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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11. 초창기 신교육의 개척자 우사 김규식 박사

by yunheePathos 2018. 12. 3.

초창기 신교육의 개척자

우사 김규식 박사

 



우사 김규식 박사는 1881127일 경남 동래 태생으로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새문안교회 목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박사의 구호를 받아 그의 양자가 됐다. 이처럼 양자가 된 덕택으로 그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고 미국유학을 갈 수 있었다. 즉 그는 189616세 때 미국 버지니아주 로녹(Roanoke)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하고 1904년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 해부터 그는 YMCA, 즉 그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간사 겸 청년회 학관 교사가 됐다. 1913년 해외로 망명을 갈 때까지 그는 Y학관의 교사 또는 학감으로서, 또 한편 새문안교회의 초대장로로서 교계에서 크게 활약했다.

이 기간중의 역사가 우리의 관심거리다. 그러나 잠시 눈을 다른 데로 돌려보면, 그는 위대한 정치가이기 이전에 먼저 영문학자이며, 대학교수였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는 한국 최초의 미국유학생이었다. 그이만큼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어찌나 영어를 잘 구사했던지 선교사들마저 어려운 영어는 그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 가있을 때 천진(天津) 북양대학(北洋大學) 등에서 영문학을 강의했고 책을 저술했으며 신문잡지 편집을 했다.

또한 그는 정치가이기 전에 능숙한 외교관이었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특사로 뽑혀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파송되어 갔다. 1차 세계대전을 일단 마무리짓고, 미국 대통령 윌슨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미, , 불 등 강대국들이 약소민족들에 독립을 주자는 세계대회였다. 여기서 그는 한국민족의 독립을 호소한 뒤 미국을 거쳐 상해로 돌아왔다. 이처럼 파송되어 약 2년 간 해외에 있는 동안에 그는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 곧 외무부장관에 임명되고 또한 학무총장 곧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만큼 그의 비중은 임시정부안에서 컸다.

그 뒤 그는 이 자리를 사면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의 피압박 민족대표자 대회의 한국민족대표로 참석했다. 때는 192111, 이 대회는 그 당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정부가 극동의 피압박 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고 각 민족을 자기 세력권 내에 넣자는 속셈으로 이 대회를 소집한 것이다. 이 대회에 다녀온 뒤부터 그는 항상 좌우합작적인 정치노선을 걷게 되었다. 그는 이 대회를 치룬 뒤 감탄하는 어조로 한국 민족의 독립을 러시아의 힘을 빌어서 해야한다라고 공언했던 것이다.

19458.15해방이 되자 그는 그 해 11월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서 요인들과 함께 중경(重慶)에서 귀국했다. 귀국하여 미군정 하에서 그는 민주의원 부주석에 취임했고, 민족자주연맹 총재 및 입법의원 의장이 됐다. 이때부터 김 박사의 노선은 이승만 박사의 노선과 노골적으로 갈리게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좌우합작 노선은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남한 만으로의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나서서 이북 평양에까지 가서 민족통일을 호소했다. 19484월 김 박사 일행이 평양에 당도하자 피로연 석상에서 그는 우리는 우리 장단에 맞추어 우리춤을 추자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그의 순진한 생각은 이북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결국 19506.25동란이 난 뒤 곧 북한군에게 잡혀 이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러면 YMCA에 대한 공헌은 무엇이었던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1904년 미국유학에서 귀국하면서 곧 YMCA 간사, 교사가 됐다. 그 뒤 청년회학관 학감이 되고 이사가 됐다. 그의 명석한 두뇌와 지식은 언제나 청년학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됐다. 따라서 그는 신교육의 개척자 구실을 했다. YMCA는 스포츠를 제일 먼저 도입한 단체이다. 김규식 박사가 청년회학관 학감으로 있을 때인데 양반 출신 학생들은 스포츠를 천히 여기고 그 시간을 거부했다. 그러나 김규식 박사는 강제로 체조를 시키고 스포츠를 장려했다.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또 한편 김규식 박사는 기독학생Y운동의 선구였다. 알다시피 재일본 한국YMCA1906년에 창설되었다. 그 다음해인 1907년에 일본에서 WSCF대회가 열렸었는데, 김규식 박사는 윤치호, 민준호, 김정식씨 등과 함께 한국학생Y대표로 참석했던 것이다.

김규식 박사는 새문안교회의 장로로서 일반교계에서도 개척자의 구실을 했다. 8.15해방 뒤 귀국했을 때는 제일 먼저 새문안교회를 찾아가 경의를 표하고, YMCA 지도자들을 만나 옛날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6.25 당시 북한군에게 납치되고 말았던 것이다.

-1978.4.2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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