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38. 좌익세력에 대항하여 재일본 한국YMCA를 지켜온 김옥남(金玉南) 선생

by yunheePathos 2018. 12. 4.

좌익세력에 대항하여 재일본 한국YMCA를 지켜온

김옥남(金玉南) 선생

 


한나라의 역사에 흥성한 때와 침체한 때가 있는 것처럼 한 단체의 역사도 흥성기와 침체기가 있기 마련이다. 재일본 한국YMCA의 과거 70여년 간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몇 차례의 흥성했던 시대를 회상하며 긍지와 명예를 느끼게 된다.

 

김정식, 백남훈, 최승만, 김우현 총무 당시에 흥성기 이뤄

1906, 재일본 한국YMCA는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부총무로 있던 김정식(金貞植)씨가 일본으로 파송됨으로써 창설되었다. 창설과 함께 총무에는 김정식씨, 이사에는 조만식(曺晩植)씨 등이 되었으며 그 두 사람이 창설기의 꽃을 피웠는데 이때가 최초의 흥성기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백남훈(白南薰) 총무 당시라고 할 수 있다. 재일본 유학생의 2.8독립선언이 일어나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세 번째는 최승만(崔承晩) 총무 당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회관은 도쿄 대진재로 소실되고 없었으므로 회관을 재건하는 것이 지상명령으로 되어 있었다. 최승만 총무는 회관재건운동을 대대적으로 시작하여 1928년에 신축회관이 준공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 회관이 바로 몇 해 전까지 간다구(神田區)에 자리잡고 있던 현대식 3층 양옥이며, 이 회관에서 수많은 애국자들이 배출되었다.

네 번째 흥성기는 8.15해방 이후로 잡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일본 한국YMCA도 서울YMCA와 마찬가지로 1938년 이후 거의 20년 간 전쟁과 혼란 통에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제 4대 윤 근(尹 槿) 총무와 제 5대 이정렬(李楨烈) 총무 당시는 대동아 전쟁과 일본 패전이후의 빈곤과 혼란을 겪는 통에 별다른 사업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을 19539월에 김우현(金禹鉉) 목사가 제 6대 총무로 취임해 오면서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서서히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이사장이 김옥남 선생이다.

 

선교사의 주선으로 신교육을 받게된 열렬한 애국청년 김옥남 선생

김옥남 선생은 1901년 전남 강진(康津) 태생으로 집이 몹시 가난하여 학교에도 못 갈 처지였는데, 남장로교 선교사 카밍 씨의 주선으로 목표 영흥(永興) 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는 동시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전주 신흥(新興) 중학교에 전학하여 공부를 했는데, 이 때는 이미 열렬한 애국청년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김옥남 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23세가 되던 1923년쯤인가 싶다. 도쿄 대진재가 있던 해인데, 그는 도쿄에 가서 몇 해 후에 법정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고학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공부를 하자니까 공부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고생 끝에 공부를 마친 후 일본에 머물러 장사를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김옥당(金玉堂)이라는 조그마한 사진기구상을 차렸고 그 뒤 성게(우니, 雲謄) 장사를 했다. 우니 장사는 바다에서 나는 성게를 가공해서 파는 장사였으므로 그 제조 과정에서부터 판매까지는 여간 힘이 드는 장사가 아니었다. 나중에는 마루낑(丸金) 주식회사로 확장시켜 큰돈을 벌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말기 전쟁으로 인해 폭격이 심해지자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서울 돈암동에다 문화주택을 마련해 살면서 서울YMCA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선생은 일본에 있을 때부터 YMCA 교회에서 예배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으랴?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뿐, 밀어닥치는 좌익세력과 정계혼란 때문에 차츰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 두고 온 집과 회사 건물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몹시 궁금하여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게 되었다.

건너가보니 집과 회사 건물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조차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김옥남 선생은 용기를 내어 사업재건에 착수했다. 우선 파괴된 집터 위에다 움막을 치고 다시 우니 장사를 시작했다. 겨우 자전거 한 대와 리어카 한 대를 장만해 가지고 움막 속에서 만든 우니를 이집저집으로 배달하면서 장사를 계속했다. 그 결과 공장도 크게 짓고 돈도 많이 벌었다.

당시 일본은 식량이 매우 부족하여 우니가 불이 나듯 팔렸으며, 일본 정부의 농림성(農林省) 당국은 김옥남 씨가 식량난이 극심한 때에 공헌이 많다는 이유로 그에게 표창장을 주기까지 했다.

 

일본정보의 명령으로 회관을 20만엔에 팔려고 계약을 체결

이 무렵에 한국에서 이대위(李大偉) 씨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8.15해방이 되자 미 군정하의 노동부장으로 있었는데 업무차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렀다가 계속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맥아더 사령관 치하에 있었던 때라 그 밑에서 일본사람들은 꼼짝못하고 있었던 반면, 해방된 교포사회는 자못 활기를 띄고 있었다. 더욱이 좌익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재일본 한국YMCA의 형편은 엉망이었다. 주인은 완전히 바뀌어 좌익청년들이 회관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8.15해방 직전에 재일본 한국YMCA 간부들은 일본정부의 명령으로 그 회관을 흥생회(興生會)라는 단체에다 20만엔에 팔기로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을 하게되면서 이 계약은 자연히 취소가 되었으나, 이번에는 좌익청년들에게 점령을 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좌익청년들에게 점령당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총무로 있던 윤근 씨 때문이었다. 그는 1939년부터 총무직에 있었는데 8.15해방 후 여운형(呂運亨) 씨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의 도쿄 지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재일본 한국YMCA 회관에다 건준(建準) 도쿄지부 본부사무실을 두는 동시에 그 회관내의 24개의 방을 모조리 자기 부하들에게 숙소로 제공했던 것이다.

 

회관 소유권을 둘러싼 좌익세력과의 투쟁

이러한 때에 이대위 씨가 동경에 갔으나 이미 윤근 씨는 완전 공산당원이 되어 북한으로 쫓겨나게 되고 신임총무 이정렬 씨는 겨우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매일 좌익청년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 싸움은 단순한 방싸움이 아니라 소유권 쟁탈전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 이대위 씨가 나서게 된 것인데, 그는 본래 한국YMCA의 전성기 때 학생부간사로 있었으므로 이러한 사태수습에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그는 잠시 이사장으로 있다가 곧 김옥남 씨에게 이사장직을 넘겨주었다. 이때부터 재일본 한국YMCA의 재건운동은 본격적으로 전향되기 시작했다.

즉 이 두 사람은 의논한 끝에 무엇보다 먼저 유능한 총무를 맞아들이기로 하고 일정 때 공로가 많은 최승만 씨를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최승만 씨는 자유당 정권 하에 제주도지사로 임명되어 대신 김우현 목사를 교섭하게 되었다.

 

김옥남 이사장은 재정, 김우현 총무는 지혜로써 재건운동 본격화

김우현 목사는 대한 YMCA 연맹 이사장으로 있던 양주삼(梁柱三) 목사가 납북되는 바람에 부산 피난당시에는 이사장으로 있었다. 김우현 목사는 19539월에 재일본 한국YMCA6대 총무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사장 김옥남 선생과 총무 김우현 목사는 힘을 합하여 해방 후에 엉망이 되었던 재일본 한국Y 재건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때 YMCA 국제위원회는 재일본 한국YMCA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YMCA 재건의 사명을 띄고 일본에 와있던 해그(Haag) 협동총무가 재일본 한국Y는 아주 가망이 없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이때 재일본 한국Y에 필요한 재정은 김옥남 이사장이, 지혜는 김우현 총무가 제공하여 힘을 합하였다. 우선 파괴된 회관부터 수리해야할텐데 좌익청년들이 방을 전부 차지하고 있어 수리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서 수리하는 기간만은 방열쇠를 전부 받아낼 수 있었다. 이때 연회비같은 모든 비용은 물론 김옥남 이사장이 전부 담당했다. 더욱이 3개월 간 좌익청년들이 나가있는 동안 하숙비조로 1인당 18천 엔씩을 주기도 했다.

 

캐나다Y와 아시아재단에서도 회관재건 위해 원조

이것을 본 해그 씨는 회심을 하고 캐나다Y로부터 5천 달러의 기부를 받게 하였고, 사이또 씨는 아시아 재단(Asia Foundation)으로부터 7천 달러의 원조를 받아오게 되어 회관을 수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좌익청년들은 슬금슬금 나가기 시작했으며, 김옥남 이사장은 명도비조로 많은 돈을 쓰게 됐다. 몇 해 전 이 회관을 헐고 현재의 새 회관을 시작할 때까지 도돔보라는 교포가 방 하나를 차지하여 버티고 있어 골치를 앓았었는데, 만약 김옥남 씨의 이러한 헌식적인 봉사가 없었던들 좌익청년들은 그때까지 계속 남아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 소유권은 영영 그들의 것이 되고 말았을는지 모른다.

그는 무려 15년 간이나 이사장직으로 있으면서 재일본 한국Y를 지켜오다가 196688일에 척추암으로 일본 도쿄에서 세상을 떠났다.

등걸

-1981.6.1. 청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