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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8.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선 해관 김일선(金一善)

by yunheePathos 2018. 12. 3.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선

해관 김일선(金一善)

 

해관 김일선 선생은 1872516(음력) 서울 누상동(樓上洞, 유각골)에서 아버지 김재희(金在熙)씨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신학문은 별로 배우지 못했다. 기독교에 입교하기는 1902년부터였다.

그는 1911년에 이르러 유명한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자 박성춘씨와 함께 승동장로교회의 초대 장로로 피선되어 1935124일 이승을 떠날 때까지 그 교회의 주인 장로로 있었다. 그리고 1906년에 그 교회가 사립승동기독학교(국민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는 초창기부터 그 학교의 교사 또는 교장직을 맡아 일했으며, 1920년부터는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며 吳競眞 박사의 기독보육원의 전신)을 설립하여 그 원장이 되었으며, 1924년에는 오늘날의 경기대학, 인창중학, 인창여자상고, 경기국민학교의 전신인 사립인창학교(私立仁昌學校)를 설립하여 재단법인 인창의숙(仁昌義塾)의 이사장이 됐다.

이처럼 그의 활동은 폭넓은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장로이면서 일반사회에 나아가 육영사업과 사회사업의 개척자가 됐다. 그 중에도 제일 두드러진 공헌은 역시 우리 YMCA를 통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두 가지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는 재정 관리 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중계몽운동이었다.

재정 관리 면에 대한 그의 공헌을 설명하기 위하여서는 그의 전임자를 말 할 필요가 있다. 즉 초창기 한국YMCA 재정 관리 면에 공헌자가 두 사람이 있었으니, 김일선(金一善)씨와 브라운(J. M. Brown)씨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브라운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오늘의 서울기독교청년회의 전신)가 창설될 때 그 창설이사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그 보재위원장(保財委員長) 즉 오늘의 재정위원장이었다. 그는 본래 영국인으로서 1894년경에 한국정부의 초빙을 받아 그 재정고문과 인천세관고문을 겸임하고 있었다. 역사가 이선근(李瑄根)씨의 말에 의하면, 그는 황실과 정부의 불요불급한 경비를 절약하여 수지의 균형을 잡도록 노력했고, 나아가 일제에 대한 국채(國債)상환에도 남다른 수완을 보여 기한 전에 완불할 수 있게 해 일반 국민의 찬양을 받게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깝게도 러시아의 모략을 받아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한국YMCA창설운동에 참여하여 그 창설이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의 뒤를 이어받은 한국인 이사가 곧 김일선씨였다. 그는 한국YMCA 창설 초기부터 일반회원으로 입회하여 처음에는 청년회학관 교사가 되었고, 그 뒤 곧 이사가 되어 이사회의 회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성격이 매우 치밀하고 재리에 밝아, 회계가 된 다음부터는 재정 관리면에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전임자 브라운씨와 마찬가지로 청년회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사가 되자 그는 물론 재정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우선 그는 1904년 현재의 우리 청년회의 집터 약 1천 평을 사들일 때 자기의 돈 8,000원을 선불하였으며 1907년 옛 회관을 지을 때에는 먼저 거액의 사재를 희사하면서 모금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1924년에는 서울YMCA(당시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가 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의 인가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그는 재정관리의 책임자였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금고만 맡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회원모집으로부터 거액기부 또는 일반모금운동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했으며, 그가 있음으로 해서 YMCA 재정난이 해소되었고 재원이 발굴되곤 했던 것이다. 보통 돈 관리 잘하는 사람은 돈을 움켜잡고 돈을 못쓰게만 하는 것이 흠이다. 그리고 재원을 발굴하거나 돈을 모아들이는 재주는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일선씨는 그와는 달랐다. 그는 손창원(孫昌遠)과 같은 재산가를 잘 움직여 거액을 기부하게 했으며, 자기 돈도 아낌없이 내어 놓았다. 또한 돈 관리 잘하는 사람은 사업방면에는 어둡고 무관심하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엇이나 유익한 사업이라면 몸소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재정의 뒷받침을 해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그의 특징은 민중계몽운동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했다. 그 당시 청년회는 일요강화 또는 강연회를 통하여 일반 청년계와 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는데 그는 이 방면에 있어서도 큰 구실을 했다. 그 당시 Y멘으로서 말 잘하는 지도자를 크게 나누어 두가지 성격으로 볼 수 있는데, 외국 유학을 한 윤치호, 신흥우 등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고, 외국 유학을 전혀 못하고 국내에서 이름난 이상재, 김필수, 김창제 등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김일선씨도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김창제, 김필수, 김일선, 이 세 김씨는 Y3대 웅변가라는 칭호까지 들은 유명한 강사들이었다. 이 세 김씨는 각각 특징이 있었는데, 김창제(金昶濟)는 평신도로서 교훈적이며 예언자적인 웅변가였으며, 김필수(金弼秀)는 유학출신의 교회의 목사로서 얼큰하게 술에 취하면 웅변을 더 잘한다는 소문이 났으며, 이에 반하여 김일선씨는 교회의 장로로서 어장(語長)은 매우 짧으나 아주 조리있고 권위있게 말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청년회 안에서보다 일반사회에서 먼저 강연을 시작했다. 또한 1906년 독립회관(예전의 문화관으로서 독립문 옆에 있었다)에서 자주 대중강연을 했는데 그 때 벙어리 천사”, 즉 거만하고 무례한 중국 사신을 골탕먹인 한국 거지의 이야기를 해서 명성을 날리었다. (徐載華씨의 증언) 또한 청년회 강당에서 일요강화에서 자주 강연을 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시던 성경을 인용하여, 강연을 할 때는 울지 않는 청중이 없었다고 한다.

등걸

-1977.11.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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