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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15. 뿌락만(Brockman) 형제

by yunheePathos 2018. 12. 3.

뿌락만(Brockman) 형제

 


뿌락만 형제란 Fletcher Sims BrockmanFrank M. Brockman 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F. S. Brockman1901년부터 중국 YMCA 2대 총무로 15년 간 시무하다가 미국에 돌아가서 YMCA 국제위원회 부총무를 지낸 세계적인 Y지도자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 F. M. Brockman1905년 내한하여 1929년까지 일했다. 이 두 사람은 다같이 한국YMCA 창설의 공로자이다.

우선 형 F. S. Brockman의 경우를 이야기하면, 1903318일에 있었던 한국YMCA 창설준비회의의 강사로 초청되어 왔었다. 이 준비회의는 주한미국 대리공사 알렌(H. N. Allen)을 비롯하여 영, , , , 소 등 각국 공사 또는 그 대표자들과 각파 선교사들과 은행가, 실업가, 세관장, 이민관, 특히 민영환씨 등 한국정부의 고관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는 YMCA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한국YMCA의 창설준비가 완료되는 동시에 Y 회관 건축비 모금운동까지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그때 3주일간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Y창립간사로 파송되어 왔던 질레트(P. L. Gillett)씨의 자문역이 되어주었다. 그는 동양통의 YMCA 지도자이기도 하다. 역사가 홉킨스(C. H. Hopkins)씨는 뿌락만씨만큼 전세계 YMCA 협력 사업계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는 공자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융합시키며 살았다라고 평했으며, 그는 또한 윤치호 씨가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시절의 동창생이었던 친구로서 그때부터 한국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동생 F. M. Brockman씨는 1905년부터 황성기독교청년회 협동간사로 일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 형이 일하고 있는 중국YMCA의 간사가 되고자 했으나 그 당시 YMCA 국제위원회 총무이던 맛트(J. R. Mott)씨의 권유로 한국에 와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총무는 질레트(P. L. Gillett)씨였는데, 이 두 사람의 손발이 잘 맞아 YMCA 창설 사업을 성공적으로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F. M. Brockman씨의 업적은 실로 크다. 그는 우선 프로그램 간사로서 초창기 사업을 주도했다. 우선 그는 교육사업을 일으키는데 성공했고 학생Y 조직에 큰 공로를 세웠다. 즉 그는 서울시내 각 미션스쿨 안에 학생 Y를 조직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19106월 진관사에서 제 1회 학생Y 하령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때에도 그의 활약은 컸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 학생하령회를 계기로 하여 각 학교에 학생Y가 조직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곧 한국학생Y운동의 최초의 출발이었다. 이 학생Y 하령회가 있은 다음해에 그는 새로 부임한 학생부 간사 이승만씨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Y를 조직했다. 그 결과 19116월 개성에서 제 2회 학생Y 하령회가 열렸을 때에는 광주 숭일중학, 군산 영명중학, 전주 신흥중학 등 지방학교를 포함한 21개 학교에서 대표가 전국에서 파송되어 왔으며, 그 참가규모나 초빙되어 온 외국인 강사나 국내강사는 제 1회에 비하여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이때의 학생Y 하령회 회장은 윤치호씨(그당시 Y부회장)였는데, 이 하령회 직후에 105인 사건이 터져 윤치호, 양전백 등 그 하령회 때의 지도자들과 거기 참석했던 선천 신성중학교 평양 숭실중학, 서울 경신중학교 등의 학생들이 전부 체포되었던 것이다.

동생 F. M. Brockman씨의 제일 큰 공헌은 역시 한국YMCA 연합회 조직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는 언제나 협동간사 또는 협동총무의 입장이었으나 그의 치밀하고 충성스런 봉사정신은 드디어 학생Y운동으로 하여금 한국YMCA 연합회로 발전하는데 기여하게 했던 것이다. 즉 일제가 주민 105인 사건과 유신회 사건 때문에 쑥밭이 된 한국YMCA의 재건을 위하여 그는 이상재 총무의 훌륭한 손발 역할을 했다. 질레트(P. L. Gillett) 총무가 국외로 추방되고 윤치호 부회장은 6년형을 받고 이승만, 김규식, 제다인 등 Y 간부지도자들이 국외로 밀려나가게 되자 이상재씨가 총무자리에 들어앉게 되었는데, 그 때 가장 이상재씨의 든든한 동역자는 F. M. Brockman씨였다. 그들은 합심하여 전국연합회 조직에 착수했다. 아무리 일제의 탄압이 심하더라도 전국 각지에 조직되어 있는 학생 Y만은 해산시킬 수 없었다.

드디어 191442일부터 5일까지 개성에서 전국연합회 조직 총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때 참가한 YMCA는 조선중앙Y(현 서울Y)를 비롯하여 전부 10Y였다. 그때 참가한 YMCA는 조선중앙Y와 배재학교, 경신학교, 세브란스의전, 한영서원(현 송도고교), 전주 신흥학교, 군산 영명학교, 광주 숭일학교 등 8개 학생Y였다.

그 뒤 F. M. Brockman씨는 연합회 총무가 되고, 1916년 윤치호씨에게 총무직을 넘겨주고는 1929년 그가 병으로 귀국할 때까지 무려 23년 간 한국Y를 위해 봉사했다. 그는 1916년 서울Y학관 창립 10주년 기념식 때는 그 창설자의 한사람으로서 10년 근속 표창을 받기도 했다.

등걸

-1978.9.13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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