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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2. 금하(錦霞) 신흥우(申興雨) 박사

by yunheePathos 2018. 12. 3.

금하(錦霞) 신흥우(申興雨) 박사


 

신흥우 박사는 1883326일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는 대원군이 섭정을 펴고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 일본과의 수호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개화기에 들어설 즈음이었으며 또한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 등 기독교 선교사들의 입국도 뒤따른 시기였다. 1887년 한국 최초로 새문안교회가 설립되고 그들에 의한 병원이 설립되는 등 한창 사회 변동이 심할 때인 1889년 부모가 계시던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외부와 접촉없이 한문공부만을 하다가 열두살때인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을 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특히 서재필 박사로부터는 민주주의 사상에 대해서 배웠으며 교장이었던 아펜젤러의 영향을 입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5년 간의 배재학당 생활을 마치고 1899, 17세 되던 해에 민주 선봉이 되어 학교문을 나섰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이 과학으로 문명화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오던 차 덕어(德語)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으며 학생회 회장직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학생회가 유신운동을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학부 대신의 주장으로 구금되어 190111월말부터 1903년 초까지 감옥에 있었다. 이로써 신 박사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 문제화된 학생운동의 주동인물이 되었다. 1903년 봄부터 1911년까지 만 8년간 미국 남가주대학(Southern California)에서 공부하였다. 19116월초 모교인 배재학당의 교감으로 취임하여 이듬해 1월에 당장(堂長)으로 임명되었다.

배재 학당장 재직동안 신 박사는 他尊自卑思想, 즉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정신교육을 고취시켰다. 반면에 인간은 곧 왕이다라는 사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교육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YMCA는 청소년들의 특수 전도기관으로 교회와는 성질이 다른 기독교기관이 되어야겠다는 의견이 모여지고 있었으며 당시 청년사업에 가장 적임자로 여겨져 총무로 추대된 분이 신 박사였다.(1920) 그때 나이 38세였다. Y총무 재직기간 그는 여러 가지 커다란 사업들을 전개했다. 그 중 한국Y를 독립시킨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일본Y에 예속되어 있던 한국Y를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동맹에 가입시키기에 이른 것이었다.(1924) 국민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농촌과 농촌 청소년들만 각성시키고 갱생시키면 나라 전체가 잘살게 된다는 확신으로 농촌 사업에 대한 3대 강령을 천명하며 농촌복지 건설과 농촌발전, 향상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신박사는 농촌 사업을 YMCA를 중심으로 범국민운동의 규모로 전개시키는 한편 YMCA 국제위원회에 통보 한국 농촌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62월에는 YMCA회관에서 기독교 연구회를 구성하여 기독교의 민중화, 생활의 간섭화, 산업기관의 시설, 조선적 교회의 설립이란 대목표를 설정하여 한국적인 교회 수립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데 앞장섰다.

민족 운동자로서 신 박사의 활동무대는 YMCA를 구심점으로 대내적으로는 주로 교육과 조직으로, 대외적으로는 국제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애국지사인 신 박사는 독특한 노선을 고수하였다. 첫째로, 그는 철두철미한 기독교적 입장이었고, 둘째로 강력한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민중과 고락을 함께 하며 민중과 더불어 국내에서 싸웠다는 사실이고, 셋째로 국제외교를 통하여 싸웠으며, 넷째로 대다수 국민인 농민을 위하여 농촌사업에 주력하였고, 다섯째로 여성의 해방과 그 진출을 위하여 힘썼다는 것이다. YMCA가 신 박사 등 YMCA 지도자들의 후원을 얻어 창설을 보았고 1922년 창설된 이래 1928년까지 YMCA 회관 내에 그 사무실을 가지고 활동한 것은 이를 밑받침해주고 있다.

민족운동의 선구자인 신 박사는 청년회가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도록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신 박사가 YMCA를 떠나게 된 직접적 원인도 여기에 있다. YMCA총무 재임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행한 일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19208월에 발생했던 제 2차 독립운동도 Y지도자들의 주도 하에 Y회관 내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19233월 조선 민립대학교 기성회 발기 총회 결정도 Y회관에서 이루어졌다. 민족주의 애국단체인 신간회의 결정도 Y회관에서 결성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국민체육을 통한 애국운동에도 크게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237월 하와이 학생모국 방문의 길을 터놓은 것이었다.

이토록 신 박사는 1935년 총무직에서 퇴임하기까지 약 15년 간 농촌사업을 개척하여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끌게 했으며, Y와 교회와의 관계, 사치와의 관계, 일본 정부와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능동적으로 대처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많은 공헌을 한 것이다.

-1977.3.1 청년


오리 전택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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