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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끄적거림/원고

시민사회운동의 원형이자 에큐메니컬운동의 전형, 다시 보는 평양YMCA

by yunheePathos 2014. 4. 17.

시민사회운동의 원형이자 에큐메니컬운동의 전형,

다시 보는 평양YMCA

 

* 2014년 4월 17일(목) 자, 국민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평양Y.pdf


 

이윤희 사무국장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한국의 예루살렘’서 최초의 시민 운동 펼쳐


한국YMCA전국연맹 100주년과 더불어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평양’을 재조명해볼 만하다. 기독교사적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사에서 평양이 지닌 의미는 특별하다. 특히 평양Y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일제 치하의 기독교운동은 갈등과 대립, 반목과 분열로 방황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와 시민사회에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표본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한반도 서북 지방의 중심지역인 평양은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다. 기독교의 정신적 중심지나 다름없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을 거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일제 치하 때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지 또한 평양이었다. 당시 나라 잃은 민중들의 갈급한 영성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대부흥운동과 신사참배반대 운동의 열정으로 뿜어져 나왔다. 나아가 교단과 교파를 떠나 서로 협력하며 ‘민(民)의 자치’라는 시민사회의 원형이자 터전이 된 곳, 그곳이 바로 평양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활동의 정점에는 평양Y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양Y는 1921년 남산현교회에서 창립됐다. 일제 식민지라는 암흑 속에 갇혀 지내던 청년들이 속속 모여 꾸려진 평양Y에서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현금 상공업이 발달한 선진국들도 저마다 모두 보호무역주의를 행하는데, 우리는 나라가 없어 법령이나 정책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 자위상 불가불 민간의 공덕심과 공익심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평양Y가 주도한 조선물산장려회는 창립취지서를 통해 ‘민간의 공덕심과 공익심’을 호소하고 있다. 나라 잃은 민중들의 자각과 힘을 바탕으로, 민의 자치와 협력으로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른바 ‘조선인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민간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펼치는 비폭력 독립운동에 비견할 만하다.

 

그들은 조선물산장려회 궐기문에서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고 노래했다.

 

당시 평양Y의 물산장려운동은 평양 시내의 유명한 제조업체와 상점은 물론 사회단체들까지 모두 참여했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 선전대의 시가행렬은 마치 조선시대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벌였던 돌팔매질 싸움(석전·石戰)을 연상케 할 정도로 위용을 떨쳤다.

 

조선물산장려회와 평양Y는 일심동체나 다름없었다. 평양Y 회관에 조산물산장려회의 간판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평양Y 초대 총무였던 조만식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을 겸임했고 창립이사 12명 중 9명이 평양Y의 임원이었다. 물산장려회는 또 평양의 기독교계는 물론 상공업계와 교육계, 동우구락부, 대한국민회 등 민족운동 및 항일비밀결사 단체의 핵심 인사들이 망라된 인재의 보고였다.

 

무엇보다도 평양Y는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전형으로 평가할 만하다.

1921년 평양고아원을 설립했다. 평양에서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된 최초의 사회사업으로 꼽힌다. 1923년에는 조선 최초로 전국단위 축구대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평양실업저금조합을 조직, ‘대동강’이라는 상표를 붙인 잉크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민중문화의 선구', '최초의 가장 큰 민중운동'이라 불렸던 조선민립대학기성회(1923)을 창립하는가 하면 평양상공협회(1928), 농촌협동조합운동(1929)을 잇따라 조직하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회당인 백선행기념관(1929)과 인정도서관(1931)을 민간의 모금으로 건립하기도 했다.

 

평양Y는 ‘무관(無冠)의 지방정부’나 마찬가지였다. 지역사회 현안은 물론 개인 대소사, 각종 민원 상담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동네 사랑방 같았다. 평양Y의 이같은 활동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에큐메니컬 정신을 구현한 평양 교계의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교회를 통해 민중들의 영적 각성과 치유를 감당하는 한편 평양Y를 통해서는 민의 경제적 주권과 자치를 만들어가는 일에 매진했다. 평양Y와 기독교운동은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도 여전히 ‘조선인의 평양’이라는 활력(活力)을 꿋꿋하게 지켜냈다. 내 교회, 내 교단이 아닌 평양 교계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 함께 빚어낸 열매로 평양Y 없이는 불가능했다.

 

평양Y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선의 간디’ 조만식이다. 함석헌 선생은 그에 대해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몸소 보임으로써 민중의 신임을 얻었던 말없는 웅변가”라고. 조만식의 실천적인 삶과 모범이 없었다면 과연 평양Y의 물산장려운동은 가능했을까.

 

일제 치하 평양Y는 기독교와 더불어 시민사회운동과 에큐메니컬 운동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본(本)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실질적 민주주의’와 ‘자치·협동의 지역 공동체 회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앞날을 모색하고 있는 한국Y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동시에 평양Y는 개교회주의로 전락해 에큐메니컬 정신이 실종되어버린 한국교회에도 새로운 영적 도전으로 다가온다. 교권과 대형교회 중심의 성장주의에 빠져있는 한국교회, 교단과 교파에 갇혀 있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지금 평양Y의 역사를 되짚어볼 때다. 


국민일보 기사 보기(2014.4.17)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0&sCode=0000&arcid=0008241019&code=231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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