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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32. 한국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찌(會田嘉伊智) 옹

by yunheePathos 2018. 12. 4.

한국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찌(會田嘉伊智)

 


소다 가이찌(會田嘉伊智) 옹은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고아들을 위한 사업에 헌신한 사회사업가이며 교육자이다.

18671020일에 일본 야마구찌겐(山口縣)에서 태어난 그는 20세가 되던 해부터 고향을 떠나 방랑생할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양문명의 창구 구실을 했던 나가사끼(長琦)항의 탄광에서 광부일을 하면서 고학하던 것을 비롯해서 25세부터는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에서 수년간 식민지로서의 생활을 겪었다. 그리고 29세에는 대만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당시의 대만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이다. 그곳에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제조공장에서 통역을 하다가 32세 되던 해에 중국본토에 가서 일본군대의 군속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에 오게된 것은 그가 38세가 되던 1905년이었다. 그가 대만에 있을 때 독주에 취해 거리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된 것을 한국인이 구해주어, 늘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은인의 나라에 가보고 싶어했었다.

서울에 오자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인연을 맺고 그 학관의 일본어 선생이 됐다. 그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주동세력을 구축했던 이상재 선생 등 많은 지도자들은 오랫동안의 감옥 생활을 청산하고 풀려 나왔으며 곳곳에는 불일듯이 기독교부흥운동이 일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소다 선생은 1906년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독실한 크리스챤인 우에노다끼(山野)양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18세가 되는 1896년에 나가사끼에 있는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즉시 한국에 와서 히노데 소학교(일신초등학교 전신)의 교사와 숙명여학교, 이화여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역임했는데 그들은 서울에서 만나 소다 선생이 41, 다끼양이 30세가 되던 1908년에 결혼을 했다. 그 뒤부터 소다 선생은 본래의 음주벽을 허물고 동시에 금주회(禁酒會) 회장이 되었으며 심령운동에 앞장을 서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사도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소다선생이 한국인 지도자로서 가장 존경하던 이상재 선생은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로서 동포여 경성하라는 경문을 뿌리면서 백만명 구령(救靈)운동을 펴는 등 맹렬한 전도활동을 폈는데, 소다 선생은 이 운동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당시 1907년에 헤이그 밀사사건, 1909년에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1910년에 한일합방, 1912년에 105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1910년부터 강화된 일본의 무단정치 아래서 YMCA지도자들이 억울함을 당할 때에 소다 선생은 일본인이지만 언제나 한국인 편에 서서 변호인 구실을 했다. 그래서 소다선생은 한국인을 너무 옹호한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 당국으로부터 매국노라고 따돌림을 받았고 한국인들로부터는 일본인 스파이라고 의심을 받는 등 많은 비난과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105인사건과 3.1독립운동 당시에는 구속된 YMCA 지도자들을 석방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후, 그는 1921년부터 가마구가(鎌倉)보육원의 경성(京城) 지부장이 되었고 소다선생 내외는 한국 고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에 일본의 패전과 함께 그들은 일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끼 부인은 고아인 가엾은 어린아이들을 내버리고 갈 수 없었다고 우겨서 홀로 한국에 머물게 됐다. 그 당시에 한국민이 가졌던 일본인에 대한 살벌한 적대감 속에서도 그녀는 아무런 피해없이 오히려 존경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1950114일에 숨을 거두게 됐는데, 그녀를 존경하는 국내의 친지들은 그녀를 한국사회사업가협회 사회장()으로 모셨다.

한편, 소다선생은 일본 각지를 순회하면서 일본인에게 한국에 대한 범죄행위를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세계평화라는 견장을 어깨에 메고 원자폭탄을 맞아 폐허가 된 히로시마 등지를 순회하면서 세계평화운동 강연행각(世界平和運動 講演行脚)이란 명칭으로 전도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제 2의 모국이나 다름없는 한국을 못잊어 하다가 드디어 소다 선생은 한국 정부의 특별한 배려로 196156일에 94세의 고령으로 다시 한국땅을 밟게 되었고 가마구라 보육원의 부신인 영락보육원의 원아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고아들과 함께 즐거운 여생을 보내고 한국에 온지 1년이 채 못되는 1962328일에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소다 선생도 역시 한국사회단체연합회장()으로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우리 정보는 소다 선생이 한국 고아에게 바친 사랑과 인류평화정신을 기념하여 1962928일자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등걸

-1980.12.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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