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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10. 한국농촌운동의 개척자 홍병선(洪秉璇) 목사

by yunheePathos 2018. 12. 3.

한국농촌운동의 개척자

홍병선(洪秉璇) 목사

 



홍병선(洪秉璇) 목사는 1888117일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천성이 본래 활달하고 총명하여 서당에 다닐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190215세 때 사립 경성학당(京城學堂)이란 신교육기간에 입학하여 신문학을 배우고, 일본조합교회(日本組合敎會)의 추천을 받아 21(1908) 때에 교토(京都)에 있는 동지사신학교(同志社神學校)에 입학하여 3년 간 외국유학을 했다. 귀국하여 1911년부터 한양기독교회(漢陽基督敎會)의 전도사가 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홍병선씨가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 전도사가 된 것은 그가 29세 되는 해인 1916년의 일이다. 그 뒤 1923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67719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733-2에서 80세를 일기로 이승을 떠나실 때까지 40여년간 대한감리교 목사이셨다.

홍병선씨는 목사로서 일반사회에 깊숙이 들어가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교회 목사는 직접 아니하고, 배화여학교 교사, 영창중학교(英彰中學校) 교장, 국민대학 강사, 재단법인 보린회(保隣會) 이사장, 성인교육중앙회 총본부 회장, 중앙신학교 강사, 농업문제연구회 이사, 농림부 농림위원, 농업협동조합 고문, 특히 YMCA 이사간사총무 등을 지냈다.

그 중에도 그는 YMCA운동에 전 생애를 바치다시피 했다. 그는 1920년 서울중앙 YMCA의 간사 겸 청년회학관 교사가 된 이래 YMCA 연맹의 농촌부 간사전국순회 간사 및 재일 한국 YMCA의 총무 등을 역임하면서 Y운동에 헌신했는데, 그가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역시 농촌운동이었다. 일정 때 한국 YMCA 농촌운동은 1923년부터 시작하여 19377월 조선총독부의 금지령에 의하여 정지되기까지 약 15년 간 전개되었는데, 홍병선 목사는 처음부터 이에 가담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Y농촌운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동시에 확충자의 한 사람이다. 여기서 한사람이라 한 것은 그때는 총무 신흥우 박사의 협조와 동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역시 덴마크식 농촌운동을 한국에 도입한데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가 이 운동을 시작한 때부터의 일을 대강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9193.1독립운동 이후 우리 사회상은 희망과 좌절, 자유와 경제파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종교와 공산주의 등 극과 극이 충돌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이때에 YMCA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것이 지도자들의 당면한 문제였다. 마침내 YMCA는 농촌사회에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 경향의 청년들이 농민운동을 들고나설 때에 YMCA우리는 모든 농민들의 경제적 향상과, 사회적 단결과, 정신적 소생을 도모한다라는 3대 강령을 내걸고 농촌사회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때는 1923년이었다. 이것은 전 인구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 즉 농민들을 무시한 Y사업은 무의미하다라는 뜻에서 세워진 사업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이 세워지자 국제적인 반응이 컸다. 1924YMCA 국제위원회는 뉴욕에서 한미 양측 지도자회의를 열고, 한국YMCA 농촌운동을 지원하기로 원칙을 결정한 다음 (1)전국에다 10개 지역을 선정하여 캐나다와 미국에서 농업 전문가를 파송한다. (2) 이 전문가는 1925년부터 1년에 2명씩 5년 간 10명까지 파송한다. (3) 한국YMCA는 이 10명의 전문간사를 확보한다는 등의 합의를 하고 사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 한국인 10명중에 제 1착으로 뽑힌 사람이 홍병선 목사였다. 그는 우선 전문가로서의 자질향상과 훈련을 위하여 덴마크의 농촌운동을 시찰하게 되었다. 때는 1928, 마침 그 해에 예루살렘 국제선교회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홍병선 목사는 신흥우, 김활란 등과 함께 장도에 올랐다. 특히 홍병선 목사는 덴마크 농촌운동 연구를 위하여 YMCA 국제위원회의 정식 간사훈련 프로그램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서 약 1년 간 수련을 받고 귀국하여 본격적인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Y연합회 농촌사업부 담당간사가 되어 서울지방과 전국 각지의 순회강사로서 농촌사업을 지도했다. 농민의 문맹퇴치, 야학, 생활위생 등을 비롯하여 협동조합, 신용조합, 구매판매조합 등의 조직, 덴마크식 농민강습소, 고등 농민학교 등을 조직하여 농촌 청년을 지도했다. 그 결과 YMCA 농촌 센터는 서울을 비롯하여 대구, 마산, 원산, 회령, 송도, 선천, 함흥, 군산, 광주, 철원, 재령, 평양, 강계, 안동, 전주, 순천, 성진, 해주, 영변, 공주 등 중소도시에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처럼 Y농촌사업에 기세를 올리자 새로 부임한 우가끼(宇瑄一成) 총독이 Y농촌사업을 말살하는 수법으로서 소위 조선 농어촌 진흥책을 선포하여 Y농촌운동과 꼭같은 방법으로 농촌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공헌은 Y농촌운동으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크게 벌이게 된 사실이다. YMCA가 주축이 되어 장감 양교파 선교사들이 선교부 농업전문가회의를 조직하게 됐다. 이 회의는 교파를 초월한 농촌운동을 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농민강습을 개최했다.

홍병선 목사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예를 들면 협동조합론”, “정말과 정말농민고등농민학교등의 저서가 있고, 월간지 농촌청년과 농민교과서 격인 농촌총서”, “농촌지남”, “농촌 요람등이 있다. 70년대 양곡은행이 성공리에 진행된 것도 홍병선 목사가 닦아놓은 터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등걸

-1978.2.2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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