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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19.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

by yunheePathos 2018. 12. 3.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Y운동에 가담한 역사는 크게 줄잡아서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고당은 1908년부터 1913년까지 5년간 일본에서 유학할 때 재일본 한국 YMCA에 관여한 역사가 있고, 둘째는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2년간 평양 YMCA 총무로서 활약한 역사가 있고, 셋째는 한국YMCA 전국연합회의 이사 또는 학생Y 하령회 강사로 활약한 역사이다. 이 셋을 다시 성격별로 가려보면, 첫째는 고당이 학생Y운동의 개척자로서 또는 유학생Y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역사이며, 둘째는 평양Y의 창설자 및 실무총무로서의 역사이며, 셋째는 Y 전국연합회 및 학생Y 하령회 운동의 자원지도자로서의 역사이다.

이렇게 보면, 고당은 약 12년 간은 Y 실무자로서 활약했고, 10년 간은 이사 또는 강사로서 활약했는데, 이처럼 22년 간이나 더욱이 그의 나이 26세부터 31세까지와 39세부터 50세까지의 황금시절을 YMCA 운동에 고이 바친 생애에도 불구하고 Y맨으로서의 고당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연구나 언급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고당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188321일 평양에서였다. 넉넉한 집안이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엄격한 부친 조경학씨는 아들의 투지력과 자주성을 길러주기 위하여 포목장사도 시키고 지물장사도 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 잘하는 사람들은 사교에도 능하고 대인관계에 수완이 좋다. 그러다가 으레 주색에 빠지는 수가 많다. 고당도 장사를 하다보니 한동안 주색에 빠지게 되었다. 어떤 때는 며칠밤을 세워가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당이 23세되는 해인 1905년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처럼 즐기던 술을 딱 끊고 기독교 신자가 됐다. 이 유명한 술꾼이요, 날파람꾼이요, 골목대장이던 고당은 과거의 악몽같은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은 바로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19084월이었다. 그보다 2년 전인 1906년에 기정식 씨가 서울의 황성기독교 청년회의 파송으로 동경에 와서 유학생들을 위한 재일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고당은 제일 먼저 김정식을 찾아갔다. 이때부터 그는 제일 먼저 김정식을 찾아갔다. 이때부터 그는 재일 한국YMCA 의사부(議事部, 이사회나 마찬가지임) 위원이 됐다. 1913년 명치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5년간 그는 YMCA의 의사부 위원 또는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귀국하자 곧 오산학교(五山學校)교장으로 취임하여 학원내에서 헌신하다가 19193.1 독립운동 때 중대한 사명을 띠고 중국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열달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1월에 가출옥을 받았다. 평양 YMCA의 창설준비 작업은 이해 11월부터 시작되었다. 드디어 1921324일 평양 남산현(南山峴) 예배당에서 각파 교인들과 사회유지 8백 여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때부터 1932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될 때까지 12년 간 그는 평양Y 총무로 있었다. YMCA를 본거지로 해서 고당은 폭넓고 중대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2년 간의 YMCA 재임기간 중에 가장 중대한 운동 중의 하나는 물산장려운동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은 1922년에 시작한 운동으로서, 이 운동은 잠시동안에 전국Y운동 및 범국민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한국인의 을 지키기 위한 투쟁방법으로서 고당은 항상 수목두루마기에다 말총모자를 쓰고 행전을 치고 다니면서 일본인 생산품 배척 및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이는 마치 주시경 선생이 항상 한글책을 보따리에 싸들고 다니면서 한국인의 을 지키는데 사력을 다한 것과 꼭 같다. 그래서 주시경을 주 보따리라 부르게 되었고 조만식은 조 행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당을 한국의 간디라 부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시경의 국학운동과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큰 운동이었다. 그것은 동일한 물건의 양면에 불과했다. 이 두 지도자들은 서로 친분도 없었고 나이도 차이가 있었지만, 한국인의 또는 을 사수하자는 데 있어서는 꼭 같았다. 다같이 교육가인 동시에 언론인이며 종교인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순교정신이었다. 그는 해방이후 남한으로 넘어올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그리고 많은 친지와 가족들이 월남할 것을 권했지만 나는 1천만 북한 동포와 생사를 같이할지언정 나 혼자 떠나지 않겠다면서 마침내 공산치하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고당은 교회의 장로로서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죽음을 택한 성스러운 순교자였다.

등걸

-1979.3.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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