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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 회복을 위하여 : 종교개혁, 루터, 에큐메니성

by yunheePathos 2017. 4. 27.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 회복을 위하여

: 종교개혁, 루터, 에큐메니성

Kung Lap Yan (龔 立人) / 홍콩 중문대 교수

 


* 이 글은 APAY에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발간한 "Revisiting the Reformation"에 실린 홍콩 중문대 Kung Lap Yan (龔 立人) 교수의 글 "Reclaiming the True Church of Jesus Christ: The Reformation, Luther and Ecumenicity"을 번역한 것입니다. 개인 공부를 위해 번역한 것이라서 번역이 엉성합니다만, 신학 비 전공자들과 에큐메니즘에 대해 관심하는 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올렸습니다. 이 글은 루터의 교회관과 신앙과 봉사의 이해, 3S(Sola) 그리고 복음과 에큐메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첨부해드리는 영문 원고의 일독을 추천드립니다. 

Kung - Reformation and ecumenicity(번역).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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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과 개신교 내의 루터교, 개혁교회, 메노나이트 등등의 교회의 분열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종파의 분열은 이미 1054년 로마와 비잔티움 사이에서 발생했다. 다른 한편, 로마교회와 루터교는 1999, ‘칭의(稱義)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JDDJ)을 발표했고, 메노나이트는 2006년에 이에 함께했다. 이것은 로마교회의 지위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탈중심화)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종교개혁의 결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일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분열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만약 교회의 일치가 제도와 구조[1]가 아니라 나눔, 참여, 공동체 등에 의해 특징화된 친교라고 한다면, 종교개혁 시기의 가톨릭은 친교의 정신을 반영하지는 않았었다. 역설적으로 새로운 교회의 출현은 우리가 교회 일치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일부 더 급진적인 종교개혁가들은 로마교회 전체를 비난하려 했지만, 이것이 루터의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로마교회를 비판했으나 여전히 로마교회가 거룩하다고 생각했다. ‘Galatia에 관한 논평(Commentary on Galatian, 1535)에서 그는 로마가 비록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나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성례, 복음의 말씀, 성경, 교회의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이 아직 남아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성스럽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복음, 세례 등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사람들 가운데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다.[2]

1540, 그가 더 급진적인 개혁가들로부터 도전을 받았을 때 루터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우리는 교황의 권위 아래에서 기독교와 선함이 더 많다고 고백한다; 참으로 기 독교와 선함의 모든 것이 그곳에서 찾아지고, 그 근원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 참된 성경, 참된 세례, 참된 제단의 성례전, 죄 사함을 위한 진정한 열쇠들, 사역의 진정한 공간 [3]

루터는 단지 그가 소속되어 있던 교회에서 교회의 권한 남용에 대해 저항했을 뿐이다. 그는 로마교회와의 대화를 통해 칭의와 그 외 다른 문제들에 대한 합의를 위해 노력했다. (Speyer/Hagenau [1540], Worms [1540–1], Regensburg [1541–1546]). 불행하게도, 이 같은 모든 시도들은 실패했다. 루터가 목표했던 것은 로마교회를 복음적 교회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순절교회와 종교개혁 사이에 어쨌든 복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루터에 따르면, 만약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복음적 교회라면,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재현이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위해 일하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이 글은 교회 일치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이 우리의 실천을 풍부하게 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성찰하기 위해 루터를 참고하고자 한다.[4]

 

복음은 우리를 일치시킨다.

은혜의 하나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라는 루터의 질문은 일에 지친 사람들의 개인 실존의 문제로만 국한될 수 없다. 사실, 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떻게 참된 교회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촉발시켰다. 루터의 개인에 대한 실존적인 관심 보다 교회학적인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루터 당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믿음이 일반적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로마교회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는 것을 전제했지만, 로마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실천, 가르침 그리고 믿음에 대한 비판이다. 교회의 가장 소중한 복음이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로마교회를 개혁하고 개선하고 갱신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교회가 모든 인류와 창조물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내는 표시이자 도구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서 로마교회를 제거할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교회를 교회로 만드는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교회를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로 정의한다.  루터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두 가지를 덧붙였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7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1530):

교회는 복음이 순수하게 가르쳐지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에 관한 전통적인 네 개의 언급과 루터의 추가는 전자는 존재론적인 속성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현상학적인 언급이다. 루터에게 설교와 성례전은 복음의 표현들이다. 폴 에이비스(Paul Avis)루터는 복음의 순결함에 그리고 칼뱅은 교회의 순수함에 우선적이었고 열정적으로 관심했다고 정확히 기술했다.[5] 루터에게 교회를 정의하는 것은 복음의 순수함이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루터는 스콜라신학에 대한 논쟁(The Disputation Against Scholastic Theology , 1517)에서 순수한 복음은 어느 누구도 은혜가 없이 사람의 능력을 훈련하는 것으로 정당화되는 은혜를 가치 있게 준비할 수 없다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율법을 이행할 수 없다. 누구도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루터는 1517 10 31, 비텐베르크 성의 교회 문에 붙인 95개 조에서 방종을 비난했다. 99개조 중 33조는 다음과 같다:

스스로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방종의 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생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95개 조는 공개적인 행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논쟁을 위해 계획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루터는 95개 조 중 첫 4개의 제안들을 제외한 나머지 명제들은 자신의 확정적인 주장이 아니라 논쟁을 위해 작성된 제안들임을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1518 11, 교황 레오10세는 그의 교서를 통해, 성서와 성부에 대한 상관없이  교회의 가르침을 규정할 수 있는 그의 힘에 대해 밝혔다. 이 교서는 루터가 다음의 입장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만약 내면의 평화를 진정으로 찾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이 교황의 권위가 아니라 교황에게 약속을 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들의 신념을 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갖고자 하는 것을 교황이 허락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받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갖는 것이다. 당신은 단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당신이 믿는 만큼의 것을 갖는다. [6]

바빌론 포로기의 교회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에서 루터는 복음이 사제들과 성례전의 복잡한 체계를 통해 제도교회의 포로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성례전은 잘 팔리는 시장이 되어 사람들은 그들의 공로를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복음이 인류에게 값싸게 주어진, 하나님 백성의 믿음을 양육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신앙에 의한 칭의의 교리가 교회가 서거나 추락하는 근거가 되는 문서임을 설명한다. 교회를 만드는 데는 말씀의 선포만이 필요하다. 말씀은 훌륭한 교회의 표식이고, 복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자유로움과 사랑을 경험하는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는 복음이다. 그와 반대로 로마교회의 위계 구조와 전통은 교회를 자기 절대화와 독선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로마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었다. 95개조의 첫 명제는

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4:17) ”고 말씀하셨. 그는 믿는 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했다.”

무엇이 교회를 일치되게 만드는가? 그것은 구조가 아니라 복음이다. 그것은 전통과 심지어 죽은 교리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이다그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하여금 이미 하나됨 속에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고, 개신교로 하여금 존재하고 있는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보일 수 있는 역량을 갖도록 북돋운다.

 

예배의 일치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이다. 예배는 기독교인들의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예배로 초대된다. 이것은 봉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오는 부름이다. 예배 참가자들은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예배 안에서 모든 인간적 성취 차이 그리고 인간이 만든 장벽내려 는다. 예배에서의 이런 영적 경험은 인류학자인 빅터 터너가 경계인(liminality)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무엇이 있다. 터너에 따르면, 경계의 사람들은 사이에 있고, 이전에 한 부분이었던 사회에 소속되지 않고 아직 그 사회 안으로 통합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경계에서 강렬한 공동체 정신과 위대한 사회 평등의식, 연대감 그리고 동류 의식을 경험한다.[7]  터너에 따르면, 이것이 공동체이다.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확대해 보면 이것도 경계의 한 종류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그 자체로 종말론적인 희망의 행동이기 때문이다.[8]

기독교 예배는 교부시대의 예배식(leiturgia, 전례, 백성의 일)을 사용하곤 했지만, 전례는 말씀과 성례전에 예배 순서의 의미를 지닌 미사로 점차적으로 대체된다. 전례에서 미사로의 변화는 단지 말씀을 사용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예배의 순서를 강조하는 것은 첫째, 공동체의 경험보다 구조에 대해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터너에 의하면, 구조는 사람들을 많든 적든 간에 분리하는 여러 유형의 평가를 통해 구조화되고 차별화된, 그리고 종종 정치적, 법적, 경제적인 위계 시스템의 사회로 정의된다.[9] 이런 의미에서, 미사는 모임의 종말론적 의미를 전하기보다는 사회구조의 단순한 축소판이 된다. 달리 말하면, 예배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도전보다는 사회 통제의 한 방법으로 이용되곤 한다. 둘째, 사람들은 예배의 참가자가 되기 보다는 구경꾼이 된다. 일반 신앙인들은 행렬을 하고 찬송(특히 독일에서)을 부르거나, 가톨릭 성체 성서의 봉헌에서 성체를 거양하는 성찬식을 보거나, 신앙고백을 하고 사제로부터 죄의 사함을 받는 등으로 성례전에 참여한다. 그리고 축제(박람회, 카니발, 전례(典禮), 기적극 등)와 성인들의 축일 등을 기념하는 행사 등을 통해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참여가 참여자로 간주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등하게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자였고 미사에서 사용되는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참여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루터는 참된 예배를 다시 만들기 위해 교회의 바벨론 포로시대’(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미사의 남용‘(The Abuse of the Mass, 1521)에서 성례전 제도를 공격했다. 루터는 세가지 면에서 성체성서의 실제를 비판했다. 첫째, 잔은 일반 신도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둘째, 성찬례의 신비는 화체설(化體說)의 교리로 합리화되었다. 셋째, 미사는 그리스도의 선물로서 그의 교회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한 일과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

예배식(전례) 제도에 대한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금은 하나님의 전례를 완전히 폐지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부패하게 하는 나쁜 것들로부터 지금 사용되는 성례전을 정화하려는 것이고, 복음적인 사용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미사를 부인할 수 없다. 빵과 포도주의 성찬은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하나의 신성한 의식이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 행해졌다. 그것은 처음에는 더해지는 어떤 것이 없이 아주 단순하고 복음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의 새로운 생각들이 그것에 덧붙여졌고, 미사와 성만찬이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내려온 것은 아무 것도 없다.[10] 

그의 예배식 개혁에 관한 신학적 관심 이외에, 루터는 사람들이 예배에 즐겁게 그리고 의식을 갖고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것은 그의 교육적 관심이었다. 루터가 소개했던 것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면, 첫째, 루터는 사람들이 예배를 이해하고 의식적으로 참여하도록 독일 예배식으로 미사를 드렸다. 비록 그는 사람들의 요청으로 독일미사와 예배규정 (German Mass and Order of Service, 1526)을 만들었지만, 루터는 독일 예배규정을 절대화할 의도는 없었다. 그보다 그는 각 지역에서, 각 지역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예배 순서를 정하는 것을 격려했다. 더구나 루터는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가 충족될 수 있도록 전통적인 양식과 지역적인 양식으로 나란히 각각 미사를 드렸다. 둘째, 루터는 회중의 찬송가를 유용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또한 사람들이 미사 때의 층계송(Gradual)이나 성가곡(Sanctus)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양 (Agnus Dei)으로 시작되는 성가 등 미사 동안 부를 수 있는 독일어로 된 많은 노래들이 있기를 원한다. 과거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노래들을 불렀으나 지금은 단지 주교의 축복에 대한 응답으로 성가대만이 노래를 부른다. 사실, 이런 노래들은 모든 미사가 토착어로 드려질 때까지 라틴어 노래 이후에 바로 불려지거나 또는 격일로, 첫날에는 라틴어로 그 다음날에는 토착어로 부르는 것을 주교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에서 자주 부를 수 있는 믿음이 깊고 영적인 값진 노래들을 만들 수 있는 시인이 부족하거나 그런 사람을 아직 모른다 [11]

루터는 회중이 원래 참여했던 미사의 부분을 합창단이 차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노래하게 하려는 그의 바람을 분명히 했다. 그는 그 자신의 신도들이 노래하는 것을 격려했으나 합창 예배를 없애지는 않았다. 이 관점은 Georg Spalatin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Georg Spalatin, 1523)에 나타난다. 루터는 사람들이 준비되었을 때 전례에 대한 원하는 변화를 소개하기 위해 매우 의식적 이었음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했다. 루터의 전례 개혁에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관심사는 동전의 양면이다. 셋째, 사제들과 일반 신자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의 낮은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루터는 일반 청중들을 위해서는 얇은 규모의 교리문답집을, 사제들과 잘 교육된 일반 신도들을 위해서는 두꺼운 교리문답집을 만들었다교리문답집의 중요한 특성은 그것의 에큐메니컬 정신이다. 교리문답집은 단지 루터의 신학뿐만 아니라 교회의 오랜 전통 위에 만들어 졌다.[12]

           기독교인은 우리가 단순히 예배로 불림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 참가자들이 평등하게, 의식적으로 그리고 공동으로 예배에 참여하기 때문에 예배 안에서 일치가 된다. 현대의 교회들이 침례, 성찬 그리고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1982)에 관해 합의에 도달한 것은 올바른 조치이다. 그러나 예배서의 일치는 또한 예배 참가자들의 평등함, 의식 그리고 공동의 참여에 관한 것이다. 이 요구는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신앙과 봉사의 일치

           로마교회의 방종의 행위로 나타난 신앙의 선행에 대한 왜곡된 견해로 인해, 루터는 하나님으로만(Christ Alone)’, ‘믿음만으로(Faith Alone)’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하나님으로만믿음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떤 선한 일을 반대하는 것이지, 선한 일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만으로을 어떻게 정당하게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가?

루터는 신앙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다. 삶의 모든 상황과 시간은 신앙 안에서 살거나 불신앙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행은 신앙의 구체적인 이해이고, 신앙은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

The Book of Romans (1522)서문에서 루터는

불에서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신앙으로부터 일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선한 일을 해야만 한다.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에 필요하다.”

선한 일은 자신의 신앙의 실천이다. 오로지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 신앙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깨닫기 시작할 수 있다. 이처럼 훈련된 신앙을 자신의 신앙으로 실천하자. 루터는 일은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고 신앙은 일에 의해 강화된다.”[13]고 썼다. 

믿음과 일의 분명한 차이는 인간 존재는 하느님께 속한 것이고, 이 인간 존재의 일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 이웃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루터가 정통성을 발휘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삶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만큼이나 우리 사이에도 나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나쁜 삶에 대해 비난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도덕적 삶의 질을 위해 싸웠던 위클리프(Wycliff)와 후스(Hus)는 이것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나는 내가 경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나의 입장을 세우고 싸운다. 그것은 나의 소명이다. 교리에 대해 논쟁하는 일은 지금까지 결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교리를 갖고 삶에 대해 싸웠다. 그러나 교리를 취하는 것은 목으로 거위를 붙잡는 것이다. 복음이 순수하게 남아 있을 때, 삶의 질이 우리를 어렵게 할지라도, 삶은 그것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그 위치에 있는다. 그것은 모든 것이 말씀의 순수함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올바르게 가르쳐왔다면, 나는 성공하고 있다.”[14]

루터에게 교회는 봉사와 선행의 윤리가 아니라 의인(義認) 위에 세워진다이것은 일치에 대한 윤리적인 표현을 거부하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가 교회 일치의 열쇠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일치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열쇠이다.

           신앙과 봉사에 있어 그리스도 만으로의 의미는 루터의 유명한 말 중 하나인 다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기독교인은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주인이다. 기독교인은 모든 것에 복종할 수 있는 완벽히 순종적인 종이다.”[15]       

선언의 후반부가 없다면 기독교인의 자유는 비뚤어지기 쉽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자유는 단순히 독립된 자아의 도덕적 통제에 관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선언의 전반부가 없다면, 기독교인의 자유는 쉽게 남용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자유는 단순히 모든 정치적 권위에 맹목적인 복종이 되기 때문이다. 선언의 변증법적 특성은 그리스론에 근거한다. 다른 한편, 기독교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모든 창조된 것들과 권력은 기독교인에게 권위를 갖지 않는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의 겸손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의 구현이다( 2:4-11).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친교(성찬식)로 이끌린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이웃에게 행하는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교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외의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그리스도이다. 또한 그것은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나누는 것은 우리를 초대하는 그리스도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 안에서 자신만을 위해 혼자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사람을 위해 산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산다.”[16]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성에 관한 것이다. 루터의 믿음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는 교리는 분열되게 하지만 봉사는 일치되게 한다라는 현대의 믿음과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17] 교리는 분열되게 하지만 봉사는 일치되게 한다는 무슨 의미인가? 첫째, 신학적으로 교리가 분열시킨다는 것은 복음을 죽은 교리로 바꾸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차이를 포용함으로써 항상 우리를 일치시킨다. 둘째로, 문화적으로 교리가 분열시킨다는 것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정체성은 차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차이는 반드시 분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함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교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적절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셋째, 도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비 그리스도인들과 이웃을 위해서 일하는 것에 어떤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류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 우리는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설명은 신앙을 기반으로 한 비정부 조직에게 신앙이 그들의 봉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돌아보는데 도움을 준다.

 

나가면서

모든 세대의 교회들은 그들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교회 개혁을 요청하고 이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교회 개혁의 핵심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를 되찾는 것이고, 예수 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일치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교회 일치의 중요성은 그것이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하나님나라의 미래 친교, 즉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한 새롭게 된 인류를 나타냄을 의미한다.

울프하르트 파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기독교 에큐메니컬 운동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세속사회(정치 세계) 안에서도 다양성과 일치의 양립 가능성을 위한 모델을 동 시대에 만들어내지 않으면 이 미션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한다그는 더 나아가 만약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다원주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성공했다면, 그들은 정치적인 삶에도 유효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 광의의 도덕적 일치가 결합된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18]

교회는 하나의 하느님 아래에서 모든 사람들 일치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표시이기 때문에, 교회의 분열과 타락은 예수 말씀의 진리를 가리는 것이다. 루터의 삶은 절대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예배 안에서 그리고 이웃에 대한 봉사에서 기독교인들을 일치시키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개혁의 유산과 함께 용감하고 겸손하게 개혁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1] Heindrich Holze, The Church as Communion (Geneva: LWF Publication, 1997).

[2] Martin Luther, Luther’s Works, trans by Helmut T. Lehman and Jaroslav Pelikan (St. Louis: Concordia and Philadelphia: Fortress, 1955-1986), vol. 26, pp.24-25.

[3] Scott H. Hendrix, Martin Luth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47.

[4] My concern is different from Theodor Dieter, ‘Luther Research and Ecumenism’, Dialogue, 47: 2 (2008), pp.157-166. His focus is on doctrinal ecumenism and how this can be proceeded.

[5] Paul Avis, ‘The True Church in Reformation Theology’,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30 (1977), p.322.

[6]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 31, p.104.

[7] Victor Turner, Ritual Process (New York: Transaction, 1995).

[8] James K. A. Smith, Desiring the Kingdom (Grand Rapids: Eerdmans, 2009), pp.155-214.

[9] Victor Turner, Ritual Process, p.96.

[10]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 53, p.20.

[11] Ibid., vol. 12, p.218.

[12] Eero Huovinen, ‘Doctor Communis? The Ecumenical Significance of Martin Luther’s Theology’, Lutherjahrbuch, 80 (2013), pp.13-30.

[13] Martin Luther, Luther’s Work, vol. 44, p.79.

[14] Ibid., vol. 54, p.110.

[15] Ibid., vol. 34, p.344.

[16] Ibid., vol. 31, p.364.

[17] Carter Lindberg, ‘Luther’s Critique of the Ecumenical Assumption that 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27: 4 (1990), p.679-696.

[18] W. Pannenberg, Faith and Reality, translated by John Maxwell (Philadelphia: Westminster, 1977),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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