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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6. Y를 국제적 회합의 중심이 되게 한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by yunheePathos 2018. 12. 3.

Y를 국제적 회합의 중심이 되게 한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우리 조선사람이 5백년동안 받아온 교육사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합되는 실용물이 되지를 못하였읍니다. 다시 말하면 전부가 허위를 숭상한 그 사상이 우리의 교육, 정치, 경제, 일상생활의 빛이매 그리로서 우러나오는 모든 점이 무엇무엇 할 것 업시 실질을 떠낫슴으로 모두가 불완전이요 허구라고 할 수 밧게 업슴니다. 1929년 금강산 온정리에서 열린 청년회들의 하령회 석상에서 행한 좌옹 윤치호의 연설은 우리 민족의 일대 변혁기에 내린 좌옹의 시대 진단이었다.

18651226일 아산 신촌에서 한말 형조 판서와 군부대신을 역임한 윤웅열 장군의 장남으로 태어난 좌옹은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우리 근세사의 가장 긴박한 현장을 바로 고종 황제의 측근에서 당해왔다.

1881년 약관 17세의 좌옹은 일본으로 떠나는 만유시찰단에 유위총명한 수재인 소년 22중의 하나로 뽑히어 소년 유길준과 함께 일본의 개화된 현장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을 씩씩하게 근대화시켜야 한다는 좌옹 필생의 집념을 갖게 한 계기였다.

만유시찰을 마친 좌옹은 그대로 일본에 주저앉아 어학공부를 시작했다. 김옥균은 그때 좌옹의 어학공부를 격려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좌옹은 조선으로 부임해 가는 최초의 주한 미국공사 풋 장군의 통역이 되어, 공사의 고종황제 알현을 통역하고 통리통상사무오문주사라는 벼슬로 공사와 황제를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여파에 밀려 좌옹은 상해로 망명을 떠나게 되고 풋 공사의 소개로 중서학원 신학부에 들어간 좌옹은 그 때 인생의 전혀 새로운 변혁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좌옹이 기독교를 만나게 된 때문이었다. 세례를 받을 때 좌옹은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그러나 이제 한우님은 사랑이심과 그리스도는 구주이심을 믿는다. 나는 자신과 타인을 위하여 유위의 생활을 하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다. 좌옹은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인격을 길러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이때 굳혔다.

중서학원에서 가장 촉망받는 학생이었던 좌옹은 중서학원 교장의 소개로 미국 내쉬빌의 밴드빌트 대학에서, 그리고 이어 조지아의 에모리 신학대학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1895년 좌옹은 드디어 망명 십년만에 상해를 거쳐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의 선생은 단순한 벼슬에의 야망에 불타는 대신의 자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상과 민중의 개혁에 눈을 뜬 한 선구자였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입어 내각 비서관에 오르고 로서아 황제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 칙사를 수행하기도 했으나 서재필, 이승만, 이상재 등과 함께 만인공동회를 주관하여 민중의 소리에 의한 정치의 개혁을 꾀하고 서재필의 뒤를 이어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방 고양읍에 남감리교회를 세우고 기도대회를 주관하는 등 종교사회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개혁을 싫어하는 당시의 총리 조병식 등의 시기 때문에 좌옹의 정치 편력은 지방의 수령으로만 밀려다니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원산, 삼화(진남포), 천안 등지의 지방관 재직시 그가 실천한 참다운 민주주의적인 치적은 한말 관료사에 있어서 하나의 특이한 장을 이룩했고 그것은 당시의 관료주의에 대해 기독교적인 인격이 일으킨 혁명적인 실례였다.

그후 좌옹은 외부대신 서리에까지 오르고 외부대신에의 천거까지 받았으나 정계에서 물러나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에만 헌신하게 되었다. 이때 세워진 교육기관이 목축, 공예 등의 시설을 갖춘 개성의 한영학원과 그리고 대성학원 등이고 청년회에도 그의 정열을 쏟기 시작했다.

좌옹이 명예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독교 청년회를 위해 일하게 된 것은, 105인 사건에 휘말려 5년 간의 옥고를 치룬 다음이었다. (그때의 좌옹은 YMCA 부회장이었다) 그리하여 19164월 좌옹은 이상재 명예 총무의 뒤를 이어 YMCA의 총무로 취임했다. 좌옹은 한일합방, 삼일운동 등의 거센 역사의 분류를 헤쳐가며 YMCA종교, 교육, 운동, 사교 여러 방면에 기운차고 씩씩한 활동으로 민간교화운동에 중심이 되게이끌어 갔다. 그는 또한 YMCA를 민간인에 의한 국제적 회합의 중심이 되게 하여 YMCA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것은 바로 근세 민간외교의 효시이기도 했다.

그 후 1920년 가을 청년회의 총무직을 후계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YMCA 회장으로, 송도보통고등학교의 교장으로, 각종 사회봉사단체 및 체육단체의 장으로, 그리고 농촌운동의 지도자로 활약을 계속하다 회갑을 맞으니 때는 19241226일이었다. 그의 슬하엔 12명의 자녀와 10명의 손자가 모여있었다.

좌옹 윤치호는 이렇게 개화과정의 그 숨가쁜 역사를 몸소 살고 고민하고 노력하다가 간 그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인격이 이루어낸 그 시대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참고: 좌옹 윤치호선생 약전

전택부 씀

-1977.9.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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