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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과 한반도 평화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한반도의 눈물은 하나다. 생명과 정의가 만나야 한다.

by yunheePathos 2015. 8. 8.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한반도의 눈물은 하나입니다.
명과 정의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생명과 정의가 만나야 합니다.


지난 달 27일 짐바브의 국민사자 세실이 인간의 재미로 목이 잘린채 발견되어 전 세계적인 분노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자의 죽음에 10일이 넘도록 분노하며 항의 시위에 나섰고 UN 등 국제기구는 밀렵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부산을 떨고 있습니다. 항공사 마저 밀렵품과 밀렵꾼들에 대한 탑승 거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생명의 세상입니다.



그 달 31일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 불법 점령촌 사람들의 방화테러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18개월 난 어린 아이(Ali Dawabsheh알리 다와브샤)가 불에 타 죽는 슬픈 사건이 보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방화테러에 의해 죽은 18개월 어린 아이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다. 32세의 아버지(Saad Dawabsheh)도 온 몸의 80%에 2도 이상의 화상을 입고 고통에 시달리다 오늘 병원(Soroka hospital)에서 사망했다고 알자지라가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Riham)와 4살된 오빠(Ahmad )도 위독한 상태로 병원(Tel Hashomer hospital)에 있다는 소식입니다.

'사자 목숨 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어린 아이의 목숨도 중요하다', '거리에 나갈 때 사자 모양의 옷을 걸치고 다니면 우리의 죽음에 사람들은 그나마 슬퍼해 줄 것이다'라는 너무나 어이없는 한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사자의 죽음에 슬퍼하며 수선을 떨면서도 방화테러에 의해 힘없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일가족의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미국과 국제기구.

뭐라 말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부정의한 세상입니다.


한국 시민사회의 눈을 봅니다.

팔레스타인 인종청소의 현장에서 들리는 신음은 우리 한국사회에 너무나 익숙한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신음이었고 한국 전쟁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흘린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단두대에서, 거리에서 죽어간 우리 형 누나의 슬픔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어머니들의 애끓는 고통은 우리 민가협 어머니들의 마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35년, 한국전쟁, 남북의 분단과 갈등, 이산가족의 고통,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난의 역사.

70년이 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한국 시민사회는 슬퍼하고 있습니다. 해방 70년을 맞아 세계 시민사회에 한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눈물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이 너무나 멀기에, 이슬람은 나쁘고 테러집단이라는 종교적 편견으로, 테러로 포장된 서구 이미지에 갇힌 체 우리 역사와 그리도 닮은 팔레스타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와 상관없다 생각될 정도로 그토록 멀고 먼 팔레스타인이 우리 옆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팔레스타인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될 때 남북한 평화와 통일에 대한 세계 시민사회의 지지와 응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닦는 일은 분단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반도의 눈물을 멈추게하는 일입니다.

남북의 평화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닦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살리는 일이고 통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아름다운 생명의 세상과 정의가 만나는 일일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 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면서도 사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통곡하며 분노하는 거짓 평화의 위선자 대열에서 한국 시민사회가 벗어나는 길일 것입니다.


Palestinian baby's father also dies from settler attack Sa'ad Dawabsheh, the father of Ali, dies from severe 

공주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침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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