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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12.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목사

by yunheePathos 2018. 12. 3.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목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목사는 한국YMCA가 창설되기 이전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창설준비의 만반을 위해 힘쓰다가 창설을 못 본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펜젤러 목사는 감리교의 초대목사이다. 그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188545일 한국에 상륙했다.

그는 18582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 때 중생을 체험하고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Marshal College)을 거쳐 드루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그는 이미 재학 당시 1883년 겨울 신학교 연합집회 때 외국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한국을 향해 떠나기 전날 밤인 188522, 샌프란시스코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결혼은 한국으로 떠나기 두달 전에 했고, 한국에 올 때는 부인과 동행했다. 그러나 부인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 당시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다시 일본에 철수했다가 두달 후에야 완전 상륙할 수 있었다.

아펜젤러 목사가 끼친 공헌은 실로 허다하다. 우선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서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188583일 학생 두 사람을 데리고 시작했다. 학교이름과 액자는 그 뒤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그리고 1888년 감리교 정동교회를 창설했다. 그것이 곧 장로교의 새문안교회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어머니교회이다. 그는 이 교회의 창설자 겸 목사로 재임 중에 1902712 45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것도 교회를 위한 떠남이었다. 즉 목포에서 열릴 예정인 성경 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인천서 배타고 가다가 배가 충돌하는 바람에 목포 앞바다에서 익사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을 번역하다가 순사한 것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단순한 목회자 또는 교육자가 아니라 어학자이었다. 그는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성경번역위원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찬송가 편집위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면 한국YMCA를 위해서 그는 무엇을 했는가?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그는 한국YMCA가 창설되기 전에 순직했기 때문에 그 창설 준비에만 공헌했다. 1899년 그는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둘이서 YMCA의 창립을 제창했던 것이다. 교회만 가지고는 안되겠으니까 학교나 병원을 설립했듯이, 그들은 청소년 선교를 위해서는 YMCA와 같은 사회단체가 있어야 할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150명의 한국청년들의 진정서를 첨부하여 YMCA 국제위원회에다 한국YMCA 창설을 건의했던 것이다.

이 건의서를 받은 YMCA 국제위원회는 진상을 더 파악하기 위해 전문간사를 한국에 파송하게 됐다. 1900년에 일어난 중국의 의화단 사건을 피하여 한국에 오게 된 테진(天津) YMCA 총무 라이언(D. Willard Lyon)씨에게 진상을 조사 보고케 했다. 그는 1900628일부터 917일까지 약 4개월 간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진상 조사를 했다. 라이언씨는 건의서를 낸 아펜젤러 목사와 언더우드 목사를 우선적으로 방문했고, 그 밖의 헐버트(H. B. Hulbert), 게일(J. S. Gale), 번커(D. H. Bunker), 스크랜톤(W. B. Scranton), 여병현씨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면담을 했다. 이 면담한 내용을 국제위원회에 보고한 결과 1901년부터 창설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아펜젤러 목사와의 면담내용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90093일 라이언씨는 아펜젤러 목사를 찾아가서 YMCA 창설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아펜젤러 목사는 매우 열띤 어조로 대략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엇보다 청년회가 창설되면 교회가 이때까지 포섭하지 못했던 청년들을 많이 포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년에 국제위원회에 대하여 건의서를 제출하게 되었는데, 한국청소년 사업은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YMCA를 창설하려면 정회원 즉 세례교인이 있어야 할 것인데, 정회원은 배재학당 학생 중에서 제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류층 청년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올 것이다. 전문 간사가 아주 원만한 세계적인 성격의 소유자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한국말을 잘 배워야 할 것이다

이처럼 매우 짧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아주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결과 YMCA 국제위원회는 19019월에 유능한 전문간사 질레트(P. L. Gillett)씨를 한국에 파송하게 됐다. 그는 한국에 오자 제일 먼저 아펜젤러 목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배재학교 안에다 학생YMCA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생 YMCA가 한국역사상 최초의 YMCA이며, 이것을 토대로 하여 190310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등걸

-1978.5.15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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