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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

한국YMCA운동의 역사적 이해

by yunheePathos 2017. 7. 26.

한국YMCA운동의 역사적 이해

 

* 장규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 2007년도 간사학교 강의록

 

한국YMCA운동의 역사적 이해(장규식).hwp

1. YMCA 출범의 민족운동사적 맥락

 

한국 YMCA의 창립 움직임은 대한제국 정부가 민회(民會)를 금지시키고 독립협회를 해산한 이후인 1899년 가을, 배재학당을 비롯해 관립 외국어학교 등에 다니던 150명의 청년학생들이 연명으로 YMCA의 설립을 청원하면서 태동하였다. 당시 그들은 하류층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교회와는 별도로, 자신들과 같은 양반 지식층 청년들이 모일 공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여병현을 간사로 하여, 정회원준회원명예회원의 회원조직에 선교사들과 정회원으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집을 임시 회관으로 빌려 YMCA를 조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독립협회나 협성회같은 정치단체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정부의 저지로 그같은 시도는 일단 무산되었다.

한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는 뉴욕의 북미YMCA 국제위원회에 한국YMCA의 창설을 청원하였고, 이러한 국내의 요구에 바탕하여 북미YMCA 국제위원회는 1900년 라이언(D. W. Lyon)을 파견하여 현지 조사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한국에 YMCA를 창설할 목적으로 질레트(P. L. Gillett)를 파송하였다.

1901년 한국에 온 질레트는 곧바로 배재학당 학생들로 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19019월에 내한한 질레트가 한국어를 익히기에도 시간이 빠듯했던 처지에서 곧바로 학생YMCA를 조직했다고 하는 것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따라서 1899년 아펜젤러의 집에서 모인 것과 같은 친목회 형태의 모임이 우리나라 근대 학생운동 단체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협성회의 후신격으로 배재학당 내에 존속하다가, 질레트의 부임에 이르러 학생YMCA로 재편 내지 추인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아무튼 배재학당 학생YMCA의 출범은 만민공동회운동 당시 이미 두각을 나타냈던, 협성회로 대표되는 학생세력을 YMCA운동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배재학당 학생YMCA는 창립과 더불어 190111월 제3차 중국 학생YMCA 전국대회 때 홍콩 학생YMCA와 함께 정식 회원으로 가맹하여, 중국한국홍콩 YMCA 전체위원회(General Committee of YMCAs of China, Korea and Hong Kong)를 구성하였다. 이후 질레트는 도시YMCA의 조직에 착수하여 19031028일 정동 유니온클럽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창립하였다. 이로써 YMCA는 서울에 살고 있는 지주와 관리, 청년회를 필요로 하고 있던 청년학생층 등 두개의 그룹을 시청년회와 학생청년회 조직에 결합시킴으로써 사업(service)과 운동(action)을 겸비하는 기독교 사회운동체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김천배-‘하나님나라의 확장에 역점을 두는 학생YMCA운동지향성과 덕사교의 일상적 훈련을 중시하는 도시YMCA사업지향성의 해후)

그런데 출범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초기 임원진과 이사진 대부분을 미국캐나다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국제적 성격의 단체였다(초대회장 헐버트). 이러한 가운데 황성기독교청년회가 한국민족운동사에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계기는 개혁당사건으로 한성감옥에 구속된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홍재기, 김정식 등 개혁파 관료들이 러일전쟁 이후 출옥하여 집단가입을 하고, 윤치호, 김규식 역시 여기에 가세를 하면서부터였다. 실무진용에서도 1904년 후반부터 수석 간사(副總務) 김정식을 정점으로 김규식, 육정수, 이교승, 김종상, 최재학 등 신교육을 받은 한국인 간사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무엇보다 이상재를 비롯한 대한제국 개혁파관료 출신 인사들의 집단 옥중개종과 출옥후 황성기독교청년회 집단가입은 한국 YMCA운동의 주체형성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게일(J.S. Gale) 목사가 시무하던 연동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고, 황성기독교청년회에 집단 가입하는 한편, 연동교회 교인들을 주축으로 국민교육회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가세로 창립 당시 40명 가량의 회원으로 출발한 황성기독교청년회는 회원자격의 엄격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1905년 현재 600명이라는 급속한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자주독립과 문명개화의 기초로 종교도덕의 쇄신을 추구한 독립협회 계열의 양반관료 출신 인사들과 서구문명에 대한 학구열에 불타던 신지식층 청년들을 양대 축으로 하여 기호지방 기독교운동의 센터로 성장하였다.

이상재를 비롯한 개혁관료층과 김규식 등 신식학교를 통해 배출된 신지식층 인사들은 YMCA를 정치단체가 아닌 정치의 근본운동으로서 교육계몽선교를 담당하는 기간단체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정치적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할 때는 정치참여에 부정적인 선교사들의 입김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청년회는 그대로 두고 별도의 정치단체를 결성하거나 거기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그들이 집단적으로 가입하여 활동한 단체는 정치교육산업에 걸친 자강개혁을 목표로 결성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였다.

대한자강회에서 YMCA 계열은 윤치호가 회장에 선임된 것을 비롯하여 여병현, 이원긍, 김규식, 이상재, 김명준, 백상규(白象圭) 등이 평의원과 간사원의 중요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대한협회에서도 교육부장 여병현을 비롯해 다수의 YMCA 회원들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대한자강회­대한협회는 독립협회 출신들을 중심으로 일부 고위관료와 중견관료, 유교지식층이 주축을 이루는 가운데 자강계몽운동 상층부의 흐름을 대변하는 단체였다. 그와 관련하여 기호지방 기독교계의 중추적 사회단체로서 양반 개혁관료 출신의 독립협회 명망가들을 비롯해 상류층 청년자제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진용 역시 기독교 민족운동 상층부의 흐름을 대표하고 있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계열 : 개혁관료 출신의 독립협회 명망가들과 배재학당 등을 통해 배출된 신지식층 청년들을 주축으로 그 진영을 꾸려나가면서, 기독교 민족운동 나아가 문화계몽운동 상층부의 흐름을 대변YMCA농촌운동 - 이승만계 흥업구락부

상동청년회 계열 : 기호지방의 중하류 양반층과 독립협회의 일선 행동대, 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으로, 대한제국 멸망후 독립군기지건설운동을 주도이후 국수주의 논리에 입각해 대종교로 개종

신민회 주류- 관서지방 기독교계의 신흥 상공업자와 신지식층 : 신민회운동을 거치며 프로테스탄티즘과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족운동을 주도YMCA학생운동, 물산장려운동 - 안창호계 수양동우회

 

2. 학생YMCA운동과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 학생YMCA / 기성볼단, 조선국민회

* 동경유학생의 2.8 독립선언

YMCA학생운동은 협성회의 후신으로 1901년 배재학당에 학생YMCA가 조직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낸 이래 일제시기를 관통하며 전개된, 부르주아민족주의 진영 학생운동의 유력한 한 축이었다. 일제하 YMCA학생운동은 각 학교의 학생YMCA, 지역단위 연합조직과 전국대회에 해당하는 하령회 등으로 그 체계를 갖추고, 31운동 과정에서 학생독립운동의 산파역을 담당하며 한국 근대 학생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YMCA학생운동은 본래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프론티어적 선교운동이자, 교파와 지역의 구별을 떠나 세상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이었다. 먼저 YMCA학생운동의 프론티어적 면모와 관련하여, 학생YMCA는 초기부터 지방 전도대의 파송, 주일학교와 야학의 개설, 교회의 개척 등 프론티어적 선교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한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차원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에큐메니칼운동의 차원에서 지상천국의 건설과 확장의 문제는 결국에 가서 인생의 정치사회적인 국면까지를 포괄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서 YMCA학생운동이 이후 사회적 방면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기에 이르는 내적인 맥락을 찾을 수 있는데, 31운동 단계에 이르러 학생독립운동의 산파역을 담당하며 학생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나갔던 것 또한 기본적으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YMCA학생운동의 에큐메니칼한 성격은 교파와 지역을 떠나 전국의 기독학생들을 하나로 묶는 유력한 틀이었던 학생 하령회운동에 잘 나타나 있었다. 기독학생 하기 연합수련대회에 해당하는 하령회를 통해 YMCA학생운동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해 나갔다. 그리고 ‘105인사건과 유신회를 통한 YMCA 친일화 기도 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드세어지는 속에서도 전국조직으로 조선YMCA연합회를 출범시킬 수 있었다. 조선YMCA연합회의 창립에 참여한 10YMCA 가운데 시청년회로 중앙YMCA를 제외한, 9YMCA가 모두 학생청년회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처럼 YMCA학생운동은 자체의 프론티어적 면모와 에큐메니칼한 성격 속에서 1910년대를 거치며 거족적 민족운동으로서 31운동의 불씨를 그 안에 키워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학생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1운동 당시 학생독립운동은 1919127일의 대관원 모임을 통해 태동하였는데, 이 회합은 중앙YMCA 간사 박희도가 YMCA 학생회원 모집을 명목으로 김원벽한위건김형기 등을 통해 주선한 자리였다.

대관원 모임은 그 참석자들이 이후 학생단 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회합이었다. 그런데 10명의 참석자 가운데 8명이 서북지방 출신이었고, 대부분이 YMCA와 서북학생친목회교남학생친목회의 회원들이었다는 사실은 학생단 초기 조직화의 단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212일 이갑성 집에서의 기독학생모임을 계기로 이용설 등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 그룹이 합류하면서 가속화된, 학생단의 조직 또한 학생YMCA와 서북학생친목회를 양대 축으로 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단은 220일 승동교회에서 제1회 간부회를 개최하여, 김원벽(연희전문)강기덕(보성법률상업)김형기(경성의전)김문진(세브란스의전)전성득(전수학교)김대우(경성공전)를 대표자로 선정하고, 후위에 한위건(경성의전)이용설(세브란스의전)윤자영(전수학교) 등을 배치함으로써 조직적인 정비를 일단락하였다. 학생YMCA의 김원벽과 서북학생친목회의 강기덕, 그리고 이면에서 둘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던 한위건을 중심으로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들이 포진하는 구도였다.

그런데 221일 이후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교섭이 급물살을 타 독립운동의 일원화가 성사되자, 학생단은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대중시위운동을 전개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그에 합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225일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제2회 학생단 간부회를 소집하여, 31일의 거사는 중등학생들로 하여금 지원케 하고, 그 뒤 전문학교 학생대표 주도하에 제2차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후 학생단은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대중동원의 책임을 맡아 31일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주관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이 전날 갑자기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김에 따라, 35일의 학생단 시위는 물론 31일의 파고다공원 거사 또한 사실상 학생들 주도하에 치러지게 되었다.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과정에서 천도교계기독교계불교계 대표와 더불어 학생단의 존재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데, 사실 30대 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민족대표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박희도와 이갑성은 엄밀히 말해 기독교계 대표라기보다는 학생단의 지분이었다. 실제로 박희도는 연희전문 학생YMCA 회장을 역임한 김원벽을 통해 지속적으로 학생독립운동에 관여하였고, 이갑성 또한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 그룹과 긴밀히 연계된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비록 선교운동에 국한되는 것이었지만 1910년대 하령회 등을 통해 꾸준히 역량을 축적한 학생YMCA는 서북학생친목회와 더불어 학생단 조직을 통해 31운동의 초기 국면을 주도하면서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31운동을 거치며 YMCA학생운동은 부르주아민족운동의 지도력을 배출하는 유력한 통로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 1920년 조선학생대회 성립(초대 회장 김윤경-연희전문 학생청년회 회장)

- 1921YMCA연합회 학생부 설치, 월간 종합지 󰡔청년󰡕 발행

 

3. 물산장려운동과 YMCA

 

1922년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한 독립의 마지막 기회로 기대를 걸었던 워싱턴 군축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리자,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은 실력양성론을 전면에 내걸고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 가운데 물산장려운동은 19226월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을 시발로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가며 민족경제건설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의 깃발을 올린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은 조만식이 총무로 있던 평양YMCA를 근거지로 해서 이루어졌다.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이사 12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회장 조만식, 부회장 이덕환을 비롯해 김동원 김성업 김형숙 김형식 오윤석 임영석 조명식 등 9인이 모두 평양YMCA의 임원이었다. 이 가운데 김동원 김성업 김형식 조명식은 안창호계 동우락부의 회원이었고, 임영석은 항일 비밀결사 대한국민회 출신이었으며, 이덕환은 모험단이라는 비밀결사 출신이었다. 이들 9인이 대한국민회 출신의 고진한, 모험단 출신의 최용훈, 그리고 여성계를 대표하는 변현성과 함께 창립이사진을 구성한 것이다. 고당을 비롯한 평양YMCA 지도자들과 동우구락부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대한국민회 등 항일 비밀결사 출신과 여성계 인사들이 거기에 가세를 하는 구도였다. 이같은 모양새는 이후 평양 지역 민족운동의 기본 지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는 독자적인 회관 없이, 평양YMCA 회관에 간판을 내걸었다. 주요사업은 선전활동이었는데, 조선물산장려 강연회와 더불어 매년 정월 초하루 음력 설날에 대대적으로 벌인 캠페인이 대표적인 행사였다. 조선물산장려 캠페인은 1923년 설날부터 시작되었는데, 해를 거듭하며 평양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1923년 설날 선전행렬에는 평양노동연맹회 회원들이 단체로 조선물산으로 지은 옷과 모자 또는 수건에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고 행렬에 참여하여 이채를 띠었다. 서울에서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싸고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이라 하여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질 즈음에, 노동자들이 단체로 행사에 참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편 1928년 설날 행사 때는 평안서경세창정창대동 등 평양 시내의 유수한 고무공장과 경성방직삼공대성공신 등의 양말공장, 그리고 조선물산상회와 광신상회 등 30여개의 가입단체가 자사의 상품을 우마차에 싣고 선전행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0년부터는 금주단연동맹, 차가인동맹 등과 함께 행사를 주관하면서 생활개선절제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해 나갔다.

이렇게 물산장려운동이 시민들의 커다란 호응을 받으면서 각지의 특산물과 토산품을 판매하던 상점들이 호경기를 만나 번창하였다. 그런데 토산품 애용의 바람이 불어 무명 두루마기와 무명 모자가 유행하여 수요가 급증하면서 일부 악덕 제조업자와 상인들이 엉터리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일이 늘어났다. 물산장려회는 이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우수한 제품을 제조해서 소비자에게 염가로 제공하는 협동조합체를 조직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조선물산장려회 안에 생산조합이나 소비조합과 같은 자체의 실행기관을 두지 않는 대신, 평양 시내의 유수한 제조업체와 상점들을 조선물산장려회에 가입시켜 조선물산의 품질과 가격을 관리하려 하였다. 그리고 각 교회의 청년회와 부인회, 일반 사회단체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어 일종의 시민 감시망을 가동하는 한편으로 일상적인 조선물산장려 캠페인을 벌여 나갔다.-지역의 상공업계기독교계여성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어 토산애용상공업진흥생활개선이라는 세 부문에 걸친 경제운동과 연결

시민경제주권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이 유독 평양에서 꾸준하게 전개되며 미흡하나마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조만식이 이끄는 평양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시민사회적 활력 때문이었다. 19231월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물산장려회가 토착자본가의 배만 불리는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부딪혀 창립 1년만에 조직조차 유지하기 힘든 지경에 빠진데 반해,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는 1937년 일제 당국에 의해 해산당할 때까지 흔들림 없이 꾸준한 활동을 벌였다. 조선왕조 5백년동안 온갖 정치적 차별을 받으며 형성된, 국가에 대해 민간사회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평안도의 평민문화, 그리고 그것을 대중적인 사회운동으로 조직해 낸 조만식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도 평안도는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정치권력에서 철저히 배제를 당해 왔다. 상공업의 발달로 조선후기 들어 경제적으로는 전국 8도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이 되었지만, 아무리 과거에 합격을 해도 정6품 이상의 관직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남강 이승훈의 말대로 그래서 평안도에는 조상 이름 울궈먹는 정승 판서의 사당도, 사색 당파도, 양반 상놈 따지는 차별도 없었다. 남달리 가진 것이 있다면 감상어린 수심가와 울결한 혁명사상뿐이었다. 애당초 정승 판서로 출세할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치권력에 기웃거리는 대신에 상놈들끼리 평민적 자치질서를 이루어 스스로 힘으로 일해 먹고 살 길을 찾았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그 결과 근대에 들어서는 신문명의 공기를 흡수함이 다른 지방보다 빨라 기독교와 신교육, 신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조선왕조로부터 받은 오랜 정치적 소외와 수탈의 경험에서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앞세우는 자유주의를 받아들였고, 유교 문화의 변방으로 신분적지역적 차별을 받아야 했던 데서 노동의 신성함과 평등의 윤리를 설파하는 새로운 종교 기독교를 앞장서 받아들였다. 또한 양반사족 지배질서의 사각지대에서 싹튼 평민적 자치질서를 바탕으로 다른 어느 지방보다 많은 교회와 학교, 사회단체를 설립하였다.

평양YMCA가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은 이렇게 오랜 정치적 소외의 경험을 통해 국가권력에 기대기보다 민간사회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의 살 길을 찾아왔던 평안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일대 민족운동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례였다.

시민사회의 개척자 고당 조만식

조선의 간디로 널리 알려진 고당 조만식이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를 처음 발기한 것은 19207월이었다. 19213월 평양YMCA 총무로 취임하면서 다시 추진하여 1년여의 산고 끝에 19226월 드디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조만식이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취지서>에는, 오늘날 상공업이 발달한 선진국들도 저마다 모두 보호무역주의를 행하는데, 나라를 잃어 법령이나 정책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자위상 불가불 민간의 공덕심과 공익심에 의지한 보호무역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을 제창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대목이 있다. 나라가 없다고 손놓고 있지 말고, 민간 차원에서라도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조만식을 시민사회의 개척자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인데, 실제로 그는 평양YMCA 총무로 취임한 1921년 이래 평양사회에 무관의 제왕으로 군림하면서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직접 챙겼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어 김동원오윤선 장로와 함께 평양사회와 기독교계를 이끌었으며,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창립되었을 때는 중앙집행위원 겸 지방순회위원으로 평안도 일대를 돌며 선전강연과 모금운동을 벌였다. 1927년에는 숭인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재정난에 빠진 학교를 상업학교로 탈바꿈시켰고, 1931년에는 관서체육회의 회장에 취임하여 민간에 체육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일제 권력과 무관하게 평양의 조선인사회를 조직하여 자율적으로 평양고아원과 평양공회당(백선행기념관)과 인정도서관을 세우고, 평양상공협회를 설립하였다. 그 결과 일제 침략하에서도 평양은 여전히 조선사람의 평양으로서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YMCA 농촌사업과 사회복음의 토착화

 

농촌운동은 일제하 기독교계가 가장 조직적으로 전개한 민족경제건설운동이었다. 1920년대 한국 농촌사회는 일제의 지주제를 매개로 한 수탈적 농업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토지겸병의 성행에 따른 자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의 급증, 농가부채의 증가, 농업의 영세구조 심화 등 갈수록 피폐해 가고 있었다. 특히 일본자본주의의 저미가-저임금 구조 유지에 필요한 쌀의 대량 수탈을 위해 대대적인 국책사업으로 추진된 산미증시계획은 한국의 농업생산과 농업생산자를 일본 금융자본, 투기자본에 긴박시키는 한편으로 수많은 농민의 몰락을 가져왔다. 당시 한국민의 8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국내 총생산액의 9할 가까이를 농업생산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농촌사회의 피폐는 농촌경제 문제의 수준을 넘어 이 시기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일제는 보다 안정적인 지배와 수탈을 위해, 그리고 한국인은 생사의 기로에 선 농민민족을 구제하고 나아가 독립된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25YMCA의 농촌사업 착수를 필두로 1928년 국제선교연맹(IMC)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 이후 기독교계 전반으로 퍼져나간 기독교 농촌운동은 그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민족갱생운동이었다. 먼저 그것은 교육진흥물산장려농촌교화대중각성운동 등을 통해 민력양성에 주력함으로써 장차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자는,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이른바 실력양성운동으로의 방향전환과 맞물리면서 나타난 민족경제 자립운동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무산계급의 운명 개척에 기독교가 그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고조되고, 전 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농민층에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데 대한 나름의 대응이기도 하였다. 더불어 기독교 농촌운동은 구주대전 이후 세계 기독교계에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한 기독교의 토착화와 실제화를 강조하는 사회복음운동에 크게 자극되어 일어난 운동이었다. 특히 농민교육과 협동조합, 농촌지도자 양성을 골자로 하는 예루살렘대회의 농촌문제 결의안(아시아아프리카의 농촌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사명)의 농촌사업 지침은 착수 단계에 있던 한국기독교 농촌운동의 전거가 되었다.

1925년 조선YMCA연합회에 농촌부를 설치하여 홍병선을 책임간사에 임명하면서 본격화된 YMCA 농촌사업은 정신의 소생, 생활의 조직, 농사개량을 3대강령으로 삼고, 도시중심 봉사중심의 서구적 YMCA모델에서 벗어나 전국민의 8할 이상이 살고 있는 농촌에 운동의 뿌리를 내리는 것을 목표로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연합회 사업에만 전념하기 위해 신흥우 총무는 겸임하고 있던 중앙청년회 총무직을 사임하고 농촌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YMCA농촌사업은 장감 양교파와의 에큐메니칼 사업으로까지 발전하였으며, 1929년 현재 YMCA 촌락 227, 야학생 10,507, 협동조합 22, 농민회 82, 회원 4128, 그리고 전국 19개 도시의 농민학교 설립 등 다대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또한 연합회는 농촌사업의 효율적 전개를 위해 1928년 전국을 5개의 지방부로 나누고, 중앙지방에 홍병선, 관서지방에 계병호, 관북지방에 이순기, 호남지방에 최영균을 각기 간사로 배치하였다.(영남지방은 중앙지방부 간사가 겸직) 이로써 연합회는 도시Y, 학생Y, 향촌Y를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전국적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YMCA 농촌사업은 농민교육농촌계몽운동(1925-1928)에서 협동조합농사개량운동(1928-1932)으로, 그리고 농촌지도자양성운동(1932 - 1937)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면서 10여 년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특히 사업의 중심을 이룬 것은 협동조합운동이었다. 그리고 농사개량운동과 관련해서는 축산원예과수재배와 농촌 소공업의 육성을 통한 영농의 다각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장로회 농촌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YMCA 농촌사업 주체들은 서구형 산업자본주의의 논리에 바탕하여, 아일랜드를 모델로 한 유상매상유상분배의 농지개혁과 덴마크를 모델로 한 협동조합의 조직을 자신들이 구상하는 농촌재건론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이 가운데 농지개혁과 관련하여 그들은 산업화를 통한 농촌 과잉인구의 도시 흡수를 그 전제로 삼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농지개혁 구상이 산업화의 정상적인 진전과 보조를 같이하는, 자본주의 근대화의 일환이었음을 말해준다. 농업생산과 유기적 관련을 갖는 농촌 소공업의 육성과 대자본에 맞서는 농민들의 자주적인 자본형성 방안으로 신용조합의 조직에 주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근대화와 짝을 이루는 독립자영농 육성방안으로서 그들의 근대주의적 농촌재건론은, 당시 농업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일제의 수탈농정에 대해서는 도외시한 채 이를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5. 1920-30년대 기독교계의 민족사회운동 논의

 

3.1운동 이후 기독교 민족운동의 조직적 재편은 기독교 선교의 양대 거점이던 평양과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921년 평양YMCA를 창립하고 이를 모체로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된 관서지방 기독교 민족운동의 재편은 흥사단계의 국내조직으로 동우구락부­수양동우회가 출범하면서 일단락을 지었다. 이후 수양동우회를 중심으로 집결한 상공업자지식층 출신의 관서계 기독교세력은 1927년 수양동우회 개조운동을 거치며 기독교계에 운동기반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본격화하였다. 그들은 장로교회의 청년 대중단체인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기독신우회와 장로회총회 농촌부의 조직을 주도하면서 청년운동과 절제운동, 농촌운동 등의 방면에 걸쳐 그 대오를 형성하였다. 조만식의 직계조직으로 등장한 기독교농촌연구회 또한 1933년 신설된 장로회총회 농촌부 상설기관에 참여하여 장로회 후기 농촌운동을 주도하면서 관서 기독교계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의 흐름에 합류하였다.

31운동 직후 한성정부선포과정에서 중앙YMCA 지도부와 이승만 사이에 맺어진 운동적 결합을 통해 전기를 마련한 기호지방 기독교 민족운동의 재편은 1920년대 전반 조선YMCA연합회 총무 신흥우의 주도로 전개된 민간 외교운동을 거치며, 미주 이승만계 동지회의 국내 연장단체인 흥업구락부를 조직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었다. 이후 흥업구락부 인사들은 중앙YMCA를 거점으로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일반사회에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YMCA 농촌사업을 주도하고, 기독교연구회와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기독교 혁신운동을 전개하면서 기호지방 기독교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1920년대 이래 기독교계의 민족사회운동 논의는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 계열 기독교세력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진행되었다. 먼저 1920년대 중반 반종교운동에 대한 하나의 대응으로 기독청년 학생층 일각에서 제기된 기독교사회주의 논의는 이대위를 비롯한 수양동우회 계열 일부와 그들의 영향권 하에 있던 학생YMCA를 주된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사회복음 조류와 국제적 유대를 맺고 추진된 YMCA 농촌사업과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 기독교연구회의 활동은 신흥우를 비롯한 흥업구락부 계열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문제 접근방식상에 일정한 편차를 드러내었다. 먼저 기독교사회주의를 제기하였던 논자들은 원리주의적 입장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사상적 결합과 민중적 기독교로의 개혁을 모색하였는데, ‘’()의 원리에 입각한 기독교 나름의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화두는 그 같은 사상적 모색의 산물이었다. 이에 비해 근대주의적 사회복음의 입장을 견지하였던 논자들은 사상운동보다는 기독교의 토착화와 실제화를 위한 실제 사업에 비중을 두면서, 근대주의에 입각해 민족구성원 모두의 당면이익을 획득하려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신간회의 창립은 기독교계의 정치사회참여 논의를 구체적인 실천과 결부시켜 한층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기독교계 일각의 신간회 참여는 사회복음의 토착화와 수양동우회 개조론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역량을 결집하고, 민족적 정치투쟁의 거점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사상적 결합 내지 공존공영을 추구하며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흥업구락부 계열의 신간회 참여와 그 구심점이었던 이승만의 반공노선 사이에 개재한 노선상의 불일치, 그리고 안창호의 해외 민족유일당운동 추진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간회 참여를 마다하였던 수양동우회 일각의 사상적 동향과 관련한 문제들은 여전히 해명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신간회의 출범과 더불어 활발해진 기독교 민족사회운동 논의는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를 거치며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되는 기독교적 사회실천의 이론으로 기독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1929년 조병옥정인과 등 수양동우회 개조론자들의 주도하에 기독교계의 협동전선으로 출범한 기독신우회가 선언을 통해 사회복음주의의 중흥을 통한 기독주의의 민중화와 실제화를 표방하면서 공식 천명되었다. 기독주의 사회운동론은 이후 기독교농촌연구회의 기독주의 농촌운동론으로 이어지면서, 원리주의적 입장을 보다 분명히 하는 가운데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경향성을 띠어나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독주의는 대공황기의 반종교운동과 엇물리면서 반유물론적 이념투쟁의 논리로 굴절되는 양상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후 기독교계 내부에 냉전의식이 자리잡기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대공황기 기독주의를 기치로 기독교 민족사회운동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사상적 모색이 관서 기독교계에 근거한 수양동우회 일각과 기독교농촌연구회 그룹을 중심으로 진행된 데 대해, 기호 기독교계에 기반한 흥업구락부 계열 일각에서는 근대주의 신학과 군대식 규율로 무장한 기독교혁신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한 흐름을 대표한 것은 신흥우 주도하에 흥업구락부 개조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적극신앙단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적극신앙노선은 파쇼적 조직체계와 패권주의적 운동방식으로 인해 오히려 기독교계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무튼 기독주의노선과 적극신앙노선은 1920년대 이래 수양동우회 계열과 흥업구락부 계열을 중심으로 진행된 기독교 민족사회운동 논의의 일차적인 도달점들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하 기독교세력은 국가를 개인의 단체적 결합으로 파악하고,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가치우위를 내세웠다. 그러한 선상에서 그들이 설정한 민족해방 이후 새로운 독립국가의 모델은 자유주의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종교문화 방면의 문화적 공공영역, 교육산업 방면의 시민사회 영역, 정치 방면의 정치적 공공영역을 유기적으로 아우르는 바탕 위에 성립하는 민족국가국민국가로서 자유주의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였고, 그것은 종교문화운동, 경제운동, 정치운동의 유기적 결합을 강조하는 그들의 부문운동론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일제침략으로 시민사회의 자율성 확보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그들의 기독교와 시민사회에 기초한 자유주의 국가건설론의 기조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의 원칙과 시민사회의 현실적 이해 사이에서 나타나는 갈등구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수양동맹회의 창립선언문으로 발표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인격수양지상주의를 내세워 부문운동 논리로 엮여 있던 기독교 계열의 문화운동과 정치운동 사이의 유기적 역할분담 관계를 정치색 배제곧 시민사회의 비정치화 논리로 끊어버림으로써 국권회복과 시민사회적 이해 사이의 갈등관계를 해소시키려 한 경우였다. 그것은 일제의 문화정치를 경험하며 민족적 요구와 계급적 이해 사이에서 동요하던 기독교계 민족부르주아지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으로 민족부르주아지의 동요가 가속화하는 가운데 그에 맞서 기존 자유주의 국가관의 국가와 시민사회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신간회의 출범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일각에서 나타났다. 그것은 국내의 수양동우회 개조운동, 안창호의 대공주의와 민족유일당운동 추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족해방을 최우선 과제로 부각시키는 가운데 시민사회의 여론정치 원리에 입각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적 이념을 마련하고, 시민사회의 사적 영역에 대한 사회전체의 공익과 민족국가의 가치우위를 분명히 함으로써 사적 영역에 안주하려는 국내 민족부르주아지 일각의 흐름에 대응하려 한 경우였다.

그러한 면에서 수양동우회 개조론과 대공주의는 종래 고전적 자유주의 국가관의 수정과 국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과거 조선 왕조국가에 대한 관서지방 신흥세력의 부정적 경험을 토대로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가치를 우선시한 데서 앞서의 자유주의 야경국가론과 실력양성의 논리가 도출되었다면, 이제 시민사회가 제국주의의 침략과 노자문제의 대두로 왜곡 굴절되는 속에서 사회적 국가의 개입과 정치적 공공영역의 확대 강화를 통한 민족적 대동단결이 추구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변화는 기독신우회의 선언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그 같은 신자유주의적 국가관의 등장은 당시 기독교계 일각의 신간회 참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사실은 대공황기를 거치며 흥업구락부 계열 일각에서 나타난 파시즘적 경향이었다. 그 같은 파시즘적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은 흥업구락부의 신흥우였다. 신간회 출범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하던 신흥우가 대공황기를 거치며 독재주의 파시즘으로 경사된 데는 그의 시민사회 인식상의 한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관서지방 기독교계의 시민사회론이 그 지방의 오랜 평민적 자치질서와 신흥 중간계급이라는 사회적 실체에 의해 일상에서 어느 정도 체화된 모습을 갖추었던 데 비해,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실체가 미약하였던 기호지방 기독교계의 시민사회론은 다분히 관념적 지향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소지는 기호지방의 기독교운동을 대표하는 흥업구락부의 원류로서 미주 동지회의 정강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이 보다 돌출되어 튀어나온 것이 신흥우의 파시즘 경사였다.

이와 같이 일제하 기독교 계열의 국가관은 시민사회에 기초한 자유주의국가 건설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그 기조를 같이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 국가관의 수용을 통한 고전적 자유주의 국가관의 수정 움직임과 파시즘으로 경사된 자유주의 국가관의 굴절이 신간회운동기와 대공황기를 거치며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 일각에서 각각 나타나고 있었다.

 

6. 적극신앙단 사건과 그 파장

 

적극신앙단은 중앙YMCA 안에 조직된 이승만계 미주 동지회의 국내자매단체 흥업구락부가 1932년 이후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전락하면서 신흥우를 중심으로 기호지방 기독교계 인사들을 포섭하여 결성된 단체였다. 적극신앙단은 근대주의 신학에 입각한 기독교의 혁신을 표방하며, 관서지방의 교권에 맞서는 기독교계 기호 블럭의 구축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적극신앙단 운동은 단장 신흥우 밑에 자문에 응하는 약간명의 참사(參事)와 소년소녀적극대(10-17), 남녀청년적극대(18 - 25), 적극구락부(26세 이상)를 두고, 단장이 참사 및 각 부장과 대장에 대한 임명권을 갖는 철저하게 중앙집권적이고 파쇼적인 조직형태와 패권주의적 운동방식으로 인해 오히려 흥업구락부 내부까지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기독교계 전반에 파란을 몰고왔다.

이른바 적극신앙단은 출범 이후 기독교계의 패권 장악을 위해 당시 노골화하던 관서지방 대 기호지방의 지방열을 부추기며 교계 전반에 걸쳐 잇따른 분규를 일으켰다. 먼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19343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대표 선거와 10월 총회 때 적극신앙단 측이 감리회의 교권장악을 위해 무리하게 자파세력을 심는 과정에서 물의가 빚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3회 총회에서도 적극신앙단의 함태영 등이 중심이 된 경성노회가 관서계의 영향력하에 있던 총회와 절연을 선언하고 호남지방의 전남전북순천노회와 더불어 총회분립운동을 전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19352월 재경성기독교유지대회(在京基督敎有志大會)성명서발표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이 이른바 적극신앙단사건이었다. 이 사건에는 관서 교권주의와 기호 패권주의, 근본주의 신학과 근대주의 신학, 수양동우회와 적극신앙단 등의 대립구도에 신흥우와 적극신앙단의 파쇼적 행태로 인해 야기된 중앙YMCA흥업구락부의 내부분열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렇게 적극신앙단이 문제가 된 과정은 조선감리회 총리사 양주삼과 중앙YMCA 회장 윤치호가 공동으로 서명날인하여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적극신앙단은 나중에 비밀결사처럼 되었으며, 단원들은 자기네들만이 앞을 내다보고 애국적이며 진보적이며 이상적인 교계 지도자로 자부하고 있으며, 교회와 기독교기관을 절망적이며 보수적이며 이상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단원들을 경성노회와 감리교연회와 YMCA와 기독교서회와 성서공회와 기독신보와 기타 선교기관에 침투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단이 집회를 가지거나 운동을 할 때는 반드시 비밀스럽게 또 속임수를 쓰면서 하고 있으며, 1934년에는 감리회총회를 점령하려고 기도하고 그 해 장로회총회에서도 문제를 일으켰으며, 특히 전필순씨가 기독신보사를 가지고 나갔으며, 1935년 정월에 현동완이 (신흥우와의 불화로 중앙YMCA 부총무직) 사표를 제출하면서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근대주의 신학과 군대식 규율로 무장한 적극신앙단의 기독교혁신론은 그 패권주의적 운동방식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도 없이 기독교계 내부의 분열만 한층 심화시킨 가운데, 1935년 그 총책임자인 신흥우가 중앙YMCA와 조선YMCA연합회의 총무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적극신앙단 사건의 파장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해방후에 이르기까지 YMCA운동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전필순 김영섭 이동욱 박연서 최석주 김수철 등 적극신앙단 출신 인사들은 1943년 혁신교단을 조직하여 재차 기독교계의 교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다. 그리고 혁신교단이 유산된 이후 19457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결성에 적극 참여하며 교권장악에 골몰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교권장악을 위해 일제 권력을 끌어들이고 적극적인 친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해방후 감리교회 내부의 교권투쟁, 나아가 2002년 서울YMCA 분규사태의 배후에 적극신앙단이 뿌린 기호지방 패권주의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전택부는 󰡔Y새끼다리들이여!󰡕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2002년 서울YMCA 분규사태의 역사적 뿌리를 밝혔다.

 

이 책을 서둘러 내게 된 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침공으로 거의 다 죽게된 YMCA를 살려놓고 창립100주년 기념잔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그 문제의 교권주의자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 다름아닌 감리교의 엄재희 목사, 김창희 목사, 박영대 장로 등 소위 감리교의 호헌파 세력을 등에 엎고 파고드는 행동파들입니다. 그네들은 감리교의 양주삼 목사, 류형기 목사, 이환신 목사, 홍현설 목사 등 소위 거물급 이북파들과, 백낙준 박사, 이용설 박사, 김명섭 박사 등 장로교의 소위 거물급 이북파 세력과 힘을 겨루는 행동파들입니다. 그네들은 Y연맹에는 감히 파고들 수 없으니까 만만한 서울Y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서울Y는 회원단체이므로 자기네 사람들을 회원으로 만들어 가지고 공략해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1968년경부터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현 서울Y 이사장 표용은 목사는 그네들과 뜻을 같이하는 핵심인물입니다. 그는 1974년부터 Y 이사가 되면서 Y 공략에 앞장을 섰습니다. ... 기독교장로회의 최태섭 장로도 물리치고, 예수교장로회 영락교회의 최창근 장로도 무시하며 ... 장장 15년간이나 이사장을 독점하면서 세력을 뻗쳐 나갔습니다. 비단 서울Y만 아니라 CBS 등 각종 기독교기관에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2002YMCA 사태의 배후에 소위 이북파와 교권투쟁을 벌였던 감리교계의 기호파 교권주의자, 특히 호헌파가 있었고, 그 행동대장이 바로 표용은 목사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택부가 문제삼은 감리교 호헌파는 1933년 신흥우가 결성한 적극신앙단을 원류로 해서 일제말 혁신교단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결성을 주도하였던 기호파 교권세력의 후예로, 해방직후 감리교 복흥파를 잇는 집단을 말한다.

해방직후 감리교회 내부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에 참여하여 교권을 장악하였던 교직자들과 재야 교직자들 사이에 교권을 둘러싼 심각한 대립이 일어났다. 먼저 194598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선교단 남부대회가 열리자, 이규갑 변홍규 목사 등 재야교직자들이 동 대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퇴장한 후 같은 날 동대문교회에 회집하여 감리교 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하였다(재건파).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시무목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를 전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미약하였다.

재건감리교회의 발족으로 곤란한 입장에 서게 된 교단측 지도자들은 19466월 수표교회에 회집하여 재건감리교회에 대립되는 復興감리교회를 조직하였다(복흥파). 재건파가 일제 잔재와 부역교직자들의 은퇴를 주장한데 대해, 복흥파는 신앙 부흥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자고 주장하였다.

이후 재건파와 복흥파의 교권투쟁은 신창균 문창모 등 평신도들이 주도한 합동운동의 결과, 1949421일 연합총회가 개최되어 양파 모두의 신임을 받는 김유순 목사를 감독에 추대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김유순 이하 총리원 간부 대부분이 납북 또는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감리교회는 1950710일 피난지 부산에서 긴급수습책으로 신학교 교장 류형기 박사(‘이북파’)를 총리원장 대리로 추대한 다음, 전시 비상조치로 이번 기에 한해 감독 자격인 연회회원 6년 연속 복무 조항을 보류하고 류형기 박사를 감독에 추대하였다.

그런데 1954316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회집된 제3회 총회에서 감독을 비롯한 총리원의 간부진이 재건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데 불만을 가진 과거 복흥파 인사들이 류형기 감독의 자격문제를 놓고 그의 재선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분규가 재연되었다. 총리원측이 감독임기연기안, 감리사임명제안 개헌을 통해 류형기 감독을 재선시키자, 과거 복흥파가 중심이 된 반대 세력은 헌법 옹호를 내세워 195531일 호헌총회와 연회를 소집하고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세력이 바로 1968년경부터 서울YMCA를 장악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하는 호헌파이다. 기호서북하는 지방열과 부일협력 문제와 같이 해방후 미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가 다시 파벌주의 내지 지방 패권주의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7. YMCA운동 전통의 단절과 재건의 굽잇길

 

침략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탄압이 한층 드세어지는 가운데 조선YMCA연합회는 1935년 적극신앙단 사건과 내부 갈등으로 신흥우 총무가 사임한데 이어 연합회의 기간부서인 학생부, 지방부를 폐지하고 농촌부는 주요사업을 각 지방 청년회에 이관하는 등 조직축소를 단행함으로써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여기에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일어나 YMCA 지도력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연합회의 대부분의 활동은 거의 중단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로 개편되어(1938. 8) 일본 YMCA의 산하단체로 예속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2년 일본YMCA동맹이 일본기독교단의 청년부로 편입됨에 따라 일본YMCA동맹 조선연합회가 해체되고, 한국내의 모든 지방YMCA와 학생YMCA가 직접 일본YMCA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1943년에는 조선중앙(일인주도 경성YMCA의 종로지회로 격하), 광주 두 YMCA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청년회가 강제 폐쇄되었다.

19458.15 해방과 더불어 YMCA는 같은 해 10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재건위원회를 소집하고 기능을 회복한데 이어, 11월에는 중앙기독교청년회가 연합회의 기능을 대행키로 하고 회장에 유억겸, 중앙 총무겸 연합회 총무에 구자옥을 선출하였다. 이처럼 해방과 함께 한국 YMCA 재건의 기회가 왔으나 YMCA는 불행하게도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지도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1938년 운동체로서 YMCA의 실질적 종말과 해방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사이의 연결고리가 일본기독교청년회라는 이질요인에 의해 차단당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YMCA의 재건은 해방후의 혼란속에서도 서서히 진행되어 갔다. 우선 1938년 이래 중단상태에 있던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3년대회가 19485월부터 재개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해방전의 청년을 계승하는 YMCA 뉴스가 월간지로 복간되었다. 또 대학생하령회도 같은해 8월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연합회의 성급한 재건과 확장주의 정책은 짧은 기간동안 지방에 군소 YMCA를 양산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념과 지도력의 부족 및 YMCA운동을 밀고 갈 담지체에 대한 확고한 대책 없이 전개된 확장사업은 오히려 YMCA의 영세성과 의존성만 고질화시켰다. 학생YMCA 재건에 있어서도 당시 이미 자생적으로 전국규모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기독학생운동에 대해 연합회는 분명한 비젼이나 재건대책은 세우지 못한 채 해방전의 기득권 확보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38선 이북의 평양, 함흥, 선천, 신의주 등 4YMCA는 해방후 즉시 재건되었으나 1948년을 전후해서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6.25전쟁으로 YMCA는 연합회 회장 양주삼, 증경총무 구자옥 등 다수의 지도력들이 납북되고 종로회관 건물이 전소되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부산 피난 기간중인 19521월 연합회는 ‘YMCA 전문학원을 개설하여 간사지도력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16개월의 학습과 실습을 겸한 이 훈련과정을 통해 한국 YMCA는 비로소 하나의 통일성을 가진 프로그램 전개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수련을 마친 간사들 대부분은 50-60년대 한국 YMCA를 짊어지고 나가는 중추적 일꾼이 되었다. 한편 각지의 YMCA들은 재정과 역량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궁핍과 사회적 부조리로 인한 시대의 짐을 나누어지려는 전후복구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전개하였다.

50년대 학생YMCA의 재건은 새로운 시대에 대응해 가는 학생기독교운동의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정초되었다. 재건작업은 먼저 전통적으로 학생 YMCA가 존재하였던 대학에 YMCA를 재건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광주(1951. 8)와 부산(1952. 8)에서 개최된 하기집회는 학생 YMCA 재건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52년 여름 18개 대학, 30개 고등학교의 학생기독교청년회들로 학생YMCA 전국연맹하이-Y 전국연맹이 결성되었다. 이후 YMCA학생운동은 이념 및 방향의 정립과 프로그램의 빈곤의 극복에 주력하여 1959년 통일된 한국 학생기독교운동을 위한 본격적 발족으로 학생YMCA연맹, 학생YWCA연합회 및 기독교학생회전국연합회(KSCF)로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학생 YMCA의 재건 외에도 ‘YMCA 전문학원에서 훈련을 받은 전문사역자들에 의해 소년사업’(하이YMCA, 중학YMCA, 어린이YMCA)이 활발히 전개되어 전국의 거의 모든 도시YMCA에서 주요 목적사업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과거 주요 지도력들의 친일행위와 납북, 그리고 19561월 이기붕의 대한YMCA연맹 위원장 선임으로 상징되는 이승만정권하의 정교유착은 YMCA의 새로운 출발에 커다란 짐이 되었다.

 

자립과 자행을 목표로(1960-1970)

19604월혁명을 경험하면서 YMCA는 내적인 비판과 혁신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YMCA 지도자들과 자유당정권과의 유착에 대한 의혹에서도 제기되었지만 보다 주요하게는 독재정권의 부정비리에 무관심 무감각하였다는데 대한 자기각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한국 YMCA는 기사회생의 노력으로 1962“3개년 전진운동을 시도했으나, 재정자립에 주력할 필요성의 증대와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60년대 YMCA 최대의 과제는 자립태세의 확립이었다. 한국 YMCA는 그 확립의 방도를 표준회관의 확보와 협력사업에서 찾으려 하였다. 회관확보와 관련하여 한국 YMCA는 북미 YMCA의 자매기금과 그 몇배에 달하는 국내모금을 통해 이를 수행해 나갔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자립에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국내 YMCA간의 협력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때까지 계속되던 북미 YMCA의 재정지원과 지도력 제공이 마감됨에 따라 한국 YMCA의 자립문제는 더욱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1960년대의 주목할만한 발전은 YMCA의 전문지도자인 간사들의 각성이었다. 그 결과 1955년 발족후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던 대한YMCA간사회(AOS)60년대 중반에 들면서 활성화되어 YMCA운영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의 습득, 그리고 소명의식의 확립을 위한 각종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전문지도제가 점차 정착을 하게 되면서 YMCA의 전통적인 운영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지도력과 유지지도력의 역할분담에 의한 유지 전문공영제가 뿌리를 내려 나가게 되었다.

 

8. 운동성의 회복과 사회적 책임의 각성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YMCA에는 운동성 회복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 기구적 각성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군사독재와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민간사회단체의 역할이 무엇일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에큐메니칼운동 차원에서 개발과 정의에 대한 신학적, 사회적 성찰이 우선적인 공동관심사로 등장하고, YMCA의 기독교적 주체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등의 안팎의 몇몇 요인들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YMCA는 여러 형태의 노력을 통해 그 운동성과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 사회개발사업 : YMCA연맹은 1969년 제 20차 전국대회를 계기로 한국 YMCA에서 사회개발 사업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사업으로 전환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사회개발과 YMCA- 전략과 태세라는 주제로 모인 1971년 제 21차 대한 YMCA 연맹 전국대회에서는 YMCA가 지금까지의 오랜 전통적 프로그램의 무거운 짐을 과감하게 팽개쳐 버릴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할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그리고 제 21차 전국대회의 결의로 설치된 사회개발 특별위원회시민의식 개발’, ‘지역사회 조직’, ‘직업기술 교육등으로 세부 사업계획안을 작성하고 전국적 규모로 이를 실천에 옮겨 나갔다. 이들 사업은 1973년까지 활발히 진행된 후 70년대 중반부터 연맹에 의해 새롭게 착수된 농촌사업에 수렴되었다.

2) 신학적 자기반성-열린교회로의 전환 : 전세계적으로 YMCA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 YMCA1974목적과 사업연구위원회를 신설하여 한국 YMCA운동의 신학적 반성과 그 존재이유를 재규정하는 이른바 ‘YMCA 이념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념추구운동의 과정에서 한국 YMCA는 스스로를 하나의 열린 교회(Open Church)"로 자각하였다. 그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한국 YMCA1976년 제 23차 전국대회에서 한국 YMCA 목적문을 제정함으로써, 1973년 캄팔라원칙 수립 이후 자기 목적문을 가진 세계 최초의 기독교청년회가 되었다.

3) 협력사업과 지도력 양성 : 정체성에 대한 추구와 더불어 연맹 이사회는 전국의 가맹, 미가맹 YMCA의 연맹부담금을 각 도시YMCA의 전년도 결산의 2%로 책정하여 이 부담금 전액을 도시YMCA 회관재건에 충당토록 하는 전국 YMCA 균형발전을 위한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연맹 협력사업위원회는 1974년 규정을 개정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매년 착실한 성과를 거두어 가고 있다. 한편 전문지도력 양성과 관련하여 연맹은 정규대학 졸업자, 기독교회 수세자, 최소 1년이상의 YMCA 전일근무 경험자로 연맹 간사학교 수강 자격을 부여하고, 3학기에 걸친 교육을 마치고 논문이 통과된 자에 한해 간사자격을 주도록 엄격하게 규정함으로써 유자격 간사 양성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였다.

 

4) YMCA 운동담지체(Movement Constituency) 형성 : YMCA의 운동성과 청년성 회복을 목적으로 한국 YMCA70년대 초반부터 운동담지체 형성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같은 노력은 크게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첫번째 범주는 회원운동 차원에서 YMCA의 운동성과 청년성을 담아낼 수 있도록 그 회원구성을 젊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은 먼저 청년Y의 조직으로 나타났다. 청년Y30세 이하의 청년층을 대상으로 각 도시 YMCA내에 결성된 클럽을 기초단위로 하여 도시별 연대조직을 통해 전국조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9736월 제 1회 청년Y 클럽전국대회가 열린 이래 청년Y는 성장을 거듭하여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국대회 참가인원이 천명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현재는 해당 YMCA의 핵심 행동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학Y의 경우 1969년 대학사회에서의 하나의 증언을 위해 KSCF와 기구적 통합을 함으로써 현재 YMCA의 대학선교는 통합 KSCF로 이관되어된 상태이다. 그러나 80년대 이래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학생인구와 대학세계의 다양화 등 변화된 시대적 상황은 대학선교와 기독교 지도력 공급이라는 측면에서 이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속에서 전국에는 이미 약 80여개의 자생적인 대학Y 클럽이 대학, 혹은 도시YMCA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두번째 범주는 YMCA운동론과 운동구성체의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목적과 사업 연구위원회는 몇년에 걸친 ‘YMCA 운동론연구를 통해 앞으로의 YMCA 운동구성체는 전통적인 회원구조로부터 YMCA 시민운동 프로그램에 찬동하고 참여하는 시민들을 지역별, 사안별로 묶어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임을 제시하고 있다.

 

5) 민주시민사회운동 : 60년대 말 이래 민주시민훈련사업, 시민권익옹호운동, 시민캠페인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YMCA 시민운동은 80년대에 접어들어 한층 발전하여 YMCA운동을 대표하는 위치로까지 성장하였다. 민주시민훈련사업으로 6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전국 주요 대도시 YMCA의 목적사업으로 퍼져나간 YMCA ‘시민논단은 군사독재하의 통제된 언론이 담아내지 못하는 시민들의 민주여론을 수렴해 나감으로써 시민의 의견을 여론화함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민주적인 시민의 훈련에 기여하였다. 부당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권익옹호의 차원에서 전개된 시민중계실 사업은 1978년 서울YMCA에 의해 시작된 이래 전국 주요 YMCA표준목적사업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시민중계실사업에서 출발한 시민권익 옹호사업은 80년대 후반에 들면서 한국 YMCA가 전개해 간 포괄적인 시민주권운동의 초석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중반이래 본격화한 시민캠페인운동은 외채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자구운동’, ‘교육민주화를 위한 시민운동’, ‘공정선거감시 시민운동’, ‘양담배불매운동’, ‘향락문화추방운동’, ‘물가안정을 위한 시민운동’, ‘환경보전생활 시민운동’, ‘향락과소비추방 시민운동’, ‘청소년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운동등 시민사회의 주요 관심사에 대해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정책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전국 규모로 전개되었는데, 시민여론의 커다란 호응은 물론 시민운동체로서 YMCA의 존재를 시민들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6) 농촌사업 : 1974년부터 YMCA 사회개발사업은 농촌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이후 16년에 걸쳐 농촌사업을 시행하였다. 연맹주도하의 YMCA농촌사업은 1) 농민자신들의 이익을 기초로 하는 농민자신의 조직을 확대하는 일, 2) 농민을 의식화하고 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도록 농민을 교육하는 일을 그 과제로 삼아 3단계에 걸쳐 전개되었다. 16년에 걸친 농촌사업을 통해 거쳐 간 농민지도자의 총수는 2,000여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이 주축이 된 전국농민운동총연합회19905월에 탄생됨으로써 한국YMCA 농촌사업은 새로이 탄생된 농민조직으로 이관되어 갔다.

 

7) 노동조합 간부교육 : 산업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노동사회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게 됨에 따라 한국YMCA는 노동조합 간부교육을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연맹에 노동교육부를 신설하여 19881월부터 19914월까지 노조간부교육을 실시하였다. 중앙과 지방에서 3년동안 실시된 이 교육에 참가한 노동조합 간부의 총수는 1,673명이며 이들을 파송한 노동조합의 수는 897조합으로 전국 각지에서 고르게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 노동조합 간부교육을 위해 부산, 대구, 부천, 여수, 진주, 마산, 대전YMCA들이 교육과 그 후속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 특별사업을 통해 한국YMCA는 도시 중산층을 겨냥한 전통적 사업에서 벗어난 특별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8) 민족 통일운동 : 80년대 후반에 들어 사회의 점진적인 민주화 추세와 함께 통일문제에 대한 민간차원의 논의도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여타의 분단국들이 모두 통일을 이루어 한국만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게되면서 통일문제는 보다 절실한 민족의 과제로 등장하였다. 한국 YMCA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통일운동과 보조를 함께 하면서 통일운동에 참여해 왔다. 그 노력의 핵심은 반세기동안 깊게 패인 남북간의 상호불신관계를 YMCA를 포함한 종교 민간단체들의 노력으로 해소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86년 한국 YMCA 28차 전국대회는 한국 YMCA 독자의 통일운동 선언을 준비하기로 하고 목적과 사업위원회에 초안 작성을 위촉하여, 19904월 부산에서 개최된 제 30YMCA 전국대회에서 이를 채택하였다.

 

9. 21세기의 도래와 YMCA 정체성 위기에 대한 진단

 

YMCA의 정체성 - 하나님나라운동, 사중목적사업, 그리고 영성의 삼위일체

 

과거 사회복음 노선과 경건주의 노선 사이의 창조적긴장관계가 YMCA를 사유화하려는 교권주의 세력과 영성이 소진한 시민운동 세력의 갈등관계로 대치된 것은 아닌지? 깊은 자기성찰이 필요

 

 

대학Y의 현장조직화와 청년Y 운동의 활성화, Y's men운동의 대중화를 통한 지도력 충원구조의 확보, 청년성과 기독성의 충전

1930년대 향촌Y 조직을 모델로 한 주민조직 건설의 모색

YMCA 시민운동의 동력 형성과 관련한 영성 충전 방안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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