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학생YMCA
장규식 / 중앙대 사학과 교수
YMCA학생운동은 협성회의 후신으로 1901년 배재학당에 학생YMCA가 조직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낸 이래 일제시기를 관통하며 전개된, 부르주아민족주의 진영 학생운동의 유력한 한 축이었다. 일제하 YMCA학생운동은 각 학교의 학생YMCA, 지역단위 연합조직과 전국대회에 해당하는 하령회 등으로 그 체계를 갖추고, 3‧1운동 과정에서 학생독립운동의 산파역을 담당하였다. 이제 1910년대 YMCA학생운동이 3‧1운동으로 귀결되기에 이르는 운동의 내적 맥락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YMCA학생운동은 본래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프론티어적 선교운동이자, 교파와 지역의 구별을 떠나 세상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이었다. 먼저 YMCA학생운동의 프론티어적 면모와 관련하여, 학생YMCA는 초기부터 지방 전도대 파송, 주일학교와 야학의 개설, 교회의 개척 등 프론티어적 선교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한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차원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에큐메니칼운동의 차원에서 지상천국의 건설과 확장의 문제는 결국에 가서 인생의 정치·사회적인 국면까지를 포괄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YMCA학생운동의 에큐메니칼한 성격은 교파와 지역을 떠나 전국의 기독학생들을 하나로 묶는 유력한 틀이었던 학생 하령회운동에 잘 나타나 있었다. 기독학생 하기 연합수련대회에 해당하는 하령회를 통해 YMCA학생운동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해 나갔다. 그리고 ‘105인사건’과 維新會를 통한 YMCA 친일화 기도 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드세어지는 속에서도 전국조직으로 조선YMCA연합회를 출범시킬 수 있었다. 조선YMCA연합회의 창립에 참여한 10개 YMCA 가운데 시청년회로 중앙YMCA를 제외한, 9개 YMCA가 모두 학생청년회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비록 한국 기독교세의 거의 절반을 점하고 있던 관서지방의 경우 교파‧지역‧신앙노선상의 문제로 당초 YMCA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 또한 1916년 제6회 학생 하령회가 평양에서 개최되면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이 대회 직후 차리석이 장로회‧감리회 양대 교단의 합동 필요성을 제기한 것도 그러한 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운동 거사 준비과정에서 장로회와 감리회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연합을 하고, 나아가 천도교계·불교계와 제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는 역사적 전거가 바로 여기서 마련되고 있었다.
이처럼 YMCA학생운동은 자체의 프론티어적 면모와 에큐메니칼한 성격 속에서 1910년대를 거치며 거족적 민족운동으로서 3‧1운동의 불씨를 그 안에 키워갔다. 3‧1운동 당시 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1월 27일의 대관원 모임을 통해 태동하였는데, 이 회합은 중앙YMCA 간사 박희도가 YMCA 학생회원 모집을 명목으로 김원벽‧한위건‧김형기 등을 통해 주선한 자리였다.
대관원 모임은 그 참석자들이 이후 학생단 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회합이었다. 그런데 10명의 참석자 가운데 8명이 서북지방 출신이었고, 대부분이 YMCA와 서북학생친목회‧교남학생친목회의 회원들이었다는 사실은 학생단 초기 조직화의 단서를 보여준다. 2월 12일 이갑성 집에서의 기독학생모임을 계기로 이용설 등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 그룹이 합류하면서 가속화된, 학생단의 조직 또한 학생YMCA와 서북학생친목회를 양대 축으로 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단은 2월 20일 승동교회에서 제1회 간부회를 개최하여, 김원벽(연희전문)‧강기덕(보성법률상업)‧김형기(경성의전)‧김문진(세브란스의전)‧전성득(전수학교)‧김대우(경성공전)를 대표자로 선정하고, 후위에 한위건(경성의전)‧이용설(세브란스의전)‧윤자영(전수학교) 등을 배치함으로써 조직적인 정비를 일단락하였다. 학생YMCA의 김원벽과 서북학생친목회의 강기덕, 그리고 이면에서 둘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던 한위건을 중심으로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들이 포진하는 구도였다.
그런데 2월 21일 이후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교섭이 급물살을 타 독립운동의 일원화가 성사되자, 학생단은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대중시위운동을 전개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거기에 합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제2회 학생단 간부회를 소집하여, 3월 1일의 거사는 중등학생들로 하여금 지원케 하고, 그 뒤 전문학교 학생대표 주도하에 제2차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후 학생단은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대중동원의 책임을 맡아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주관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이 전날 갑자기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김에 따라, 3월 5일의 학생단 시위는 물론 3월 1일의 파고다공원 거사 또한 사실상 학생들 주도하에 치러지게 되었다.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과정에서 천도교계‧기독교계‧불교계 대표와 더불어 학생단의 존재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데, 사실 30대 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민족대표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박희도와 이갑성은 엄밀히 말해 기독교계 대표라기보다는 학생단의 지분이었다. 실제로 박희도는 연희전문 학생YMCA 회장을 역임한 김원벽을 통해 지속적으로 학생독립운동에 관여하였고, 이갑성 또한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 그룹과 긴밀히 연계된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비록 선교운동에 국한되는 것이었지만 1910년대 하령회 등을 통해 꾸준히 역량을 축적한 학생YMCA는 서북학생친목회와 더불어 학생단 조직을 통해 3‧1운동의 초기 국면을 주도하면서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3‧1운동을 거치며 YMCA학생운동은 부르주아민족운동의 지도력을 배출하는 유력한 통로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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