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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끄적거림/원고

한국YMCA를 만든 선교사들 ㉻

by yunheePathos 2014. 3. 18.

한국YMCA를 만든 선교사들 ㉻


YMCA를 만든 선교사들 21.pdf


J. R. 모트(John Raleigh Mott). ‘현대 판 바울’로 불리는 세계YMCA와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구자이자 위대한 평신도이다. 국제적 시야를 갖춘 민족운동체로서 한국YMCA운동이 뿌리를 내리는데 있어 J. 모트의 기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한국 청년들의 Y 설립 청원운동(1899년)에 응답하여 1900년 라이언(D. W. Lyon)을 조사관으로 파견하였는가 하면 1901년 질레트(P. L. Gillett)를 한국Y 조직 간사로 파송하기도 했다. 1911년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Y 지도자들을 투옥시키는 한편 유신회(維新會)라는 어용단체를 조직(1913년)하여 YMCA를 점령하고 해산을 시도한다. 이에 모트는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여 사건 수습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창립(1914년)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오늘날의 한국YMCA전국연맹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Y는 일본에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었으며 세계YMCA연맹에 독자적으로 가맹(1924년)하게 된다.


J. 모트는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의 발전에도 절대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모트는 세계 최초의 에큐메니컬 선교사 대회인 영국 에딘버러 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년)를 이끈 장본인이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에 두 번 방문하게 된다.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1907년 2월에는 6천여 명의 관중 앞에서 강연(통역 윤치호)을 하기도 했으며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하고는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결과로 에딘버러 대회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참가자인 윤치호를 포함하여 질레트(P. L. Gillett), 마펫(S. A. Moffett), 언더우드(H. G. Underwood) 등 15명이 한국대표로 참여했다. 1924년 한국NCC, 즉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창설에도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한국NCC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1925년과 1929년에 한국을 직접 방문하게 된다. 1925년 전국교계지도자대회(의장 윤치호), 1928년 IMC 세계대회, 즉 예루살렘선교대회(YMCA 신흥우 총무가 한국교회 대표단장) 보고대회가 열렸던 1929년에 직접 참석했던 것이다. J. 모트는 1912년부터 1942년까지는 국제선교협의회(Missionary International Council)의 회장, 1926년부터 1937년까지는 세계YMCA연맹의 회장을 겸하며 세계에큐메니컬운동과 YMCA운동의 지도자로 역할하고 있었다.


J. 모트는 학원 선교를 감당해 오며 에큐메니컬운동 지도자를 육성해 온 한국 학생기독교운동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는 젊은 시절의 학생Y운동 경험을 토대로 세계기독학생회총연맹(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창립(1895년)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는가 하면, 1915년부터 1928년까지는 미국 해외 선교운동에 붐을 일으킨 학생자원봉사단(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회장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경험은 1922년 중국 북경에서 있었던 WSCF 세계대회에 한국YMCA의 대표로 이상재, 신흥우, 이대위, 김활란, 김필례 등을 참석하게 하고 한국YMCA를 WSCF에 가입하게 한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김활란, 김필례 등에 의해 그 해에 한국YWCA가 창설되게 된다.


한국Y운동의 시작과 연합회 창설에 있어 브락만(Brockman) 형제의 역할도 대단히 중요하다. 형 F. S. 브락만(F. S. Brockman)은 1903년 3월 18일, 한국YMCA 창설 준비회의의 강사로 초청되어 각 국 공사와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YMCA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그 결과로 한국YMCA의 창설 준비와 함께 Y회관 건축비 모금운동까지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1901년부터 중국YMCA 제 2대 총무로, 15년 간 봉사했던 세계적인 Y지도자로 윤치호와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시절의 동창생이었다.


그의 동생 F. M. Brockman은 학생Y 조직과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현 한국Y전국연맹) 창립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는 당시 총무였던 질레트(P. L. Gillett)와 함께 서울시내 각 미션스쿨 안에 학생Y를 조직하고 1910년 6월 진관사에서 제1회 학생Y 하령회를 개최한다. 그는‘이 학생 하령회를 계기로 하여 각 학교에 학생Y가 조직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학생Y 하령회가 조직적인 학생Y 운동의 첫 출발이었던 것이다. 학생Y는 1911년 제2차 학생Y 하령회에 참여했던 학생들(선천 신성중학교, 평양 숭실중학, 서울 경신중학교 등)이 105인 사건으로 전부 체포되었거나 주요 지도자(윤치호, 당시 학생하령회 회장)들이 구속되는 탄압을 받았지만, 연합회 창립과 3.1운동의 주역이 됐다. 실제 연합회는 9개의 학생Y(배재학교, 경신학교, 세브란스의전, 한영서원(현 송도고교), 전주 신흥학교, 군산 영명학교, 광주 숭일학교, 기청학관, 재일본한국Y)와 1개 시청년회(조선중앙Y(현 서울Y))로 결성된다. F. M. Brockman은 1905년부터 1929년까지 23년간 한국Y에 봉사하고 병 치료를 위해 귀국하게 된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질레트, 헐버트, 게일에 이어 존 모트, 브락만 형제…

 이처럼 한국Y운동은 많은 선교사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만들어 졌고, 국제적인 지평 안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100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YMCA는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며 민족운동체에서 생명과 평화, 정의를 위해 일하는 지구시민운동체로, 하나님의 선교기관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윤희 사무국장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 국민일보 3월 20일자. 


국민일보 기사 전문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8151296&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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