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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9. 지방Y의 개척자 이순기(李舜基) 선생

by yunheePathos 2018. 12. 3.

지방Y의 개척자

이순기(李舜基) 선생

 



이순기 선생은 189092일 함경남도 함주군 상조양면(上朝陽面) 상한리(上閒里)에서 태어나셨다.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예절을 배웠다. 그 뒤 새로 창설된 함흥 영생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는 동안 그는 감동하여 예수를 믿게 됐다. 졸업한 뒤 1911년부터는 함흥 영생애학교의 선생이 되고 1914년부터는 원산에 가서 루씨 여학교의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1918년부터 새로운 운동을 개척했다. YMCA는 서울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 하나밖에 없었던 것을 함흥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함으로써 지방YMCA의 개척자가 되었다. 이것이 곧 최초의 지방 YMCA이다.

그런데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영생학교 안에 학생 YMCA가 먼저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918년의 일이다. 그때 지도자는 김창제(金昶濟)씨였고, 학생 Y의 회장은 현원국(玄垣國, 玄永學씨 아버님)씨였다. 그때의 주동인물이 곧 이순기(李舜基, 이한선, 이창선 형제의 아버님)씨였다. 이 세 사람이 함흥YMCA의 창설자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함흥YMCA의 초대회장은 맥레이(馬具禮, D. M. McRae)라는 캐나다 선교사였다. 이는 마치 1903년 서울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 그 초대회장이 게일(J. S. Gale)이라는 캐나다 선교사였던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다만 일제의 무단 정치하에서 그네들의 압력을 막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함흥YMCA가 창설될 때 이순기씨는 그 기록이사였다. 허나 곧 총무가 되어 1943년 함흥YMCA가 일제에 의하여 완전 폐쇄될 때까지 무려 35년간 총무직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20년 동아일보가 창설된 이래 계속 동아일보 함흥지점장이었으며, 예수교 장로교회의 장로였다. 이처럼 그는 세가지 일, YMCA총무, 신문기자, 교회의 장로, 이 세가지 일 중 어느 하나도 그는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이 세가지 일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요 또한 셋이었다. YMCA 이념이 영, , 체의 세가지 방면에 온 정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을 무시하고서는 그를 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9193.1 독립운동 때 함흥지방에서 주동인물이 되어 2년 간이나 옥고를 치루었는데, 이는 그의 애국심과 신앙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함흥지부가 결성될 때 그는 회장이 됐다. 이 모든 민족운동을 그는 YMCA를 중심해서 전개했다. 그 당시 집회, 언론, 출판 등의 자유가 박탈된 때에 YMCA라는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이상재, 윤치호 등의 지도자들이 민족운동을 전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순기 총무도 역시 YMCA를 중심으로 하여 동지를 규합했고 YMCA를 통해서 사회에 진출했다. 아마 그 당시 국내에 YMCA가 없었던들 우리 지도자들은 거의 발붙일 데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한 일은 비단 정치적 민족운동만이 아니었다. 그는 민중계몽과 교육과 농촌개발에도 앞장섰다. 그는 물산장려(物産壯勵)운동에도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는 192311일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1천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하면서 일화배척(日貨排斥)과 물산장려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또한 그는 1925년부터 YMCA 관북지방(關北地方)의 담당간사가 됨으로써 농촌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29년에는 번쓰(H. C. Bunce)라는 캐나다 출신 농업전문가가 파송되어 왔는데, 그는 이 사람과 같이 아주 과학적인 농민지도에 나섰다. 그는 저멀리 백두산 밑 혜산진(惠山津)까지 이르러 관북지방 전역을 두루 다니면서 농민을 지도했다. 계절따라 농민강습회와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는 곡식종자를 개량하는 방법, 씨뿌리는 방법, 논갈이와 밭갈이하는 방법, 토질검사, 퇴비증산, 번작, 양돈, 양봉 등 모든 부문의 지도를 했다. 사과나무도 개량종을 수입해다가 농촌에 보급했다. 그 중 제일 놀라운 사실은 사과판매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하는 동시에 일본에까지 가서 판로를 개척한 사실이다. 그를 통해 헐값으로 팔아야 할 사과를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농가수입을 증가시켰던 것이다. YMCA 회관 안에서는 주로 강연회, 목공, 철공 등 기술교육, 무산아동야학 등에 주력했다. 도서실도 차려놓고 회원들의 지능계발에 힘썼다.

1941년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때부터는 이러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계 인물들이 검거되는 바람에 이순기 총무도 검거됐다. 그는 1943년에 검거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것은 소위 구국투쟁위원회(救國鬪爭委員會) 사건이었다. 그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함흥형무소에서 고생하다가 1년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8.15해방 뒤에는 공산당에게 검거되어 3개월만에 석방되었으며, 1946년에는 조만식씨가 이끄는 조선민주 함남도당(咸南道黨) 부위원장 겸 함흥시당위원장이 되어 활약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함흥극장에 모여 남한에 대한 욕설과 반민족적인 결의를 하는 것을 보고 참다못하여 졸도한 채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가 1948417, 당년 59세였다. 19771130일에 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대통령표창을 했다.

등걸

-1978.1.10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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