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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희망 코스프레의 절망 사회'에서 '시민으로 살아남기'

by yunheePathos 2015. 9. 15.

'시민으로 살아남는 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사회인 것 같습니다. 시민으로 살아남기 위한 노력까지 필요한 사회라니.. 그 방법이 무엇인지 묻고 알고 싶습니다. 

힘들 때 옆에 있는 친구의 손을 잡을 줄 아는 한결같은 시민이 되는 것, 각 자의 커뮤니티 안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길이며 커뮤니티들의 씨줄과 날줄의 그물망을 엮어가는 일. 그것이 '희망 코스프레의 절망사회'에서 '시민으로 살아남는 것'이며 우리 아이들에게 시민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물려줄 수 있는 지금의 시민이 해야할 일일 것입니다.  




물신화된 사회의 비극

- 미래의 담보물이 된 현재유보된 삶과 행복!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랑과 정의', '생명과 평화', '나눔과 돌봄' 그리고 '협동과 상생' 등 어찌보면 '당연(보편)'하다 여겨지는 것들에 눈을 감고, 저 언덕 너머 그 무엇인가 고귀한 '진리'가 있지 않을까 찾아 헤매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수 천년동안 현세의 권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에서 눈 돌리기'라는 관념 조작 놀이 지배 방식의 결과일지 모르겠다. 

이처럼 '행복'을 잡기 위한 인간의 끊임없는 경주는 우리의 눈을 지금 여기보다 더 높고 더 멀리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고'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소위 '야망'의 시절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너무나 많이 이 말을 듣고 살았고 청소년들을 길들이는데 금과옥조처럼 반복해 사용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빛과 그림자의 정취와 향기에 취할 여유나, 옆과 뒤를 돌아볼 수 있는 넉넉함마저도 쉬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에 눈감고 유보할 것을 꾾임없이 우리에게 강요한다. 

수 천년 우리 사회가 간직해온 대동사회의 꿈은 사라지고 근대 자본이 만든 철저히 개인화된 행복의 개념은 물적 향유의 크기로 대체된다. 이제 '배고픈 돼지'에서 '배부른 돼지'가 되는 개인의 행복 찾기가 전부인 세상이다. 우리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피곤한 일상인지, 자살과 생존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그 삶을 성장 과정이라 말하며 견디라 말하는 인간들이 어른임이 부끄럽다. 노인빈곤과 자살율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홍당무에 반한 망아지.

- 홍당무를 쫒는 망아지의 삶

참 피곤한 삶이다. 하루 하루 참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은데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고 내일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살아가며 그 나이에 맞는 정도의 삶이 주어지고 자본이 만든 유보된 행복을 '당연의 질서'로 받아들인다. 사회(조직)는 사람들을 끊임없는 성공신화의 이데올로기로 길들이고,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쟁의 종착역으로 사람들을 내몬다. 인간 스스로를 말 잘듣는 '말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만다. 

한국 사회의 가족은 어느덧 책임이라는 무게가 되고 새로운 꿈이 영글고 지지되는 공간이기보다는 어깨를 짓누르며 서로의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 적응 합숙소'가 된다. 가족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강조해온 한국적 문법과 인간 복지와 안전의 책임을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 떠 넘기고자 하는 자본의 이해가 맞물린 끔직한 결과이다. 빈곤한 가정의 노인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방치된 존재가 된다. '배부른 돼지'들에 의해 청년들은 결혼도 포기한 사회적 패자(Loser)로 비하되고 충고의 대상이 된다. 인간 복지와 안전의 책임은 가족에 대한 한국적 문법과 구분되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강요하고 있는 말들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라는 생각때문일 것이다. 한국 성인들이 돌아가고 싶은 연령대가 고등학생 시절이라고 한다. 생각만해도 끔찍하기만 할 것 같은 살인적인 주어진 학습의 시간으로 왜 돌아가려할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고 싶어서다." . 이런 한국 사회에서 시민들의 삶이 행복할 수 있는가? 

2014년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조사대상 145개국 중 117위라고 한다.(미국 갤럽 조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홍당무에 반한 망아지의 삶을 멈추고 싶어 하지만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나락을 경험하게 된다. 주어진 당연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철저히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홀로 떠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좌우가 막힌채 눈 앞의 홍당무만을 향해 달리는 망아지가 상상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무례한 생각일까?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 

- 끝 모를 법인격의 자유와 몰락하는 개인.

'배부른 돼지', 공공연하게 이를 말하고 선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관계나 사회 작동 방식은 '배부른 돼지'의 욕망에 '배고픈 소크라테스' 코스프레다.

한국사회의 자본과 권력은 아주 공공연히 사람들의 개인화된 욕망을 자극하며 법인격으로서의 자본의 자유와 지배 그리고 이에 철저히 복종하며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배부른 돼지'(정치•경제•교육언론 등)들만의 천국을 향해 폭주하고 있다. 법인격으로서의 자본(기업)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자유는 끝 모른채 확대되고 개인으로서 인간의 자유는 몰락하고 있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할 것을 강요당하는 아르바이트, 시간제 노동자, 비정규직은 늘어만 가고 언제든 해고의 위협 앞에 신음하는 노동의 현실에서 공론의 장인 시민사회는 침묵을 강요당한다. 대다수의 청년과 노동자는 점차 경제난민이 되어가고 있다. 정치와 언론은 '배부른 돼지'들에 의해 이미 과대 포장되어 표현되고 있다. 이 같은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개인의 자유가 아닌 법인격(기업, 우리사회에서는 소수 독점 재벌)의 자유만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삶에 누가 흔쾌히 동의할 것이며 이와 같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겠는가? 합리적 경제행위 주체라고 말해지는 개인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경쟁의 노예로 만들어가는 홍당무에 반한 망아지가 될 수 밖에 없다.

공공의 가치와 윤리보다 자신의 아파트 값 상승을 선택하는 사회, 지금 당장의 호구지책을 위해 역사도, 책임도, 아이들의 미래마저도 저버리는 사회. 사기꾼이든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든 누구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것만 같은 사람이면 용인되는 몰역사와 비윤리의 사회, 그 사회에 미래와 현재는 어디에 있고 어린 아이들에게 밝혀줄 희망은 어디에 있겠는가? '배부른 돼지'들이 목놓아 말하는 '청년'은 절망사회를 가리기 위한 희망 코스프레의 대표적인 가면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9.17. 경향신문)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 상생의 대동사회를 선택한 비주류 소수자의 삶.


우리는 이와 같은 주어진 삶에 회의하며 미래와 지금, 이웃과 나, 그리고 우주 만물의 생명들과 온전한 관계 맺기를 기대하며 소수자, 비주류의 삶을 선택한다. 역사, 자치, 노동, 정의, 평화, 생명, 사랑, 관계 등등의 말들을 배우며 지금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선택권을 높이고, 이웃과 자연과 보다 나은 삶의 질을 나누고 향유할 수 있는 사회와 관계를 소망한다. 또한 이런 선택의 배경에는 세상의 변화가 주류 스스로의 혁신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 정신과 함께하는 비주류, 소수의 발걸음으로 부터 시작됐다는 나름의 충만한 역사적 사명감이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념에 찬 비전의 삶이 그리 만만하거나 녹녹치 않은 것도 현실이다. 자본 안의 삶에서 자본 외적 삶의 질서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모순적인 현실일 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변화와 함께 자신과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새로운 영성과 질서 또한 요청받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동의 토대로 갖고 있는 인간 중심의 과학기술과 생산력주의에 의한 현대 문명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은 과거와 같이 상대에게서만 문제를 찾거나 제도로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중층화되고 지구화된 세상에서 우주의 배꼽을 찾아 나를 성찰하는 일이 그리 만만하겠는가? 

또한 서구철학의 평등과 정의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재화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평등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그것을 정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평등이 곧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의 문제를 평등의 지평에서만 인식해왔던 경향이 있다. 협동조합운동 등에서 찾아볼 수 있듯 자본 앞에서의 민주주의와 평등, 이것이 자본에 대한 대안질서로 실현해야할 제1과제로 제안되고 있다. 기회균등도 크게 다르지 않은 질문이다. 평등은 정의의 필요조건일 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의는 가장 아프고 약한 마디에서 생각되어야 할 문제이다. 정의를 다시 세워야 평화의 상생질서와 대동사회를 만날 수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존재!


보다 건강한 한국사회와 개인의 삶을 꿈꾸며 비주류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이들 때문에 느린 듯 어제와 다른 오늘의 한국사회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 이런 삶은 뭔가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자율과 자발성으로 자치하며 수고하는 이들에 의해 아름답게 피어나는 희망이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흔들리는 삶을 말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회자되는 것이 이들의 경제적 빈곤이다. 사실 아주 부족하기만 한 물적 조건에서 비전과 꿈만으로 희생과 헌신만을 요구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실제 남성은 결혼을 앞두고, 여성은 출산을 앞두고 다른 진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초기 활동가들의 40%가 3년 내외에서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물론 다른 진로를 찾아가는 이유는 이외에도 다양하게 많다. 활동가들이 그만두는 이유를 경제적인 문제로만 찾는 것은 표피적인 분석일 것이다. 비전의 문제, 조직문화, 기대 역할, 진로 등등 더 심각하고 중요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어느덧 30대 말 40대 초중반의 활동가들은 온갖 명분으로 주저없이 다른 길을 찾아간다.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철학과 담론의 토론 부재는 새로이 시작하고자 하는 청년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평생 그 길에 있었던 이들의 문제다. 시민사회운동이 다른 길을 찾는 자양분, 통로일 뿐이라면 누가 궂은 날씨에 비를 맞으며 해가 뜰 날을 준비하겠는가? 이것은 다양한 진로를 탐색하고 협력하며 리더십을 풍부히 하고자 하는 노력을 폄훼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비취는 속살, 즉 담론이 사라진 시민사회운동과 철학의 결여가 핵심 문제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프로그램과 정책 아이디어 그리고 경영, 그래서 프로그램 기술자와 소위 복사 전문가만이 필요한 시민사회운동.(취사 선택할 수 있는 관점과 철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수 도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그리 신통치않아 보인다) 당장 눈앞의 정책(Advocacy, Issue fighting)이나 손에 잡히는 복지(기관, 기업, 재단을 포함해 소위 국제협력운동까지)는 과포장되고 함께하는 사람은 후원자로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재미없는 시민사회운동. 누가 이 안에서 꿈과 비전을 찾고 뜨거운 열망으로 함께하고자 하겠는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심각성은 상처입은 자존감에 있다. 새로운 문명적 성찰과 담론의 부재,  주권의 자치운동, 정당과 기업, 정부 등과의 역할 관계 정립 등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운동론에 대한 철학의 부재는 자존감 상실의 제 1 원인일 것이다. 또한 '왜 지금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에 대한 자기 소명과 진로에 대한 막연함, 그리고 다양하리만치 많아(?) 보이는 삶의 고속도로의 온갖 유혹들, 웬지 나잇살이나 먹고도 시민사회운동영역에 남아 있으면 패자(Looser)가 된 듯한 느낌과 분분위기 등의 내적 요인도 커 보인다. 



이와 함께 시민사회운동가는 말만 많은 비전문가라는 인식(사실 이런 분위기를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만든 측면이 있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와 전문가그룹의 역할 이해 부재와 천박함은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큰 결점이기도 하다), 현장에서의 보이지 않는 몸 고생과 마음 앓이에 대한 존중의 결여(무슨 선머슴 취급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등....    

어느 시인의 말씀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2000년도 총선시민연대 이후 지금까지 시민사회단체와 활동가들의 역할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존재 이유와 방식, 역할에 대한 이해부터 40~50대 소위, 시민사회운동의 1-2세대들의 조급함과 왜곡된 진로까지 이제 시민사회운동 단체는 참 재미없는 곳이 되었다. 

단체도, 정당도, 시민사회 그 어디도 뿌리와 토양에는 관심없고 오로지 열매 맺기에만 급급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열매가 없으면 다른 열매를 훔쳐서라도 당장의 끼니를 떼우고 있는 허약한 집단이 된 것은 아닌지, 사회 변화에 어떤 영향과 긍정성을 갖는지,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으로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지 돌아봐야할 시점이다. 대답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사회 변화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보다 '내 조직', '내 삶'이 더욱 중요해졌는지도 모른다. 

물론 적은 재원과 인력, 열악하고 부족하기만 조건에서 하루 하루 또 다른 내일을 위해 수고하며 그 짐을 스스로 메고 길을 찾아 가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많다. 감사하기만 하다. 다만 '배부른 돼지'의 밥그릇에 한 발을 담근채 '배고픈 소크라테스' 코스프레를 경계하고 또 경계할 뿐이다. 지금을 유보한 채 미래(비전)만을 강조하거나, 거꾸로 미래가 없는 현실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극과 극이 통하듯 둘 다 피폐화된 인간을 만들어내는 일이다.(참고 : 시민사회 리더십 의 위기, YMCA운동은 원이 될 것입니다.)



'절망의 사회'에서 '시민으로 살아남기',

중국의 노신은 '청년이 서야 나라가 산다'고 말한 바 있고,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말한 바 있다. 참으로 지당하고 백번 천번 확인해야 할 이야기다. '청년'은 이 사회의 '뿌리'이며 '생각하는 백성'은 이 나라의 '토양'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깊은 관심과 책임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뿌리와 토양을 소중히 가꾸면서 그 결과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배부른 돼지'들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이들도 결과에만 관심이 큰 듯하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자기들끼리의 리그에서 벌이는 전투가 자못 심각하다. 
 
'시민으로 살아남는 것' 조차도 쉽지 않은 사회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시간제 노동 등 경제난민이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확대되어 간다. 연애도, 결혼도, 주택도, 아이도 포기해야 한다는 웃지 못할 소리가 높은 사회에서 시민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실 이런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는 사회가 더 놀라운 일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존중감과 기본적인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받으며 우리 아이들과 청년들이 아무 걱정없이 교육받고 인생의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는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한 사회라면 도대체 경제성장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아이들에게 무한대의 탐욕과 경쟁의 대열에서 한치 어긋남 없이 '홍당무에 반한 망아지'와 같이 살아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아이들의 삶이 존중되며 다양한 가능성과 도전을 허용하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내 아이들에게 경쟁의 칼을 줄 것인지, 상생과 평화의 손을 줄 것인지 결정은 '내가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내 아이에게 어떤 삶을 줄 것인가? 나의 몫이다.  



호미질로 모이는 한결같은 시민들, 
시민들의 작은 모임들을 만들자!

정부도, 정당도, 시민사회단체도 이제는 부족하기만 하다. Advocacy나 대리인만으로는 안된다. 시민 스스로의 자치하는 힘이 조직되고 언제든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을 대의제에 파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생활인들의 작은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연결되어야 하며 이들 생활인들에 의한 거부가 구체화되어야 한다. 작고 강한 모임들이 우리 생활 안에 있어야 한다.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되어서는 안되며 그럴 수록 더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큰 놈하나 잘 키워 될 문제가 아니다. 작지만 강한 조직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쟁기질 하는 근육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호미질을 할 수 있는 작지만 성실한 일꾼이 지금 필요한 시민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활인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시민이 되어야 한다. 자본이 유혹하는 욕망과 탐욕의 사다리를 걷어내고 협동과 연대의 시민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 집에서, 우리 마을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치의 힘을 경험하고 모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청년이 서야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가치와 비전, 목표하는 사업(브랜드)이 분명한 모임,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웃의 자원을 충분히 동원할 수 있는 모임.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쉽고 편안한 그러나 지속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가 보자. 

힘들 때 옆에 있는 친구의 손을 잡을 줄 아는 한결같은 시민이 되는 것, 각 자의 커뮤니티 안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길이며 커뮤니티들의 씨줄과 날줄의 그물망을 엮어 가는 일. 그것이 '희망 코스프레의 절망사회'에서 '시민으로 살아남는 것'이며 우리 아이들에게 시민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물려줄 수 있는 지금의 시민이 해야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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