절)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했습니다.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살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유혹’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 개의 서로 다른 유혹이 있었다기보다 단 한 가지 유혹이 세 개의 서로 다른 변형으로 다가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혹하는 자는 처음부터 오직 한 가지 유혹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태초 때부터 악마는 ‘권력을 차지하라’라고 유혹해왔습니다. 뱀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꼬드길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창세기 3:5)이라고 유혹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유혹의 핵심은 ‘신처럼 되어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계속해서 전제한 것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3절, 6절)입니다. 더 좋은 번역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능(power)을 가지고 있으니 그 힘을 사용해서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도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광야에서 이렇게 예수님을 유혹한 그 자는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에도 똑같은 유혹을 던집니다. 예수님이 온갖 멸시와 조롱 속에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며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 ‘네가 진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힘을 보여주라. 그러면 믿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유혹하는 자는 세상 맨 처음부터 맨 끝까지 계속해서 똑같은 제안을 속삭입니다. 고장난 축음기와 같이 똑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국가가, 민족이 이 악마의 속삭임에 솔깃합니다.
 
시험(test)이 외적인 것이라면, 유혹(temptation)은 내적인 것입니다. 유혹자의 공격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유혹하는 자는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욕망을 통해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야고보서(1:2-15)는 “내 형제[자매]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절) 말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이어갑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앞에서는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또 시험을 견디어 낸 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거라고 하더니, 뒤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험이라 번역된 그리스(헬라)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를 유혹으로 다시 번역하면 이해가 됩니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보서 1:2, 12-15, 공동번역)
 
인간 안의 욕심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야고보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유혹은 유혹당하는 사람이 그 유혹에 ‘동의할 때’ 그것이 잉태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유혹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유혹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죄악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려는 사람입니다.
 
어느 미국 원주민 추장이 자녀들을 모아놓고 이런 가르침을 주었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단다. 두 마음은 서로 절대 지지 않으려고 싸워서 마치 늑대와도 같지. 한 마리는 악한 늑대란다. 미움, 분노, 살인을 부추기지. 다른 하나는 선한 늑대란다. 용서, 사랑, 화해를 하게 하지.’ 그러자 한 자녀가 물었습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 추장은 엄숙한 눈빛으로 이렇게 또박또박 힘주어 답했습니다. ‘그건 네가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달렸지.’
 
이사야는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이사야 47:10)라고 질타합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역경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성공과 번영을 잘 견뎌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토머스 칼라일)라고 했습니다. 실패보다 성공이 더 위험합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최악(the worst)이 인간의 최선(the best)에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자유, 그 안에 어둠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유혹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옵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강한 곳 바로 그곳을 항상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위기는 문명의 실패가 아닌 성공에서 비롯된 것이다”(조천호, 전국립기상원장)라는 말을 유념해 들어야 합니다.
 
북극 빙하가 녹고, 북극곰이 굶주려 죽고, 북극보다 더 추워야 하는 남극의 기온이 영상 20도까지 치솟는, 그래서 눈밭에 굴러야 할 펭귄이 진흙 밭에 뒹구는 오늘의 위기는 인간이 ‘못해서’가 아닙니다. ‘잘해서’입니다. 인간의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산업문명을 일으키면서였습니다. 기후위기는 인간 문명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성공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실패보다 우리의 성공을 더 잘 성찰해야 합니다.
 
이는 ‘핵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은 인간이 이룬 과학기술 문명의 금자탑(金字塔, 피라미드)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을 신의 반열에 들어가게 한 힘(power)이 핵입니다. 방사능으로 뜨겁게 타오르던 지구가 식은 지 20억 년이 지나, 인간은 1942년에 미국 시카고대학 한구석에 최초로 ‘인공’ 원자로를 설치했습니다. 거기서 사상 처음으로 핵분열에 따른 연쇄반응 실험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렇게 얻은 핵에너지로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폭탄’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의 ‘죽음의 여행’이라는 뜻의 한 사막지대에서 사상 첫 핵폭탄 실험이 이루어졌습니다. 상공 9km까지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그것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으며, 장엄하고, 두려웠다”라고 한 장성은 회고했습니다. 멀찍이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이제 나는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진 후, 그 가공할만한 파괴력에 대한 죄의식까지 한 몫 하면서,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이른바 “핵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이라는 구호를 표방합니다. 이를 계기로 ‘폭탄용’ 원자로는 ‘상업용’ 원자로로 둔갑합니다. 이후 핵무기는 군사용이고 핵발전은 평화용이라는 거짓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원자력은 처음부터 군사적 이용, 즉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간 나오토 전 일본총리의 말대로 후쿠시마 사고로 일본 열도(列島)의 절반이 날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의 정치인과 관료 그리고 재계는 어떻게든 핵발전 산업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핵발전에서 핵무기의 원료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핵발전은 핵무기에 대한 유혹 위에 서 있습니다. 따라서 핵무기가 문제라면 핵발전 역시 문제여야 합니다. 핵발전과 핵무기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핵에너지가 저탄소 청정에너지이며 기후변화의 대안이라는 신화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발전부문에 국한해서 핵발전이 CO2 발생량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핵발전의 전 과정에서, 특히 우라늄의 채굴과 가공 그리고 농축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온실가스가 발생합니다. 핵발전은 기후붕괴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이 아닙니다. 더구나 인류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수많은 핵발전소를 마구 지어왔습니다. 고준위폐기물인 사용 후 핵연료는 최소 1만 년 이상 안전하게 격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단군 이래 이 나라의 역사는 아직 5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평생을 살아도 1백 살을 못 사는 우리에게 1만 년이란 ‘영원의 시간’에 가깝습니다. 영원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영원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현재 한국의 핵발전소 수조에는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엄청난 폐연료봉이 ‘임시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매년 수백 톤씩 쏟아져 나오는 핵폐기물 문제는 지금 국가적 비상사태를 맞이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엄청난 핵폐기물을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있지만, 결국은 그 폐기물을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떠넘기고야 말 것입니다. 이렇게 대대손손 생명과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범죄행위입니다.
 
핵발전이 안전하다는 거짓 신화도 만들어졌습니다. 핵발전 사고는 매일 일어날 수 있고, 또 실제로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핵발전은 ‘실수 없는 인간’을 요구하지만 그런 인간은 세상에 없습니다. 고리 핵발전소 30km 안에 있는 주민은 300만 명이 넘고, 월성의 경우는 100만 명이 넘으며, 영광은 10만 명, 그리고 울진은 7만 명이 넘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엄청난 인구가 핵발전소 주변에 몰려있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는 ‘거짓 풍요’입니다. 이계삼 선생은 우리가 핵발전을 유지하면서 누리고자 하는 생활양식이라는 데 무엇인지 그 실상을 이렇게 날카롭게 지적한 적 있습니다. “새벽 세 시, 네 시가 될 때까지 미친 듯 깜빡이는 술집들의 네온사인, 밤을 모르는 환한 밤거리, 열두 시, 한시까지 꺼질 줄 모르는 심야학원의 불빛,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방방곡곡 온 학교에 밤늦은 시간까지 쉭쉭 돌아가는 냉방기와 난방기들... 그저 밤에는 불 끄고 잠자리에 들면 될 것을.” 결국 ‘탈핵’은 내 삶의 욕망과 너무도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저 밖’의 위험을 멈추려면 ‘내 안’의 욕망도 멈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핵에 대한 물음은 우리 자신에 대한 물음이고 우리 문명에 대한 물음입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이룬 최대의 성공에 대한 근본적인 물입니다. 우리는 실패보다 성공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태 6:13, 누가 11:4) 더 좋은 번역은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대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한 영어 성경도 이렇게 번역합니다.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KJV)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고통의 잔을 받지 않을 수 없느냐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누가 22:44)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을 향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누가 22:40, 개역개정)라고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유혹에 빠지는 것은 유혹에 동조하는 욕심이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유혹당하는 사람이 그 유혹에 ‘동의할 때’ 잉태됩니다.
 
핵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문제입니다. 핵 위기는 생태의 위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위기입니다. 사실 21세기를 사는 크리스천들이 가장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인간’이라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한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과의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고 지구 ‘위’에 그리고 생명의 그물망 ‘밖’에 군림하려 드는 ‘전능하신(?) 인간님’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수많은 생물 종 가운데 하나이면서 너무나 큰 지구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잊고 자기 혼자 암세포처럼 무한 증식하면서 다른 모든 존재의 삶의 자리를 부수는 것이 지금 이 모든 위기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광활한 우주 안에서 그리고 그 우주의 “창백하고 푸른 한 점”(pale blue dot)에 불과한 지구 안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과 서로 의지해 사는 온 생명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스스로 지구와 우주의 지배자가 된 줄로 착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지금의 위기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벌이는 탈핵생명운동은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와 인간 문명 전체를 통찰하고 회개하는 영적 각성운동입니다. 그것은 핵을 가지고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된 인간을 다시 겸손한 그리고 신실한 동산의 청지기로 돌려세우는 신앙운동입니다.
 
광야에서 예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셨습니다. 비록 그분은 돌들로 떡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지만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권세를 거부하셨지만,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높은 성전 위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그를 떠받치는 장관(spectacle)의 연출을 거부하셨으나 갈보리 산 높은 십자가 위에 달려서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기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셨습니다. 다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성서가 분명히 증언합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히브리서 2:18)
 
그러므로 코로나 이후 다시 모인 여러분,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에 유혹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실 겁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가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실 겁니다. 우리의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여러분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정의가, 가는 길목마다 평화가, 서는 곳마다 생명이, 그래서 앉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기도합니다.

https://han.gl/vCvgFA

핵없는 세상을 위한 한국그리스도인연대 2023년, 제 11차 총회 관련자료


https://youtu.be/i6ztW6MHA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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