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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성지순례, 대안, 평화여행

이스라엘 평화활동가와의 만남, 평화를 돌보는 어머니들

by yunheePathos 2017. 2. 16.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까지 안보(securiy)와 민주주의(Democracy) 사이에서 결정해야만 했다" 며칠 전 이스라엘 평화운동가(She)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것을 좀 더 명확히 하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아왔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아랍의 테러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도모하기 위해 일정한 민주주의의 포기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인간안보를 떠나 민주주의가 없는 국가안보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명쾌히 답해오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했던 한 이스라엘 시민이 평화활동가로 일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었다.


첫번째 계기는 2차 인티파다 당시 맨 주먹으로 이스라엘 군인의 총칼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어머니들에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이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같은 어머니인데'라는 동질성이었고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고 했다. 두번째는 자신의 자녀들이 평화롭게 살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군인이 되어 변하는 아이들과 항상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살아가는 환경은 사람을 너무나 황폐화시킨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갖는 경험이란다. 그래서 2차 인티파다 이후 체크포인트에서 인권감시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팔레스타인 어머니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같이하는 어머니들 250 여명이 자원봉사로 참여하는 조직으로 성장했고 자신들의 기록과 활동을 UNOCHD를 통해 알리고 있다고 한다. 이 모임은 대표가 없이 자발적인 자원봉사체로 운영된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라는 생명을 키운 존재로서 갖는 놀라운 변화이고 그래서 그들은 CP로 인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거나 전자화된 보안 프로그램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례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 모르겠다(한번 잘못 입력된 또는 임의로 입력된 정보가 수정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가 많다). 이 말은 한 주체로서 여성의 역할을 소홀히하는 것이 아닌 어머니로서 생명을 키우는 것으로부터 얻은 평화의 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머니들의 만남은 자녀와 가족이 평화롭기를 바란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안보'와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지배 프레임은 민주주의 요구에 반북이데올로기로, 북한 위협론으로 대응하며 통치해왔던 한국 지배집단의 슬로건과 다르지 않다. 그로인해 한국 시민사회 또한 지금까지도 이 패러다임에 갇혀 가치관의 혼돈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빨갱이/친북/종북이데올로기). 이런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한국 시민사회는 가치관의 혼란과 그로인한 정신적 불구라는 현상을 함께 경험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지정학적 국제정치질서 하에서 약자로서 팔레스타인과의 연대 뿐만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시민사회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이스라엘 시민사회와의 만남과 학습도 대단히 중요할 듯하다. 한국 시민사회와 기독교의 반쪽 정신불구를 치료하기 위해..


그러나 우리네와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국가간의 관계에서 보면 이 주장은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강자의 논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런 위협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팔레스타인이고 아랍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시민사회가 이 전제를 같이하는 한 이것이 단순히 이스라엘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논리장치일 뿐만 아니라 강자의 논리가 되어 팔레스타인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도구가 되는지를 해명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현상적인 상황만을 본다고 해도, 그리고 전쟁으로 포장되는 일방적 학살의 현실을 볼때 이런 전제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솔직히 질문할 수 있어야하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지금의 문제 원인을 따지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자의 평화와 안보를 말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에서 가장 아쉬웠던 대목이다.


한국 시민사회 진보라고하는 매체에서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를 설명하는데 있어 이런 전제를 종종 보게 된다. 그것은 과거의 한일관계를 벗어나 미래지향적으로 지금을 보자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과 같은 것이다. 약자의 아픔을 갖고 온 한국 시민사회가 강자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거대한 장벽과 빈번하게 파괴되는 생활터전 그리고 확대되는 정착촌으로 누구의 안

전과 안보 그리고 민주주의가 침해되고 위협받고 있는지는 자명한 것이 아닌가? 팔레스타인과 아랍인들의 테러를 반대하지만 한국 시민사회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 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먼듯이 생각하지만 우리의 문제가 거의 고스란히 담겨 있는 땅이 어쩌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점차하게 된다. 역사적 경험의 닮은 꼴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배태되고 있는 난민귀환, 땅의 회복, 국가 체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치유 등. 한국 개신교 신학의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평화를 위해 치열히 답을 구해야 하는 주제들이 아닐까?(2.10)


쓰레기장 처럼 보이는 이곳, 이틀 전까지 사람이 살던 집터이다. 두달 전 이스라엘로부터 땅 매각을 요청받았다 거절했는데 군인들과 포크레인과 철거노동자들이 한짝이 되어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집에 살던 11명의 식구들은 뿔뿔히 마을 친척 집에 기거하며 집을 복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가능할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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