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광선 박사님께서 아시아태평양YMCA(APAY) 사무총장, 실행이사회 연석회의(2017. 3.)에서 “A Contemporary Mission of APAY in the Spirit of the Reformation”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신 원고를 ‘종교개혁과 YMCA운동 - YMCA운동은 제2, 제3의 종교개혁운동이다’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종교개혁과 YMCA운동의 시대적, 정신사적, 운동사적 맥락과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소중한 글이라 생각되어, 종교개혁과 에큐메니컬 YMCA운동의 이해를 돕고자 번역하였습니다.
서광선 박사님은 종교개혁운동과 에큐메니컬운동으로서 YMCA운동의 시대적 배경과 정신, 그 특성들을 일별하면서 YMCA운동의 ‘파리선언’을 제2의 종교개혁운동으로 규정하고 세계YMCA 미션선언문인 ‘도전21’을 제3의 종교개혁운동으로 제안하고 계십니다. 에큐메니컬운동과 YMCA운동의 동역자들의 일독(서박사님 원문)을 권합니다.
번역상의 오류와 애매한 부분은 무식이 용감하다는 첫 번역의 애교로 눈감아 주시고, 함께 첨부해드리는 서광선 박사님의 강연 영어 원문을 주 텍스트로 보시기를 권합니다. 서광선 박사님의 발표문은 APAY에서 발간한 “Revisiting the Reformation”에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 서박사님께서는 강연원고를 준비하셨으나 피치못할 개인 사정으로 직접 참여를 하지 못하시고 APAY 담당자가 대독하였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과 YMCA운동(서광선박사님 홍콩 강연원고_번역 최종본).pdf
170223_Mission_Review_Dr_David_Suh.pdf
종교개혁과YMCA운동
- YMCA운동은제2, 제3의종교개혁운동이다.
서광선박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
전 세계YMCA연맹 회장(1994-1998)
동방에서의 깨달음
사후저작인‘역사철학강의(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World History)’등 역사철학자로 잘
알려진 19세기 초엽의 독일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중세
가톨릭의 붕괴는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텅빈무덤’을 발견하는 충격적인 순간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교황은1095년, 이슬람 이단자들을 없애고 성지를 회복해서 기독교국가를 건설할 목적으로 팔레
스타인을 공격하기위해 십자군을 만들었습니다. 3년후인1098년, 첫 십자군은 예수의 성체(聖
體)를 로마로 가져가기위해 예수의 무덤이 있는 지역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텅빈 무덤이었습니다. 그 무덤은 이미 천년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첫 부활절에 여자들은 예
수의 육신을 보기 위해 무덤에 갔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데, 보니, 남자 둘이 옷을 입고 그들 앞
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부인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눅24:4-5)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텅빈 무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세상의
구원자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다는 서구 기독교국가의 커다란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이 중세 가톨릭 붕괴의 시작이었고,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의 텅빈 무덤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1275년까지 8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십자군은 14세기말까지 지속되었으나 성지를 완전하게
점령하는 것에는 실패했습니다.
계속되는 위기
십자군의 실패에 뒤이어 서구 유럽은 1337년에서 1453년사이에, 프랑스와 영국간의 소위
백년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게 됩니다. 우리가 프랑스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영국에 잡혀
마녀로 처형되었던 15세소녀 잔 다르크(Joan of Arc)를 들었거나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영토전쟁입니다. 더구나 유럽은 이 전쟁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흑사병으로 알려진 전국적인
전염병으로 인해 고통 받아야 했습니다. 백년전쟁 기간중인 1346년에시작돼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된 이 전염병은 땅과 사람들을 파괴했습니다. 유럽 인구의 20%가 이 질병으로
죽었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노동력의 축소와 함께 봉건제도의 붕괴를 촉진시켰습니다.
흑사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은 미신에 빠지게 되었고 교회는 적절한 치유대책을
만들기보다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 그 사람들을 파문했습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를 비판하는 95개조를 독일 비텐베르크
(Wittenberg)대학 예배당 문에 걸기 약100년 전, 영국 옥스포드(Oxford)대학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교황을‘반(反) 그리스도’의 하나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의
권위는 야만적인 전쟁으로 인해 교회의 힘이었던 수많은 군인들이 죽었고 십자군의 실패와
쇠퇴로 이미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힘이 약해지는 동안, 유럽 군주체제의
왕들의 힘은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of Canossa)’ 등에서 볼 수 있듯 교황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Dante, 1265–1321)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고리대금업자와 교황의 그림을 그려 넣은, 그의 유명한 작품, ‘신곡(Divine Comedy, 1308–
1320)’을 발표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중세 대학들과 집단지성
십자군의 결과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십자군의 몇 가지 긍정적인 결과는 기대하지
않았던 아랍과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텅빈
무덤에서 예수의 성체를 찾지 못했지만, 그들은 동양의 진보된 문화와 문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들은 유럽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철학과 신플라톤주의를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문명과 문화와의 접촉으로 유럽 인들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라틴어의 막대기 (스틱) 숫자,
I, II, III, V…X) 대신에 아랍의 수 개념인 아라비아숫자(0부터9)를 유럽에 소개하고 아랍의
계산방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십자군들은 또한 유럽발전의 물적 토대가 되었던 인쇄기계, 총포, 화약, 나침반 등의 기술들을
동양으로부터 받아들였습니다. 금속활자 인쇄기계는 이미 중국의 송(宋)왕조와 1234년경,
한국의 고려 왕조시기부터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기술자 구텐베르크(Johannes
Guttenberg)는1440년, 책과 잡지들을 인쇄하기 위해 금속활자 인쇄기계를 대중화 시켰습니다.
서유럽을 통해 그것들이 퍼져나감으로써 르네상스와 후기 중세의 문학적, 지적 활동들을 위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동양으로부터 총포(폭죽)와 특히 화약을 수입하면서, 그들은 유럽제국의
침략과 식민지 확장에 기여한 후기 십자군전쟁에서 유럽인들이 총을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같은 기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
1324)로부터 배운 나침반 기술을 이용하여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합니다.이러한
모든 발전들이 어울려서 현대 사회를 향한 관문을 여는 획기적인 선도적 역할을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같은 개화와 계몽의 씨앗은 9세기 볼로냐(Bologna)와 파리(Paris)에서 시작된
유럽대학이라는 풍부한 문화적 토양에 심어졌습니다. 유럽대학의 수는 11세기와 12세기 중반
사이에 증가했고 그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 시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미 81개의
고등교육센터가 있었고, 그 중 33개는교황에 의해, 15개는 정부연구소로, 20개는 이 둘의
협력으로, 13개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의 지적 성장에 도움을 주었던
대학들에서는 공공영역에서 로마의 법률과 의료뿐만 아니라 수사학,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을 가르치고 토론하였습니다. 첫 유럽의 중세대학은
18세부터 25세까지의 젊은 학생들로 채워졌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대학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재생하는 서구 르네상스운동의 온상이었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종교개혁가들
대부분이 유럽대학에서 배출 되었다는 것입니다. 독일 비텐베르크대학의 예배당 문짝에
걸렸던 터의 95개조 이전, 한세기 동안에는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
(Bohemia) 프라하(Prague) 대학의 학장이자 교수였던 후스(Jan Hus, 1369–1415)가 있었고,
이 둘은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들이었습니다. 루터의 동 시대에는 파리 고등학교를 나온
네덜란드 출신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와 튀빙겐(Tübingen)에서 공부하고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동료교수로 있던 멜란히톤(Philipp
Melanchton, 1497–1560)이 있었습니다. 루터와 동 시대의 독일 개혁운동가로는 라이프치히
(Leipzig) 대학에서 공부했고 급진적인 개혁운동가로 잘 알려진 토마스 뮌쩌(Thomas Muntzer,
1490–1525)가 있습니다. 그 이외에 바젤(Basel)대학에서 공부했던 스위스의 유명한
개혁운동가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파리 소르본(Sorbonne)의 학생이었던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1) 등이있습니다.
또한 영국의 개혁운동가들로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신약과 구약을 영어로 번역한
옥스포드 출신의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과‘ 순교자들의 전기(Biographies
of the Martyrs)’의 저자 폭스(John Fox, 1517–1587)가 있습니다. 그리고 캠브리지(Cambridge)
대학에서 공부한 [실락원]의 저자 존 밀턴, 에든버러(Edinburgh) 대학 출신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의 저자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 등이 있습니다.
이런 개관은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이 대학 지성인들이었으며,
종교개혁이 당시의 집단지성의 지식에 기반한 신학적, 정치적 운동에 의해 이뤄졌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르네상스시기를 뒤따르는 유럽의16,17세기의 시대정신을
대표했습니다.
르네상스는 고전학문과 인문주의, 즉 고전적인 언어와 문학, 고대역사,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예술의 재생과 갱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또한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라파엘(Raphael, 1483–1520) 등 로마 카톨릭 성당의
아름다움을 위해 일했던 높은 수준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높은 학문수준을 토대로 이 시대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은 그들의 활동에서
공동의 특성들을 아래와 같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1. 그들 대부분은 로마교회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부패뿐만 아니라 권력의 남용과
폐해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반대했다.
2. 그들은 공통적으로 성서를 자국의 언어로 번역했고 그것은 일반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서구 중세시대의 통용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그들 자국의
언어로 성서를 강의하고 설교했다.
3. 그들은 교회와 정부의 압력에 반대하여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대변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와 정부의 분리를 주장했다.
4. 그들의 대부분은 모든 인간존재가 신 안에서 평등하다고 설교 함으로써 현대 민주주의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
5. 그들의 대부분은 교육의 중요성, 특별히 라틴어나 자국의 언어로 읽고 쓸줄 몰랐던
당시 인구의 90%에 달했던 문맹자들을 줄이기 위해 일반 대중을 위한 공교육 시행을
강조했다.
6. 종교개혁가들은 종교와 정치의 권력자들에 반대하고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당시의 비판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과 맥락(context)에 대한 신앙의 책임 있는 기독교인의
행동이었다. 그것은 문화적, 정치적 맥락의 총체적 변 화와 변혁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교황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를 중단시키기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루터와 칼뱅(John Calvin)의 종교개혁운동
나는 종교개혁 시기에 가장 잘 알려졌고 중요했던 두 명의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뱅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종교개혁에 관해 말할 때 루터의 신학이 가장 자주 언급
됩니다. 왜냐하면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문짝에 그의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로마
카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같은 신앙을 상업화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등, 그의 용감한
학자적 행동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루터는 기독교인들, 일반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도 그들의 신앙에 대해
상식과 이성을 사용하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가 기독교 신앙이 아닌 미신을
촉진시키는 방법으로 면죄부를 팔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말로 표현하면, 기독교의 “세속화 (secularize)”와 종교와 복음의 비종교적
해석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루터는 매우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세 개의 sola, ‘믿음만으로(Sola
Fide), 은총만으로(Sola Gratia),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를 주장했습니다. 돈이나 직업,
권력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 단지 은총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루터는 교회의 권위, 즉 성직자들과 교황에 도전했고, 모든 믿는 이들의 성직화
(만인사제)를 주장했습니다. 루터에 따르면 모든 기독교 신앙인들은 성직자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해지고 성서 안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그리고 믿음에 의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위해서 사람들은 성서를 읽고 들어야하며, 일반 민중과 믿는 자들의 이와 같은 읽고
듣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야한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한 첫 번째 일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획기적인 문학적 종교적 작업의 중요성은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설교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칼 바르트(Karl Barth)가 강조한 바와 같이
개신교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바르트는 요한복음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한
육화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의 ‘말씀의 신학’에서 강조 했습니다.)
루터의 도전이 갖는 함축성과 영향은 과장될 수 없습니다. 그가 주장했던 만인사제설은 교회가
갖는 권위의 절대적인 힘을 깨뜨렸습니다. 생각과 인식의 이 중요한 변화는 모든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사상적 관점에서
이러한 인간이해는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적 인식의 시작이고, 계급과
카스트, 왕, 귀족 그리고 노예와 노예주와의 관계 단절 등, 중세봉건제도의 완전 파괴를
의미합니다.
.
셋째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루터의 신학적, 정치적 선언은 교회와
정치에서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참여를 고무시켰습니다. 루터는 평범한 교회
신앙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더 나아가 루터는 예배양식을 단순화 했고,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을 위해 다 함께 부를 수 있도록 독일어로된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세례와 성찬만, 이 두 가지 만을 공식적인 성례전으로 제정하였습니다.
루터의 교회 민주화는 어린이 교육을 위한 공립학교를 설립하도록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를
압박했습니다. 만인사제설이라는 혁명적인 신학적 이상으로부터 그는 모든 시민들을 위한
일반교육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루터는 사람들과 일반대중의 참여를 강조하여
교회의 주체이자 ‘주인’이 되게했습니다. 이것은 계몽주의와 근대 이후 사람들의 민주주의적
의식을 높였던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칼뱅에 관한, 1904년 독일에서 출판된 막스베버(Max Weber)의 유명한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이라는 것에 비추어 자본주의의 선구자로서, 아버지로서의 칼뱅의 역할과 관련된
삶과 가르침에만 주목하고자 합니다. 칼뱅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직업이나 노동이 하나님의 의
부름인 천직 즉 소명임을 강조했습니다. 칼뱅의 윤리는 직업윤리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노동윤리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직업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엄격하고 근면한 숙련된 노동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노동윤리는 아마도 근면하고 정직한 노동, 금욕주의, 검소한 생활, 그리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벌이의 저축으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칼뱅은 그의 예정론의 신학과
노동윤리를 결합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을 부자로 만드는 깨끗한 삶과 근면한
노동이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하나의 표시 또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칼뱅자신 스스로가
열심히 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2시간이나 3시간 만 잤으며, 하루에 한끼만 먹었습니다. 칼뱅은
그의 삶을 수도원의 수사처럼 살았습니다. 그의 프로테스탄트 윤리 안에서 그는 마치 수도원의
수사처럼 세속사회에서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칼뱅은 제네바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의
금욕적인 수도원의 수도사와 같은 삶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독재자라는 지탄을 받다가 결국
한때 제네바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스 베버는 칼뱅의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에 기반하지 않는 자본의 축적은
윤리적으로 지탄을 받아 마땅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부자되는
일을 “천민자본주의”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윤리나 도덕적 가치에
통제되지 않고 단지 인간의 욕심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한다면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후기현대사회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는 칼뱅의 금욕적 자본주의를 되살리고,
기독교윤리와 자본주의와의 올바른 관계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묻게 됩니다.
종교개혁 정신과 YMCA Mission
YMCA의 역사는 1844년 런던YMCA를 창시한 조지 윌리엄스 (George Williams)의 이야기와
함께 시작됩니다. 윌리엄스는 포목점을 운영하는 사업가였습니다. 루터의 시기와 같이
윌리엄스의 시대 또한 혁명의 시기였습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종교개혁의 시기였고, 그
이후 세기는 이성과 계몽의 시대로 간주됩니다. 윌리엄스는 대략 1760년부터 1870년까지,
산업혁명의 중반시기에 포목점에서 일했습니다. 산업혁명은 교통수단의 혁명적인 변화를 이끈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철로 만들어진 증기기관은 철로에서 기차를 끌었고,
철로 만들어진 선박은 최근에 점령된 식민지들로부터 광물과 목재 등 원자재와 수공업품들을
수입 운송했고 미국과 인도와같은 식민지 시장에 가공품을 상품으로 수출해서 판매한 돈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산업혁명은 생산방식을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기계로 대체시키고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맑스(Karl Marx, 1818–1883)는 이 변화를 일하는 사람들의 소외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 상품으로부터의 소외 등)로 분석했습니다. 즉, 노동자는 자신들의
노동으로 만든 제품이나 생산물의 주인이 아니라 기계공정 과정에 들어간 하나의 기계
부속품으로서, 그들의 노동력을 파는 단순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을 통해 이것을 설명하고 있고, 이와
같은 생산형태와 산업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전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 인권과 자본주의의
종식을 위한 단결을 촉구했습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새로운 공장들은 도시에 집중되었으므로, 노동 인구의 도시집중을
촉진하면서 時골의 농업공동체는 급속하게 황폐화 되어갔습니다. 구체제의 귀족과 상류사회가
점차 소멸되는 동안 새롭게 떠오르는 산업가들과 사업가들은 새로운 중산계급으로 자리잡아
갔습니다. 윌리엄스가 살았던 시대는 또한 산업혁명으로 인해 대영 제국과 유럽의 밖으로부터
더 많은 철광석과 원자재료들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제국들의
식민지주의가 확장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같은 산업화의 힘은 그들의
생산품을 팔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새롭고 강력한 무기를 들
고 다른 대륙의 땅과 사람들을 정복하기 위해 항해해 나갔습니다. 산업혁명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확장을 촉진시켰습니다.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은 산업혁명으로 그리고 이성과 계몽주의의 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16세기에서 19세기는 유럽대륙에서는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 스피노자
(Spinoza, 1632–1677), 라이프니쯔(Leibnitz, 1646–1716), 칸트(Kant, 1724–1804) 등에 의해서
그리고 대영제국에서는 베이컨(Bacon, 1561–1626), 로크(Locke, 1632–1704), 흄(Hume, 1711–
1776) 등에 의해서 근,현대철학이 성장한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인식론과 정치철학들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법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과학과 기술 등 근대성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YMCA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윌리엄스가 이 1840년대의 산업혁명이 노동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 아직 프랑스에서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과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서구 기독교국가들의 기반인
하나님의 자연세계 창조를 부정하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을 1859년
출판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생물학자인 다윈 이전에 뉴턴(Isaac Newton, 1642–
1727)은 중력의 법칙으로 물리학과 수학의 새로운 세계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바로 이기간에
하이든(Haydn, 1732–1804), 모짜르트(Mozart, 1756–1791), 베토벤(Beethoven, 1770–1791),
슈베르트(Schubert, 1797–1829) 등에 의해 고전 음악의 가장 창조적인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윌리엄스의 시대는 또한 예술과 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창조성이 폭발했던 빅토리아(Queen
Victoria) 여왕의 시대였습니다. 영국에서는 낭만파 시인인 워즈워드(Wordsworth, 1831–1894)
와 단편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롤(A Christmas Carol)’과 ‘어려운 시절(Hard Times)’로 유명한
디킨즈(Charles Dickens, 1812–1870), 그리고 제인 에어(Jane Eyre)의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 1816–1855)와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의 작가인 그의 여동생 에밀리(Emily
Bronte, 1818–1848) 등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과 여성주의를 위한 작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Dostoyevsky, 1821–1881)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모빅딕(Moby Dick)’의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79–1891)
그리고 시인 에드가 포우(Edgar Allen Poe, 1809–1849) 등이 당대에 활동하던 대표적인
작가들입니다.
종교개혁의 시기부터 이성과 계몽주의의 시기까지, 유럽인들은 종교의 자유, 사상과 학문의
자유, 개인의 자유, 관용, 협동과 진보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가치는 오로지 유럽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믿음체계와 가치를 배반하고 다른 세계를 침공했으며, 무기와 군함을 앞세워
비서구문명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땅까지도 파괴했습니다. 한동안 인류는 유럽의 수많은
지역에서 만, 수 많은 발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서구 군대가 다른 세계로-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그리고 피에 물들었던 파괴적인 침략의
시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대영제국은 공식적으로 1817년에 인도를 식민지화했습니다.
중국에서는 1839년 첫 아편전쟁이 발발한 이후 3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가장 역사적인
역설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군함을 앞세운 식민주의자들과 함께 아시아로 왔고, 사랑과 평화의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태평양 지역에서 첫 YMCA인 오스트레일리아
YMCA는 1851년 창립되었고, 그 후에 1854년 인도 캘커타에, 1855년 뉴질랜드, 1876년
파키스탄, 1880년 일본, 1882년 스리랑카, 1885년 중국 푸저우(복건성), 1897년 부르마,
1898년에는 필리핀에 YMCA가 창립되었습니다.
제 2의 종교개혁으로서 YMCA운동
런던의 한 사업가였던 조오지 윌리엄스는 이런 시대사조와 정신 속에서 12명의 젊은
노동자들과 성서연구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인 2017년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YMCA운동이 종교개혁운동을 사실상 계승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닫게됩니다. 나는
YMCA운동이야말로 제2의 종교개혁운동이었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계속해오고 있는
운동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로마교회의 위기에 직면해서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대적
도전들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된 것처럼, 조지 윌리엄스에 의해 시작된 처음의 YMCA운동은
산업혁명의 시대적 도전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응답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YMCA운동은
산업혁명과 이성과 계몽주의세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YMCA운동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대부분 일반 신앙인들과 자원 봉사자들에 의한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가들이 대부분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신학자,
성직자, 그리고 학자들이었다면 조지 윌리엄스와 1855년 파리기준을 작성했던 YMCA
지도자들은 일반신앙인들, 즉 평신도들이었습니다. ‘만인사제설’이라는 루터의 슬로건이
YMCA운동에서 현실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YMCA는 그 시작부터 기독교 청년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YMCA운동은 교회의 통제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구조에서도 벗어나 있었습니다.
만약 YMCA를 교회라고 주장 한다면, 칼뱅이 제시했던 범주에 따라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조지 윌리엄스는 젊은 노동자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했습니다. YMCA운동은 이처럼 확고하게 ‘오직 성서 만으로’라는 프로테스탄트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YMCA운동은 복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YMCA운동의 기독교적
정체성은 성서에 기반하고 성서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이 파리기준을 인용하기
좋은 시점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청년회는 성경대로 예수그리스도를 하느님과 구주로 믿어 그 신앙과 생활에서 그의 제자되기를 원하는 청년들을 하나로 뭉치고 또 그 힘을 합하여 청년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1855년 8월 22일 세계기독교청년회연맹 창립총회에서 채택, 1955년 8월 파리 백주년 기념 세계대회에서 확인)
넷째로, YMCA운동은 파리기준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행동과 실천으로 추구하는 운동입니다. 즉, 예수의 제자로서 그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최초의 종교개혁가들의 출발이기도 했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신앙을 행동과 실천으로
YMCA운동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종교개혁가들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YMCA운동은 교회와의 관계에서 나왔고, 대변화의 시기에 격동의
사회적, 정치적 전환의 세상 안에 나아가 기독교 청년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압축적으로 말하면, YMCA는 교회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고,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현실을 바꾸고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입니다. YMCA는 개인 영혼을 위한 것 만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 공동체들을 위한 운동입니다.
다섯째로, YMCA운동은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노력한다고 파리 기준에
명시했습니다. 다른 세상, 저 세상에서가 아니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즉, YMCA의 미션과
목적은 이 땅 위에서 그리고 세계의 젊은이들 사이에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일입니다. 루터는
두 왕국을 이야기 했지만, 이제 저 세상에서의 하나님통치라는 이야기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YMCA운동은 불의, 억압과 착취에 항거하고 정의롭고 공평하며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의 평화와
조화를 촉진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정치 운동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여섯째, YMCA운동의 에큐메니컬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YMCA운동이 제
2의 종교개혁운동으로 불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YMCA운동은
시작부터 설립자의 특정교파 소속, 루터교든, 장로교든, 성공회든, 감리교든, 개혁주의 멤버든,
퀘이커든, 침례교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905년 세계연맹총회이후, 가톨릭과
정교회 기독교인들이 YMCA의 정회원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남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는
불교신자들, 무슬림들 그리고 힌두 리트들의 YMCA 회원가입이 허용되었습니다. YMCA운동은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YMCA운동은 인종과 성, 계급 그리고 종교에 따른 차별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인회원으로서 그리고 한 조직으로서 YMCA의 생활양식은 칼뱅의 노동윤리를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즉 건강한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으로 정직하고 근면하게 일하는 잘
훈련된 사람입니다. 만약 YMCA의 교육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람을 위한
전인교육입니다. 만약 YMCA가 하나의 이상적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 예수를 따라,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Challenge 21
개인적으로, YMCA 미션선언문인 ‘도전21’에 관해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이 큰 기쁨이자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도전21’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세계YMCA연맹
회장으로 봉사했던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1991년 세계Y 서울총회 이후 바로 ‘선언문 작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선언문 작성까지 8년이 걸렸습니다. 국제적으로 구성된 ‘작성위원회’는 매우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위원회 멤버들은 모두 6개 대륙에서 청년과 노인, 남성과 여성, 일반신앙인과 목
회자, 가톨릭과 개신교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모두 다른 영어 액센트와 각자 나라의 다른
발음을 영어를 구사하는 YMCA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대의 YMCA운동은 1998년, 14차 세계YMCA 독일 총회에서 ‘도전21’을 YMCA운동의
미션선언문으로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도전 21”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 번째 천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1855년에 채택된 파리기준이 YMCA사명의 근간임을 확인하면서, YMCA가청년들의 진정한 참여를 강조하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아우르는 기독교운동이며, 에큐메니컬 정신에 기초한 자발적인 운동임을 선언한다. 또한 YMCA는 모든 피조물이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의에 기초한 사랑과 평화 그리고 화해의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기독교적 이상을 나누기 위해 애쓸 것이다.”
나는 만약 1855년의 ‘파리기준’이 제2차 종교개혁선언이었다면, ‘도전21’는 제3차 종교개혁선언이라고 감히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YMCA는 각자가 처한 고유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우선적으로 제기되는 도전들에초점을 맞출 것을 요청 받는다. 1973년에 채택된 캄팔라원칙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이러한 도전들은 다음의 내용을 포함한다.”
1.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며, 개인의 영적, 지적, 신체적 안녕과 건강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 일한다.
2. 모든 사람들, 특별히 청년과 여성들이 더 큰 책임을 맡고 모든 영역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들의 역량을 키우고, 형평성 있는 사회를 위해 일한다.
3.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북돋우며, 아동의 권리를 증진시킨다.
4. 신념과 이념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대화와 파트너십을 증진시키고,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하며, 아울러 문화적 갱신을 촉진한다.
5. 가난하고 착취당하며,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과,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으로 억압받는 소수자들과 함께 연대하여 일한다.
6. 분쟁이 있는 곳에서 중재자와 화해자의 역할을 추구하며, 모든 이들이 자기 결정력을 갖기 위해 의미있는 참여와 진보를 할 수 있도록 일한다.
7. 하나님의 창조물을 파괴하려는 모든것으로부터 피조물을 보호하며, 미래 세대를 위해 지구의 자원을 보전하고 보호한다.
“이러한 도전에 응하기 위해 YMCA는 모든 단계에서 자기 스스로의 존속과 자결을 가능케하는 협력의 패턴을개발할것이다.”
오늘, 이 강연이 끝난 뒤에 계획된 분반 토의에서, 다음의 질문을 중심으로 토의해 주시기를 제안합니다.
1. 오늘의 아시아와 세계의 상황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화적 종교적, 사회 경제 정치 적 이슈와 도전이 어떤 것인지 검토하는 일,
2. 위에서 논의한 아시아와 각국의 현실에서 나라마다의 YMCA 운동을 성찰하면서 나라 별로 YMA 목적문이나 정책 선언문을 기초하여야 하는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 YMCA 연맹 나름대로의 묵적문이나 선언문이 필요한지, 아니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전 21”이 우리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상황에 적절한 것인지 검토하는 일.
감사합니다.***
APAY 발행 2017.3.
APAY 홍콩간사학교에서 (2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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