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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2

불편함에 당당하지 못한 나의 욕망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그 어떤 십자가? 모든 것을 버려도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직도 버릴 수 없는 물음인 듯 하다. 삶으로 살았던 인생의 선배들이 던졌던 질문이 지금까지 30년, 앞으로의 남은 시간, 유일한 질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멍청하다.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개인의 욕망에서 벗어나 삶을 지켜왔고 지켜가고 있는 선후배들이 있는데. 아직도 나는 나 홀로의 욕망에 사로잡혀 불편함에 당당하지 못한채 세상에 대한 나의 욕망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그 어떤 십자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가볍게 살아가자. 제국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예수의 땅과 이곳에서 왜 평화가 절실한지 잠깐이라도 취했던 그것으로 남은 시간 마무리를 해보자. 내 질문과 답은 제국과 자치권력이 만드는 평화, 세상의 힘있는 자들의 것이 아닌.. 2020. 7. 16.
죽음을 객관화시키지 않은체 상징으로 희화화시키는 이들이 솔직히 두렵다. 지식의 양이 아닌 가치를 대하는 태도와 종시를 견디는 힘, 그리고 이를 위한 지금의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가 중요함을 지식인들은 종종 잊는 듯하다. 비평자들과 논평자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내가 무식해서 그런지 참 쓸데없다. 울림도 없는 것들을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그리 매일 떠들어대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탐욕과 지배, 패권은 제국과 자본만의 논리가 아니라 어느 덧 그들의 '선한 뜻을 만들어가는 진정성'(아직은 그들을 존중하기에) 있는 삶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할 때인 듯하다. 삶으로 노동과 청년, 여성을 말했던 이들, 극우보수와 꼰대를 비판했던 그들이 어느덧 시나브로 중심을 상실한 정체불명의 꼰대가 되어 '유치하다', '가르쳐야 한다'는 등 지금의 청년과 여성을 말한는 이들이 .. 2020.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