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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20. 기독교 사회운동가 김준성(金俊星) 목사

by yunheePathos 2018. 12. 3.

반공, 배일투사, 기독교 사회운동가

김준성(金俊星) 목사

 



김준성 선생은 1898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태어나 1978928일 미국 뉴욕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한국을 떠나기는 1935년이었고, 예수를 믿기는 그가 10세 때인 1907년이었다. 단천읍 교회에 다니던 소년 김준성은 그 교회의 창설자의 한사람인 김병수(金炳洙) 장로에게 감화받은 바가 컸다. “너희들은 예수 잘 믿고 공부 잘하고 산업을 일으키라. 그래야만 나라가 독립이 된다고 말하는 김병수 장로 밑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신앙이 자랐다. 때마침 한일합방 직후 고향에 돌아와 전도사가 되어 민중을 깨우치며 돌아다니던 이동휘(李東輝) 선생의 감화를 많이 받았다. 이동휘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북만주 간도지방과 함경남북도 일대를 자기의 활동무대로 정해 놓고, 우선 자기고향인 단천과 성진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전도사업이라 하지만 전도가 곧 그에게는 독립운동이었다. 원산을 기점으로 하여 문천, 고원, 영흥, 함흥, 이원, 단천 등지를 순회하면서 강연을 할 때에는 그의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소년 김준성도 이동휘 선생의 감화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9765월 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내가 열 살 때 예수를 믿게 된 것도예배당에 가서 밤낮 듣는 것이 애국지사들의 눈물 흘리고 가슴치면서 하느님께 호소하는 기도와, 이동휘같은 독립투사들의 입에서 거품이 날리고 눈에서 불이 쏘는 애국설교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YMCA 회원이 되기는 1923년 동경 유학을 갔을 때부터였다. 일본대학에 적을 두고 열심히 재일본 동경한국YMCA에 다녔다. 1926년에는 최승만(崔承萬) 총무 밑에서 부총무로 활약했고 귀국하여 19288월부터는 원산 YMCA 총무가 됐다. 그는 총무가 되는 즉시로 3년제인 원산Y청년학관이란 남자중학교를 설립하여 시인 김동명(金東鳴)씨와 함께 청소년교육에 힘썼다. 극도로 가난한 기독교가정 아동들과 사상의 불온분자라 해서 학교에서 쫓겨난 청년들을 모아 교육을 시켰으며 또한 덴마크식 협동조합 이론에 따라 신불신(不信)의 구애없이 누구나 1구좌 2원의 불입금으로써 합동소비조합을 조직하여 병원, 공장, 이발소, 점포 등의 조합원들에게는 특별할인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때마침 화산처럼 터져나온 광주학생사건 때에는 원산 Y청년학관 학생들이 선두지휘를 했다. 그 뒤 1931년 김준성 씨는 함흥 영생학교의 교원 겸 학생감으로 불리워가서 학생Y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조선공산당본부가 함흥지방으로 옮겨진 때인만큼 학교학생들은 거의 다 공산주의의 물이 들어있었다. 그때 일을 회상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선 학교 안의 소수의 기독학생들을 모아 학생Y를 조직하고, 일본에서 악기들을 사다가 함흥에서 처음 보는 학생음악대를 조직, 지도하여 기세를 높였으며, 관립학교인 함흥고보와의 야구시합에서 이겼을 때에는 악대를 앞세우고 전교학생이 시가행렬을 하였으며, 성경시간에는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비교하여 기독교사상이 공산주의사상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강의를 계속했으며 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고 애굽의 압박을 벗어나서 가나안 복지로 가던 역사를 연극으로 꾸며 김형도, 엄요섭, 박창해 등이 주연하는 배우가 되어 흥행을 했더니 너무나 인기가 커서 하룻밤만 하려던 연극을 민중의 열망에 따라 재연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준성 선생의 인기는 비단 학교안에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함흥. 원산 등지를 비롯하여 대구, 평양, 서울 등 전국에 불려 다니면서 강연을 했다. 그의 연설제목은 주로 종교는 과연 아편인가?”, “공산주의와 기독교”, “유물사관과 유심론”, “천국운동”, “지상천국 건설운동”, “기독교사회주의따위였다. 그의 투쟁대상은 일본제국주의만이 아니라 당시 학생계와 일반사회를 휩쓸고 있던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였다. 그야말로 그는 당시 한국의 반공, 배일의 선봉장이었다.

그 당시 필자는 영생고보의 일개학생이었으나 공산학생운동의 주모자였던만큼 김준성 선생의 인기를 몹시 미워했었다. 1932년 메이데이를 앞두고 예비검속의 선풍이 이는 통에 필자는 제 1착으로 검거되었다. 고문을 당할 때 필자는 형사들에게 김준성 선생은 학생들에게 성경을 배워주지 않고 일본제국주의 비판만 한다고 고자질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국내에서 교원자격증을 박탈당하고 멀리 북간도로 쫓겨나게 되었다. 1935년 그가 영영 한국을 떠나게 된 이변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필자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979414일 추모회를 앞두고 등걸.

-1979.4.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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