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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13. 여병현 선생

by yunheePathos 2018. 12. 3.

여병현 선생

 

여병현 선생은 1867년에 태어났으나 그 생일과 세상 떠난 날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직접 말한 것과, 다른 몇 가지 문헌을 근거해서 그는 황해도 사람이며 19세기 말의 유명한 여행가이며 개화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그는 한국YMCA 창설에 있어서 최초의 공로자요 최초의 이사였다는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다시 말해서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 그는 창립회원인 동시에 최초의 이사 12명 중의 한사람이었다. (12명 이사 중 2명만이 한국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미국과 영국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배재대학(한때 이렇게 불렀음)의 선생을 거쳐 영국공사관, 세브란스 병원 등에서 일하다가 신병으로 일찌기(1920년대) 세상을 떠났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가 세브란스병원에 있을 때,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rancis W. Schofield)박사가 내한했는데 그를 만나자 너무 반가워 “아저씨”하고 불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홉살 때 고향(영국 런던)에서 여병현 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즉 그때 여병현 씨는 영국 런던에 있는 할리 대학(Harley College)학생이었고, 그 대학교수가 바로 스코필드 박사의 아버지였는데 가끔 자기 집에 놀러왔기 때문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어릴 때 처음으로 한국사람을 만나보고 이상함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한국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니 참말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병현 씨는 한국인로서는 최초의 YMCA 목격자였다. 그것도 YMCA의 본고장인 런던에서! 이 때문에 그는 한국YMCA가 창설될 때 초대이사로 뽑혔으며, 또한 그의 증언이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한국 YMCA가 창설되기 4년 전부터 발기인들은 각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1900년 라이언(D. Willard Lyon)이란 사람이 한국에 와서 기초조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이 라이언 씨의 조사보고야말로 한국YMCA 창설의 결정적인 구실을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라이언 씨는 1900년 6월부터 9월까지 거의 4개월 간 한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각 교파 선교사들과 면담을 했다. 그 중 한국사람으로서는 오직 여병현 씨만을 만났다. 그 당시 라이언 씨가 여병현 씨를 만나 이야기한 내용을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나는 언더우드 박사를 만난 8월 8일에 여병현 씨를 찾아갔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미국에 가서 5개월 동안 워싱턴 D. C.에 있는 하바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자기는 아직 기독교신자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깁손(Gibson)박사교회(장로교회)에 입교하여 거기서 신자가 됐다. 자기는 3년반 동안 런던에 있는 할리 대학에서 공부했다. 자기는 1899년 5월에 귀국했는데 그 해 9월에 배재대학의 선생이 됐다.
그는 말하기를 ‘약 2백 여명이 장차 조직될 YMCA에 가입코자 원하는데, 그중 40명 또는 50명은 배재대학에서 나올 것이며, 약 20명은 정부 고관 자제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YMCA가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서적과 신문 잡지로써 도서실 또는 열람실을 꾸민다면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에는 공회당도 없고 클럽도 없기 때문에, 만약 YMCA가 생긴다면 굉장한 인기일 것이며, 특히 한국인들의 사회적 관심은 지금 한창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현재 서울에는 다섯 개의 사립학교가 있는데, 거기서 많은 학생들에게 지리, 역사, 일본어, 국어, 국어문법 등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학교들은 정부의 현직 장관 또는 전직 장관이 경영하는 학교들이며 거기에는 약 250명의 학생들이 있다. 그 학생들이 다 YMCA에 기뻐 가입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상 라이언 씨의 면담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 서울 학생계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는 YMCA의 본고장인 영국에 가서 YMCA활동을 제일 먼저 견학한 유일의 한국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언 씨는 여병현 씨를 찾아가 만났으며, 그의 증언 때문에 확신을 갖고 YMCA창설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라이언 씨는 그때 언더우드(H. G. Underwood) 박사를 비록하여 헐버트(H. B. Hulbert), 아펜젤라(H. G. Appenzeller), 게일(J. S. Gale), 번커(D. H. Bunker), 스크랜턴(W. B. Scranton) 등 장감 양교파 선교사들을 차례로 면담했지만, 민간인으로서는 오직 여병현 씨만이 그의 면담대상자였다.
이 보고서는 1900년 가을에 곧 YMCA국제위원회에 보내져서, 결국 이듬해 9월부터 본격적 창설작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즉 Y국제위원회는 창설간사로서 질레트(P. L. Gillett)씨를 한국에 파송해서, 우선 배재학당 안에다 학생YMCA부터 조직했으며, 1903년 봄에는 창설준비위원회 즉 자문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 해 10월 28일을 기하여 역사적인 창설총회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그 총회 때 당선된 12명 이사 중에는 한국인이 2명 있었다. 진실로 여병현 씨는 한국YMCA의 창설의 공로자이며 그 육성의 공로자이다. 그러나 그는 신병으로 인하여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등걸
-1978.6.16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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