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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31. 재일본 한국Y 2대 총무 해온(解溫) 백남훈(白南薰)

by yunheePathos 2018. 12. 4.

재일본 한국Y 2대 총무

해온(解溫) 백남훈(白南薰)

 


백남훈(白南薰) 선생의 아호는 해온(解溫), 1885113일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 서부리 176번지에서 탄생, 83세의 고령으로 1967628일에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교육가, 정치가, 사회운동가로서도 찬란한 경력을 가진바 있는 그가 YMCA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1909년에 선생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부터였다. 선생은 25세 되던 해에 도쿄의 명치학원(明治學院)에 입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고, 다시 와세다(早稻田) 대학 예과를 거쳐 1917년에 동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도쿄에 가자 곧 재일본 한국YMCA(원명은 재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총무 김정식(金貞植) 선생의 안내로 그 회원이 되는 동시에 때마침 일본 유학생 전도의 사명을 띄고 동경에 온 조선예수교장로회의 한석진(韓錫晉) 목사와 함께 학생교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학생교회는 재일본 한국YMCA회관 안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는데, 해온 선생은 그 교회의 초대 지사가 되었다. 동료 집사로서는 김현수(金顯洙), 장원용(裝元瑢), 장혜순(張惠淳) 등이었고 초대 영수로서는 YMCA 총무였던 김정식(金貞植)을 비롯하여 조만식(曺晩植), 오순형(吳舜炯) 등이 활약했는데, 그들 전부가 재일본 한국YMCA의 간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재일본 한국YMCA는 회관이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고오지마찌우(麴町區)에 있는 구한국 정부 공사관에서 준비를 하고 간다꾸(神田區)에 있는 일본인YMCA의 사무실 한 칸을 빌려쓰다가 간다꾸(神田區) 니시오가와죠(西小川町)에 있는 일본인 가옥을 얻어 쓰고 있었다. 이 집에서 예배도 함께 보고 YMCA 모임도 가지기 시작했는데, 초대 총무는 김정식, 초대 간사는 장혜순이었다.

선생은 와세다대학 재학시인 1910년에 YMCA 의사부(議事部, 이사회의 명칭)로부터 간사에 채용되어 그 다음해에 총무로 승격됐다. 마침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 기미가 무르익어 가고 백관수(白寬洙), 송계백(宋繼白), 최승만(崔承晩) 등 서울Y 출신 학생들과 김도연(金度演), 최팔용(崔八鏞), 이광수(李光洙) 등 학우회(學友會) 계통 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의 준비를 위하여 활발히 밀회를 거듭하고 있었다.

드디어 191928일 오후 2시 재일본 한국YMCA 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의 발족이 선언되는 동시에 백관수(白寬洙), 김도연(金度演), 서 춘(徐 椿) 11명의 대표 명의로 2.8독립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때 YMCA총무로 있던 해온 선생은 일부러 11명 대표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해온 선생까지 직접 운동에 가담했다가 잡혀가게 되면 뒷처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2.8 주동자들은 모조리 체포되어서 감금되었는데, 해온 선생은 일일이 유치장으로 찾아가 음식과 의복을 차입했으며, 동경제대(東京帝大, 현 동경대학의 전신) 한국YMCA 간사 후지다(藤田進男) 및 이마이(今井嘉幸), 사꾸마(作間耕造) 등 유력한 교수들을 통하여 지난날 105인 사건 때에 한국인들을 위하여 명변호사로 활약했던 우자와(鵜澤聽明)를 소개받아 그의 도움으로 동지들의 석방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처럼 해온 선생은 당시 재일본 한국YMCA의 총무로서 YMCA 회관을 2.8독립운동의 발상지로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거사 후 체포되어 감금된 주동학생들의 보호 및 석방운동을 한 중심인물의 구실을 다했던 것이다.

그 뒤 해온 선생은 19231월에 이르러 YMCA 일을 최승만에게 넘겨주고 귀국하였다. 동경 대지진이 일어나기 4개월 전이었다. 해온 선생은 1921년부터 동경Y의 재건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사임 후에는 귀국하여 채필근(蔡弼近), 송창근(宋昌根), 송의정(宋義禎) 등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부산, 진주, 동래 등의 영남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해온 선생은 19235월부터 일신고보의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으며 그 뒤, 선생은 동래 일신여고의 교무주임(1926), 진주 일신여고의 교장(1929), 협성실업의 교장(1939), 광신상업의 교장(1942) 등을 역임하는 등 교육계에 헌신했다.

그러나 8.15해방이 되자 선생은 정치계에 투신하여 1945년에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총무가 되는 것을 비롯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1946), 민주국민당 최고위원(1948), 민주당 최고위원(1955), 5대 민의원(1960), 신민당 전당대회 의장(1961)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등걸

-1980.11.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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