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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끄적거림/원고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한 재일교포 평화운동가, 최승구의 고백 "버려진 돌"

by yunheePathos 2012. 7. 12.

이 글은 지난 6월 5일부터 있었던 일본 핵문제 학습투어 호스트였던 최승구 선생님(원전체제를 따지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CNFE) 대표)이 일본기독교단 한일교회에서 강연하신 원고입니다.

재일교포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갖는 삶의 무거움과 갈등에 대해, 그리고 핵 발전과 한국과 일본사회에 대한 생각을 짧지만 잘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최승구 선생님과 글에 나오는 히타치 투쟁의 장본인이었던 박종석선생님, 그리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분들이면 무조건 대접해야 한다며 밤마다 찾아와 술한잔 대접과 대화에 여념이 없었던 권용부 선생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기억이고 일정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만 갖고 있던 재일교포 사회와 한국 시민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그 분들의 삶을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민주화 투쟁과정의 선배들과 동북아시아 평화운동의 축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구상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단편적이나마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생각을 나누기에 충분한 글이라 생각하여 나눕니다.
 

최승구 선생의 글 중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앞으로 도래해야 하며, 존재해야 할 사회를 소망하는 것에 자기자신을 걸고 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일본인도 아니고, 본국의 한국인과도 다른, 그러나 차별에 대해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를 느끼는 차원에서 살아온 우리들이기 때문에, 미래의 희망, 전망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제게 무슨 힘이 있어서 지금과 같은 길을 계속 걸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 길은 결코 제가 원해서 개척한 길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인도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주께서 인도해주시고, 모두가 걸어야만 하는 길입니다. 

 

 

...

‘핵과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 한국에서 시작된 이 말의 의미를 여러분과 음미하고 싶습니다.  "

 

- 좋은 글을 나눌 수 있도록 한국YWCA연합회 최수산나님이 번역으로 수고해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아래에 최승구 선생님의 메시지 원문 전문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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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독교단 한일교회의 메시지

2012년 7월8일

 

<버려진 돌>

 

최승구 (일본동맹교단 초대교회회원)

 

마가복음 12:10-11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나 하시니라

 

 

1. 인사

이렇게 증거할 수 있는 자리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선생님과 김현구목사님과는 이럭저럭 40여 년 지기가 됩니다. 신선생님은 제 장모님과 처를 그 이전부터 가와사키 교회에서 함께 해온 더 오랜 친분관계입니다. 늘 기도 중에 저희 가족을 기억해주시고, 제 활동도 심적으로 지지하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금요일부터 오사카에 용건이 있어서, 일요일 예배는 한일교회에 출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단, 사전에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취지로 이메일을 보내드렸는데, 예배에서 간증을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완전한 원고를 준비해달라는 것이었죠. 조용히 왔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라 간증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2. 버려진 돌

 

마가복음의 이 부분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법률학자들과 다양한 문답을 하고, 그들의 완고함을 비판하는 이야기입니다. ‘포도원 수확을 받으려고 농장 지주가 종을 보내지만, 그들은 차례차례 농민들에게 죽임당하고 최후는 지주의 아들을 보냈으나 그도 살해당한다’는 유명한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 후에, 예수가 시편 118편을 인용하는 설정입니다. 이 시편은 기원전 7세기,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의 백성’이 되어 바빌론에 끌려갔다가, 이후 페르시아 왕 시절 고향에 돌아가 신전을 만든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0절의 ‘집을 지으려는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바빌론이라는 당시 세계 대국의 사람으로 집을 짓는 전문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불필요하다고 여기며 사용하지 않고 버린 돌이라는 것은, 포로된 백성으로서 이국 생활을 강요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인 것이며, 그것이 더 나아가서는 법률학자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예수 자신을 은유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영화를 꾀한 대국의 건축가들로부터 불필요한 것으로 버려진 돌이지만,- 실은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 사용하는 머릿돌인지, 혹은 아치형의 맨 위에 끼워넣는 돌인지에 대한 논쟁은 알고 있지만,- 어찌되었든간에 그 버려진 돌이 건물의 기초가 되는 무엇보다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이죠. 이 ‘머릿돌’이라는 것은 Corner Stone이라든가 Key Stone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3. ‘ 재일교포’로서의 자각 (히다치 투쟁을 계기로 하여)

 

저는 이 ‘버려진 돌’이라는 부분에서 늘 우리들 ’재일교포’가 생각납니다. 일본의 조선침략 역사에서 강제인지 스스로 일본행을 택했는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재일교포’라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고향에서의 생활은 가망이 없어진, 이국에 건너오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으로, 11세 때 홀홀단신으로 일본에 건너오셨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지 20년 가까이 됩니다. 저는 소하 20년인 1945년 종전의 해에 태어난 재일교포 2세입니다. 저는 난바에서 자라서, 에비스바시토오리 입구에 있는 정화(세이카)소학교, 신사이바시의 다이마루이가 있는 御堂筋의 반대측, 지금의 미국 마을이 있는 곳의 남중학교, 그리고 이 교회 바로 뒤에 있는 다카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대학은 동경국제그리스도교대학(ICU)에 가게 되었지만, 그때까지 저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제 자신의 역사와 언어도 하나 알지 못하며, 완전히 일본인과 똑같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인과 완전히 똑같이’라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은, 언제나 ‘가시’(고리도후서12:7)처럼 제 마음에 꽂혀있었습니다. 재일교포는 일본인이 아니며 또한 한국인과도 다른 어딘가 어중간하고, 역사의 중심에는 없으며 역사의 한 구석에서 잊혀지고 ‘버려진’, 자기주장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로서, 가능한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는 것이 좋다고 의식해왔습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재일한국교회 청년수양회에 참석하고, 처음으로 같은 재일교포로, 더구나 크리스챤이 200명이나 모이는 자리에 참가했습니다. 최승구라고 불려도 누구 얘기인지 다가오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저는 고 이인하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가와사키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사랑을 받고,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것이 결혼으로 맺어지게 된 셈이죠.

 

대학 4학년 때입니다. 어느 날, 아사히신문에 크게 ‘나는 박일까 아라이일까’라는 제목으로, 18세의 재일교포가 일본이름과 일본의 주소를 사용해 히다치 입사시험에 합격했지만, 그것이 ‘거짓’으로 발각되고 해고되어, 재판 소송을 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저는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바로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히다치 취직차별재판투쟁’(히다치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히다치 투쟁으로, 일본 회사의 차별과 동화를 강요하는 구조를 법정에서 정면으로 파헤치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차별로부터 도망해왔던 자기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건 것이었습니다.

 

당시, 재일교포 조직으로부터는, ‘일본이름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본적지까지 위조하는 것은 민족적 주체성이 없다, 한국에는 민주화 투쟁이나 통일운동, 민족의 대의를 요구하는 운동도 있다, 어떻게 민족의식 없이 이런 일로 재판을 하는 것일까’ 라는 이유로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게이오 대학 학생 5-6명과 재판투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차별사회인 일본사회 가운데 살아간다고 주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화론자’로 취급되어 재일한국교회청년회의 책임자를 내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히다치 투쟁을 통해, 제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정면으로 내세우며, 제가 비하하려 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역사를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민족차별과 투쟁하며 살아가기로 결의하는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제가 주장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생각하는 소박한 민족의식이나, 자신이 속한 국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민으로서의 민족의식이라고 하는,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튼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할만한 피해자 의식으로서의 민족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조선인임을 숨겨온 것에 대한 후회, 왜곡된 의식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차별과의 싸움, 해방을 추구하는 행보의 결의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의는 어딘가 비장한 것이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에서 돌변하는 어딘가 험악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일본인사회의 문제를 지적․고발해도, 그들의 도전을 함께 지고 새로운 사회로 함께 나가려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한국에 대해서는 어딘가 모르게 그쪽은 ‘본가’, ‘진짜’ 라는 의식이 사라지지 않으며, 그들과 과제를 공유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보다는 같은 민족인 그들의 민주화투쟁을 외부에서 지원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다치투쟁이 크게 확산되면서, 일본 각지에 지원 체제가 생겼습니다. 뉴욕, 서울에서 히다치 제품 불매 운동이 있었고, 한국 민주화 투쟁 학생들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판 판결은 히다치 민족차별을 인정하는 완전 승리였습니다. 그는 히다치에 입사해서, 40년간 무사히 근무했고, 작년 11월에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40년간 그가 회사 안에서 평온하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입사한 히다치는, 노사일체가 되어 높은 생산성과 고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박군은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 회사의 체질이 차별을 낳은 것이라고 이해하며, 혼자서 ‘제1의 히다치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즉, 회사나 조합에 대해 ‘열린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사내에서 계속해서 주장해왔습니다.

 

최근에 촉탁직으로 히다치에 남은 박군은, 주주총회에서 원전 수출로 막대한 이익을 올리겠다는 경영방침을 발표한 경영진(회장과 사장)에게, 3.11 원전 사고에 의한 피해자 주민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항의했습니다. 히다치제작소는 원전사업을 철수하고, 대체자연에너지 연구 개발에 예산을 이동할 것, 원전 수출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무래도 촉탁 한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물론, 회사도 조합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의 이러한 항의문은 히다치의 회사방침에 반영되는 날이 올 지도 모릅니다.

 

4. 가와사키의 지역생활에 몰두하기

 

저는 히다치 투쟁이 한창일 때 결혼을 해서 서울에 어학연수를 가고 그대로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마침 박정희 정권의 독재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교회 관계자들과 도중에 귀국해서 재일한국인문제연구소(RAIK)의 초대 주사로서 일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히다치투쟁과 지역활동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주사를 받아들였고, 지역활동에 몰두했습니다. 우리는 가와사키의 땅에서, 재일교포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온 자신들과 같은 아이들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민족차별과 싸우는 요새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가와사키교회가 설립한 보육원을 중심으로, 고 이인하목사님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많은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지역활동을 시작으로 하여, 자신들의 발밑에서부터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호소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다문화공생’을 주장하는 가와사키 만남의 회관으로 이어져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차별이라는 것이 생활의 실태임을 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본명과 민족 문화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학교 공부도 가르치며, 지역의 어머니들과도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방자치제의 국적의 벽을 깨는 국적조항 철폐에도 성공했습니다. 그 당시 제 의식에는 이미 민족 권리의 획득이라는 것으로부터 가난한 가와사키 남부지역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저는 주사를 그만두며, 장인어른이 하셨던 스크랩회사를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직업을 전전하면서 가족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가족과 일체가 되어 제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왔습니다.

 

가와사키시는 전국적으로 외국인 시책에서 가장 앞서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령 도시로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외국인을 지방공무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른바 ‘문호개방’을 한 가와사키시가, ‘당연한 법리’로 여기며 채용한 외국 국적 공무원의 승진을 인정하지 않고, 시민에게 명령을 내릴 직무로부터 제외시키는 차별제도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호개방’을 위해 행정부와 운동측은 함께 이러한 제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박종석씨를 비롯한 분들과 함께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용서하지 않는 가와사키연락회의’를 만들고, 10년 이상에 걸쳐 가와사키시의 차별제도 철폐를 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종적으로, 시장을 바꾸지 않으면 이것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당시 아베시장의 3선을 저지하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외국인이 이러한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많은 일본인들 사이에 망설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정당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이 중심이 되어 지역사회를 만들자는 것으로 ‘새로운 가와사키를 만드는 시민의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우리는 공업도시 가와사키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임해부의 미래는, 거기에 사는 모든 시민이 국적을 불문하고 행정부와 대화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계속해서 연구해 왔습니다.

 

현재 우리는 5만 명이 모인 메이지공원의 데모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함께 ‘탈원전 가와사키 시민’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3.11과 같은 규모의 지진,해일이 가와사키에 온 경우, 공업지대 탱크에서 흘러나오는 석유가 제방을 넘어 역전까지 넘쳐, 화재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경고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3.11 원전사고에 의해 가와사키에서 방사능오염이 진행되고, 일반 쓰레기나 하수도 오니를 소각한 재를 버릴 수도 없어 임해부에 쌓이게 되는 비상사태임을 행정부와 주민에게 호소하며 해결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5. ‘3. 11’과 만남

 

이 3.11 동북대지진은 지진과 해일이라는 자연재해와, 원전사고라는 인재가 겹친 것입니다. 여기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재해는 민족도 국적도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죽이고 상처 입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의 자원활동가로서 여러 번 센다이에 가서 피해 지역 실태를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봉사하는 크리스챤의 헌신적인 활동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피해자에게는 관심 갖고 있어도 원전사고에 대해서는, 전력회사에도 교인이 있다든가 그것은 정치적인 사항이라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원전에 관한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인터넷에서 조사하는 가운데, 안전하다고 여겨진 원전의 치명적인 결함, 문제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용 후 핵연료의 후처리가 불가하며, 최종적으로는 몇만년까지도 지하에 매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인류가 손을 뻗어서는 안되는 영역인 것입니다. 원자력발전은 중국에서 핵발전이라고 정확히 말해진다고 합니다. 일본에 사는 사람들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선언에 속아, 원전의 안전신화를 믿어왔습니다. 재일교포인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는 ‘핵’과 ‘원자력’을 구별하여 쓰고, ‘원자력’은 평화적 이용, 즉 전기에너지로서 필수불가결하다는 정책채택해왔습니다. 이 원전체제라는 것은, 전후 일본사회의 경제부흥의 기둥이며, 미일안전보장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원전사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쟁책임을 고백한 후에, 그러고나서 일본의 전후책임으로 돌려야 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후책임에 대해서는, 재일교포는 외부로부터 일본사회를 따져야 하는 제삼자의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도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우리 ‘재일교포’들은 전후 일관되게 차별받아온 존재이면서도, 원전체제에 대해서는 적어도 묵인해온 책임은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도 원전 대국을 향해, 해외에 원전을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한국은 현재 21기의 원전을 보유하고 지금도 세계 최고 원전밀집국이지만, 배가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아랍에 원전수출을 성공한 날을 국가에서 경축한 바 있습니다. 향후 20년간, 세계 원전건설의 20%를 획득하겠다고 공언하는 원전대국이 되었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 요구의 민주화투쟁을 경험한 한국이 어떻게 원전대국의 길을 걷고 있는지요. 한국도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국민 통합을 도모하고 더욱 공업화에 의한 경제 발전에 매진하는 국민국가에 지나지 않으며, 민주화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도 그 국민국가의 틀안에 매몰되어, 국가를 절대화하고 흡수될 수 밖에 없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저는 원전을 없애는 운동을 하나의 국가 뿐 아니라, 민중이 국제적으로 연대 협력하여 싸우지 않으면 세계적인 원전체제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확신하며, 우선 ‘원전체제를 따지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CNFE)를 세웠고, 대표자로서 몽골, 한국을 작년에 방문했습니다. 일본은 사용후 핵연료를 몽골 땅에 갖고 들어가 매립하려고 했습니다. 일본의 4배에 달하는 국토에 오사카 시 정도의 인구 밖에 없어서 이웃 마을과 평균 40킬로 거리인 이러한 곳에, 핵연료를 매립하고, 원전을 지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요. 세계 15% 라는 우라늄 매장량을 노리고 세계 대국이 몽골을 먹이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레, 몽골에 갑니다. 몽골 사람들과 함께 우라늄 광산과 피폭노동자의 실태를 조사하고 인터넷으로 세계에 정보를 알리는 계획을 세우려 합니다. 마침 그제(7월5일), 현지 NGO가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몽골 정부가 정권교체의 혼잡함을 틈타서 핵관련시설(핵폐기물처리보관 시설 건설)을 예산화한 것에 항의했다고 합니다. 이제 일본과 한국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고 불리우는 핵 정책의 화장실을 몽골에 보유하게 되는 것인지요. 현지에서 제대로 확인하고 오려고 합니다. 현지의 우라늄을 문제 삼는 것은 생명이 걸린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러분도 몽골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올해 1월에 요코하마의 탈원전 세계 회의에 참가하여, CNFE가 국제연대와 지역간 교류를 도모하는 프로젝트를 현실화했습니다. 그 성과로 6월에 ‘시모기타반도 지역 스터디 투어’를 기획하고, 일본각지와 한국NCC 및 WCC(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핵문제 책임자까지 참가해 정보교환을 하면서 이후 활동을 생각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한국 참가자들은, ‘핵없는 세상을 위한 한국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을 발표하고, 많은 교회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내년은 WCC총회가 부산에서 개최됩니다. 이들은 ‘신앙과 핵은 양립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활동을 지지하고, 연대 활동을 강화해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6. 결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재일교포사회는 아직, 이 원전체제에 우리자신의 책임이 있고, 우리가 일본인의 친구로서 함께 이 원전을 없애는 당사자로서 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긴 차별을 받아왔기 때문일까요. 일본사회가 전쟁 책임에 대해 애매한 상태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들은 일본인도 아니므로, 일본의 문제는 일본인이 책임을 갖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때문일까요. 또한, 재일교포가 올해부터 한국의 국정선거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동안 오랜 기간 소외된 경험 탓일까요. 한국정책에 대해서도 유권자로서 원전을 없애야 한다고 발언하기를 주저하는 것 같습니다. 한일 양국 정부에 핵 없는 세계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재일교포들의 책무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서도 또한 재일교포의 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본 식민 치하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독립해방을 갖기를 소망하며, 분단된 나라의 통일을 염원하기 때문일까요. 오히려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은 절대적이라고 믿어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의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국적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버려진 돌’과 같은 존재였던 재일교포는, 그런 까닭에 이 세상의 국가라는 것을 절대시하지 않으며, 국민국가라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런지요. 우리는 이 세상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앞으로 도래해야 하며, 존재해야 할 사회를 소망하는 것에 자기자신을 걸고 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일본인도 아니고, 본국의 한국인과도 다른, 그러나 차별에 대해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를 느끼는 차원에서 살아온 우리들이기 때문에, 미래의 희망, 전망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쓸모 없는 것은 어느 하나 없었던 것입니다. 길을 돌아가기도 했고, 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누를 끼치는 인생이었지만, 재일교포를 계속 고집해왔기에 재일교포라는 것에 더해 이 세상의 민족과 국적마저도 상대화하고, 아시아인들과 연대하며, 원전체제를 없애는 운동에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싶습니다.

 

제게 무슨 힘이 있어서 지금과 같은 길을 계속 걸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 길은 결코 제가 원해서 개척한 길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인도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주께서 인도해주시고, 모두가 걸어야만 하는 길입니다. 원전을 허락하면 우리 자손에게 큰 화근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인류가 살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을까요. 이제 그 생명을 위협당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대국의 핵무기 사용, 우라늄 발굴, 원전에 의해 이미 이 세계는 방사능 오염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대로 원전을 지속하면 더 이상 우리 아이들, 이 후손들은 방사능의 내부 피폭에 계속해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며, 힘을 모아 원전을 없애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핵과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 한국에서 시작된 이 말의 의미를 여러분과 음미하고 싶습니다.

 

역주: http://ko.wikipedia.org/wiki/정령지정도시 참조.

탈원전 국제교류(6월 5일-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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