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큐메니컬, YMCA/YMCA

기념강연 2. 대구의 3.1운동과 그 역사적 의의 : 이윤갑(계명대 사학과 교수)

by yunheePathos 2018. 2. 23.

대구의 3.1운동과 그 역사적 의의

이윤갑(계명대 사학과 교수)

 

 <이 글은 2018년 2월 22일, 대구기독교3.1운동 100주년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이뤄진 기념강연 원고 입니다.>


기념강연 2(대구의 3.1운동과 그 역사적 의의-이윤갑교수).hwp


1. 1910년대 일제의 민족운동 탄압과 식민지 지배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자 대구에서는 대구광문사와 대한협회 대구지회가 설립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단체들은 신학문을 가르치는 근대학교를 대구 뿐만아니라 경상북도 전역에서 설립하는 운동을 펼치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수시로 개최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던 국채보상운동 또한 이들의 국권회복운동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1910년 무력으로 조선을 병탄하고 무단통치를 펼쳐 국권회복에 앞장섰던 민족운동단체들을 전부 해산하고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던 사립학교와 민족언론 기관들을 모두 폐쇄하였다. 이러한 탄압으로 대구에서도 대구 광문사와 대한협회 대구지회, 달성친목회 등이 해체되고, 기독교 교회에 대해서도 감시가 시작되고, 교회부설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행정망과 치안망을 구축하고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식민지 수탈과 재정 확보를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농업수탈기구로 지주제를 보호, 육성하였다. 이로 인해 세금과 지대가 인상되어 농민들의 생활이 급속히 빈궁해졌다. 다른 한편 이와 같은 식민지 지배에 편승해 조선에서 농업과 상업, 제조업, 금융업 등을 경영하려는 일본인의 진출도 급증하였다.

대구에 진출한 일본인 사업가들은 대농장을 개설해 식민지 지주제를 확립하는 데 앞장섰고, 금융기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역상이나 도매상이 되어 대구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대구로 이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급속히 늘어나 1920년이 되면 일본인 인구는 3,48712,603명으로 증가하였다. 러일전쟁기에 처음으로 대구로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은 불과 15년만에 대구 전체인구의 31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증가한 것이다.

일본 상인들의 이러한 진출로 대구의 조선인 상권은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상인은 일본 무역상이나 도매상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대구의 서문시장이나 남문시장에 장을 보러 나오는 대구 인근지역의 농민들도 상권을 장악한 일본상인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이들이 구매하는 물품에서 수입 상품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그 피해는 더욱 늘어났다.

이와 같은 식민지 지배와 일본인의 진출은 농민과 상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면서 몰락을 촉진하였고, 국권회복운동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청년, 학생들에게는 참기 힘든 민족적 굴욕감을 주고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지배와 일본인에 대한 조선 민중의 적개심과 저항의식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증폭되어 갔다. 그러나 그 저항의식은 경찰과 헌병을 앞세운 무단적 강압통치로 인해 표출되지 못하고 내연하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에너지로 응축되고 있었다.

 

2.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교남기독청년회의 민족운동

이러한 가운데 1910년대 대구에서는 비밀리에 한말의 국권회복정신을 계승하는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대구광문사와 대한협회 등의 국권회복운동을 계승하는 민족운동계열은 달성친목회를 재건하고, 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국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구지역 민족운동가들은 19131월 안일암에서 시회를 가장하여 모임을 갖고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였다. 달성친목회나 국권회복단을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은 한말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한 전· 현직 관료나 부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합방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민족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관망하거나 심지어는 교풍회 또는 부협의회 위원으로 변신해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대신해 합방후 달성친목회를 재건한 인물은 한말 이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신교육을 받고 성장한 후속세대들이었다

       (사진 : 달성친목회 결성 축하 논설을 실은 대한매일신보)


달성친목회와 조선국권회복단은 국내에서 교육이나 언론, 출판활동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해지자 간도나 노령 등 국외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에 희망을 찾고, 그것을 지원할 조직을 만들고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군 모집 활동에 힘을 쏟았다. 이들은 1915년 달성친목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태궁상점, 향산상점, 백산상회 등 곡물 혹은 잡화를 수출입하는 무역상을 설립하여 국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락하고 자금을 지원했으며, 일부는 무력으로 부호들을 위협해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벌이다 경찰에 검거기도 하였다.

한편 기독교 교회와 사립학교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추구하였던 민족운동가들은 남성정교회, 신정교회, 남산정교회에서의 다양한 교육활동과 계성학교· 신명학교 등의 기독교 사립중등학교의 교육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정신을 이어갔다. 한말에 이들의 활동이 크게 주목을 끌지 않았던 까닭으로 합방 이후 기독교 교회나 이들 학교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그러한 가운데 1910년대 후반이 되면 대구 지역 교회 내에서도 민족의식이 강한 조선인 지도자들이 성장하였다. 한말 국권회복의 열망을 가지고 기독교에 입문하여 목사, 전도사, 장로 혹은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성장한 자들이 다수 배출된 것이다. 그들은 농민, 상인, 청년학생 등의 기독교 교인들과 식민지 지배의 고통을 같이 나누면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그 모순을 해결한 방도를 고민하였다. 이들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18년 교남기독청년회를 창립하였다. 교남기독청년회는 한말 친일단체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던 황성기독청년회의 YMCA정신을 지향하였다.


<대구교남기독교청년회관>

 

 

3. 38일 서문시장에서 분출한 3.1운동

 

대구의 3· 1운동은 1910년대의 민족운동을 기반으로 일어났다. 대구의 3· 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서울의 3· 1운동과 연계되어 시작되었다. 33인의 하나였던 이갑성이 224일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를 찾아와 독립선언서에 지역대표로 서명할 것과 대구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32일 다시 이만집을 찾아온 이갑성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만집은 교남기독청년회에서 같이 활동하던 김태련, 김영서, 백남채, 최경학, 정재순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계성학교 및 신명학교 교사들과 협력해 38일 서문 밖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대구의 만세시위는 38일 오후 3시에 서문시장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수업을 마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대부분이 서문시장으로 흩어져 들어왔고, 대구성경학교 강습생 20여명도 모여들었다. 3시가 가까워 오자 이 날 아침 학생대표들로부터 시위소식을 듣고 동참하기로 결의한 의한 대구고보생 2백여 명이 일본 헌병 기마대와 순사들의 저지를 뚫고 서문시장으로 진입하였다. 순식간에 학생 시위대가 3백여 명으로 불어났고 쌀가마니로 만든 임시 연단에 이만집과 김태련이 올라섰다. 이만집은 지금은 조선 독립의 시기로서 각자가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독립을 위해 당연한 일이므로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고, 이어서 김태련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숨겨온 깃발을 꺼내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시위가 시작되자 장터에 나와 있던 시민들이 합세해 시위대는 순식간에 7백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이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오자 이만집은 독립선언서 낭독을 중단시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에 시위대가 화창하면서 우렁찬 만세소리가 시장을 뒤흔들었다.


시위대는 곧장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문로를 따라 도심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기마헌병과 순사들이 이를 저지하려 하였고, 시위대는 투석으로 이들을 물리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시위대 선두에는 이만집, 김태련, 김영서, 최경학, 박재원, 이태학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위대를 이끌었고, 안경수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나아갔다. 신정교회 목사였던 정재순은 군중들 속에서 만세시위를 독려하였다. 행진이 시작되자 신명학교 여학생 50여명이 교사 인솔 하에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학생과 장군, 시민들이 합세한 시위대는 대구경찰서 앞을 지나 종로를 통과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로 진입해 달성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 병력이 시위대를 가로 막았다. 이들은 5,6대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착검한 총을 시위대를 향해 겨누면서 도열해 있었다. 이들 앞에서 시위대가 주춤하자 헌병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시위대를 공격하고 검거하였다.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군중들은 흩어졌고 주도층들은 도청 앞으로 이동하여 시위를 하다가 무더기로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로써 38일의 시위는 막을 내렸다.

이 날 시위 도중 경찰에 검거된 인원은 157명에 달했다. 심문을 거쳐 그 가운데 67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남성정교회 목사 이만집, 남산정 교회 전도사 김태련,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 계성학교 교사였던 김영서· 백남채· 최경학· 최상원· 권의윤, 신명학교 교사였던 이재인· 심봉선, 평양숭실학교 생도 김무생, 김천 기독교 전도원 박제원, 의성 기독교 조사 이태학, 심문태 등 계성학교 학생 30여명, 허범· 신현욱 등 대구고보 학생 5, 박장호 등 대구성경학교 강습생 4, 농업· 잡화상· 제화공 등등의 십 수 명의 시민이 포함되었다.


<1920년대의 서문시장>

 

4. 310일과 30일의 만세시위와 혜성단의 활동

 

38일 시위에서 체포를 모면했던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학생들은 기독교 청년교인들과 연합해 310일 군경이 삼엄하게 경계를 펴던 남문밖 시장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 시위에도 다수의 기독교 교인이 동참하였다. 38일과 10일의 만세시위는 기독교 내의 민족운동세력이 주도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전개된 독립청원외교운동을 지원하는 독립선언운동으로 전개되었다.

310일 이후 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대구의 3· 1운동은 330일 동화사부설 지방학림 학생들이 남문 밖 시장에서 시위를 일으키고, 41, 2일에 조선 상인들이 철시시위를 벌이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이 두 건의 시위에서도 학생들은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38일과 10일의 시위와 대비하면 이들 시위에서 학생들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대신 상인을 위시한 민중들의 능동적 참여가 두드러졌다. 38일의 시위가 기독교 민족지도자들과 학생들의 역량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음에 비해 330일의 남문밖 시장 시위와 조선 상인들의 철시시위는 학생들의 선도투쟁에 상인과 군중들이 능동적으로 호응하면서 성사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만세시위의 성격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만세시위에서 독립선언적 성격에 더해 상인과 농민들이 직접 식민지 지배에 대항해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군경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가 들불처럼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4월 초 전국 부· 군에 관제조직인 자제단을 조직하여 시위를 진정시키려 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대구에서도 박중양을 단장으로 하는 자제단이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학생들은 비밀결사 혜성단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혜성단은 38일 시위에 참가한 계성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4월 중순경에 조직되었고, 5월 중순 체포되어 해산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혜성단은 자제단 단장과 구장, 시위를 진압하는 대구경찰서장에게 경고문을 우송하고, 조선인 관공리의 사직을 촉구하고 대구 시민들을 상대로 만세시위나 철시시위를 촉구하는 권고문을 배포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5.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대구의 3· 1운동은 시위주도층이 단기간에 형성되고 하루 혹은 이틀만의 준비로 만세시위나 철시가 전개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시위대가 조직적으로 동원된 경우는 38일 시위가 유일하였다. 그나마도 계성학교와 신명학교의 학생들에게는 시위 하루 전에, 대구고보 학생들에게는 당일에 시위소식이 알려지고 동원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시위는 대중들이 수백 명씩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대중운동의 형태를 띠었다. 사전 준비가 매우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 자체는 대중운동으로 성공적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였다. 무력에 의해 강제합병이 이루어지고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요되면서 농민, 노동자, 상인, 학생 등등 각계각층의 조선인들은 그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고 큰 고통을 겪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이들의 불만과 저항의식은 무단통치로 억압되어 표출되지 못하고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에너지로 응축되어 갔다. 그러한 가운데 터져 나온 지식인과 학생들의 선도적 만세시위는 식민지 지배망에 이 에너지가 뚫고나와 폭발될 수 있는 균열을 만들고, 동시에 그 에너지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대중들의 투쟁에 불이 붙으면서 3· 1운동은 당초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3.1운동에서 표출된 이와 같은 한국 민중의 민족역량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민주정부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립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기까지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그 운동의 중심에는 국왕이 있었다. 국권회복의 궁극적 주체는 국왕이었고, 한말의 국권회복운동은 국왕이 대외적으로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고 대내적으로 부국강병을 위한 국가개혁을 수행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국왕은 더 이상 민족운동의 구심이 될 수 없었다.

이후 민족운동에서 일부 복벽주의가 잔존했지만 주류를 이루게 되는 것은 근대적 독립국가 건설을 추구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방향이었다. 우리 민족운동에서 국민주권설에 입각한 근대적 정부 구성이 구체적 목표로 제시된 것은 1917년에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이었다. 대동단결선언은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한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조소앙신석우한진교 등등의 독립운동가를 결속해 발표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대동단결과 발전을 위해 국민주권설에 의거한 망명정부 수립을 제안한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우리 민족운동이 3.1운동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만으로 대내외적으로 민족운동 전체를 대표할 공화주의 민주정부 수립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공화주의 민주정부 수립을 실질적으로 선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성원 절대 다수가 독립 쟁취와 주권 형성의 주체가 되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실천을 명확히 드러내 보여야 했다. 3.1운동은 애초 계획과는 무관하게 우리 민족성원 절대 다수가 강렬한 독립 의지를 가지고 신명을 바쳐 민족운동에 나서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법통이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을 기반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공화주의 민주정부로 수립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그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훼손될 때 그것을 바로잡는 궁극적 근거이자 기준이다. 이 선언을 실질적으로 성립시킨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 대구 3.1운동에서 보듯이 민중이 실질적 주체가 된 거국적,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던 3.1운동이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