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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35. 3.1운동을 초교파적인 연합운동으로 이끌어간 33인 민족대표 국사(菊士) 오화영(吳華英) 목사

by yunheePathos 2018. 12. 4.

3.1운동을 초교파적인 연합운동으로 이끌어간

33인 민족대표

국사(菊士) 오화영(吳華英) 목사

 


국사(菊士) 오화영(吳華英) 목사는 187945일에 황해도 평산군 평산면 대촌리에서 오석조(吳錫潮)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고 한때는 동학난에 가담하여, 1891년에는 잠시 만주에서 망명생활을 한 적도 있다. 귀국하여 1901년부터는 구한국 정부의 우정판사(郵政判事)라는 관직에 있은 적도 있으나 2년 뒤 이를 사임하고 1911년까지 향리에서 장사도 하고 농사도 했다.

국사 선생이 기독교 신자가 되기는 향리에서 장사와 농사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리고 1918년에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제 6회로 졸업했는데, 목회를 시작하기는 이보다 6년 전인 1912년부터이며, 1916년부터 3년 간 원산에 가서 광성(光成) 소학교 부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상경하여 종교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부터 YMCA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기 시작했다. 즉 서울YMCA 종교부 위원으로서 또는 학생하령회와 각종 강연회 강사로 활약했다.

그 중의 실례 하나를 들면, 19181110일부터 15일까지인 세계 기도주간을 맞아 국사선생은 강사의 한 사람으로서 신구문명(新舊文明)의 득실(得失)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것은 3.1 독립운동을 촉발시킨 문제의 강연이기도 했다. 19193.1운동 때는 2년 반 동안 징역살이를 하고, 나와서는 목회에 종사하는 한편 수많은 민족운동에 가담했다.

1925년에 신흥우 박사 등과 함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라는 비밀정치단체를 조직하고 물산장려운동 본부의 이사 또는 이사장직을 지냈고, 1929년 광주학생 사건과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피검되었으며, 8.15해방까지는 소위 보건관찰소(保謹觀察所)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 전쟁 포로와 같은 생활을 했다.

8.15해방 뒤의 정치활동은 더욱 활발했다. 1945년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 정당통일 기성회 회장, 한중협회 회장 등을 비롯하여 46년에는 비상정치회의 및 비상국민회의 정무위원, 대한독립 총성국민회 부회장, 독립전취전국대회 회장, 조선 정치대학 기성회 회장, 민족 청년단 전국위원 등을 지냈다. 그 해 12월에는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위원, 위원 제헌국회의원 등에 당선되기도 했다. 드디어 1948년 조선정치대학 관장에 취임하여 혼란한 정치풍토를 개선하기 위한 교육운동에 투신했다가 19506.25동란 때 납북되었다.

그 뒤 대동강에 투신자살했다는 풍설도 있으나 아직까지 언제 어떻게 별세했는지는 확실히 모르는 채 있다. 납북 당시 국사 선생은 종교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는데 교인들이 피난가자는 것도 거부하고 남아있는 교인들과 생사를 같이 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한편, 국사 선생의 가장 큰 공헌은 3.1운동을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운동으로 성공시킨 데 있다고 본다. 3.1운동을 처음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각각 단독으로 하고자했다. 그러나 천도교측에서 기독교와 합심하자는 제안이 왔던 것이다. 이 제안을 최남선씨가 이승훈에게 전달하고 이 제안을 정식을 받은 이승훈 장로는 즉석에서 찬성하여 기독교측 대표자 회의에 건의했다. 이 회의에는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양전백, 이명룡 씨 등 평북지방의 대표들이 거리 관계로 전권을 이승훈 장로에게 일임하고 참석하지 못했으며 오화영, 박희도, 정춘수, 이필주, 이갑성, 김창준, 최성모 씨와 그밖에 33인 대표가 아닌 함태영, 현 순, 오기선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정춘수 씨는 천도교와 합동하는 것은 불가하다. 우리는 기독교 목사의 신분이므로 감정으로써 일을 하면 안 된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든지 경성에서 오화영, 박희도의 통지에 따르겠다고 말하고 원산으로 내려갔다.

위임을 맡은 박희도 씨 역시 한때는 반대했으나 이 문제는 중대한 문제인만큼 여러 차례 모여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우리는 이 기회에 종교와는 관계없이 국민의 자격으로 할 것이다라는 오화영 목사 등의 강력한 발언이 관철되어, 기독교 단독으로 하자던 본래의 계획이 철회됨과 아울러 1919222일 경 박희도, 이승훈, 오화영, 이갑성, 그리고 함태영, 안세환, 신흥식, 현 순 등이 모인 자리에서 극적으로 합동문제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천도교와의 합동문제는 심각한 문제였는데, 만약 이 문제가 결렬되었더라면, 3.1운동의 거국적인 민족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진실로 이 순간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이때의 국사선생의 공헌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등걸

-1981.3.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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