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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22. 추강(秋岡) 김필수(金弼秀) 목사

by yunheePathos 2018. 12. 3.

추강(秋岡) 김필수(金弼秀) 목사

 



추강(秋岡) 김필수(金弼秀) 목사는 1903YMCA가 창설될 때 창설이사 중의 한 분이었다. 창설 이사 12명 중 한국인은 2명밖에 없었는데 추강 선생은 이 2명중의 한 분이다. 그만큼 추강 선생은 한국YMCA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추강 선생은 18727월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죽산의 부유한 연안(延安)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문이 본래 선비 가문이고 독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귀동자로서 한학 수학에도 남다른 대우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일찍이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고자 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과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당 지도자들과의 교분관계로 일본 고베(神戶)로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관계로 역적의 혐의는 받지 않고 귀국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머리를 깎고 기독교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었다.

귀국하자 추강 선생은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의 추천으로 레이놀즈(W. D. Reynolds, 李訥瑞) 목사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레이놀즈 목사는 남장로교의 초대 선교사이며 전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 선교의 개척자로 지명된 선교사로서 그는 원어와 각국어에 능통한 학자이자 한국 성서번역 위원회의 위원이었기 때문에 학자적 소양과 인격을 겸비한 어학선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추강 선생은 레이놀즈 목사의 한국어 선생으로 일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레이놀즈 목사가 성서번역 때문에 서울에 와있었을 때에 한국YMCA 창설이사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 뒤 추강 선생은 전주에 내려가 완산교회의 장로로 피택이 되었고, 다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제 2회 졸업생이 되었다. 목사가 된 후 그는 진안무주장수 지방과 군산 지방을 순회 전전하면서 개척 선교에 헌신했으며, 1915년 장감 두 교파가 연합으로 기독신보를 창간할 때에는 상경하여 그 편집인이 되는 한편 YMCA의 일로는 강화 및 사경회 강연회 등의 명강사로 활약했다. 특히 191811월에는, YMCA가 세계 기도주간을 당하여 대강연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필수 목사는 사회개량의 요소란 제목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무단정치의 종식을 암암리에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추강 선생은 3.1독립운동 직후 YMCA의 회보인 청년(靑年)’을 창간할 때 그 권두언을 썼으며, 192071일부터 12일까지 전국 순회 전도단을 조직하여 활동할 때에는 그 단장이었다. 추강 선생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심하여 기도하라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라는 베드로전서 4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으로 전도대 발족 설교를 한 뒤 제 1대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2대는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3대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나누어져 전도와 계몽강연을 떠났던 것이다.

그밖에도 추강 선생은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에 앞장서서 YMCA 계몽사업을 주도했으며, 특히 이상재, 윤치호 등과 3거두의 지도체제를 이루어 실무담당인 신흥우 총무의 배후인물이 되어주었다.

일반 교계에 있어서도 추강 선생은 언제나 개척자적인 역할을 했다. 1907년에 조직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동노회때부터 1914년까지는 선교사들이 회장직을 독점했으나 1915영 총회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뽑힌 초대 한국인 회장이 김필수 목사였다.

그리고 김필수 목사는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물론 YMCA운동 자체가 에큐메니칼운동이어서 이미 에큐메니칼 운동에 선봉을 섰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1918326YMCA회관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서 조선예수교 장감(長監)연합협의회가 창설될 때에는 김필수 목사가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인만 아니라 선교사들도 참석했으며, 이 총회는 남북감리파와 남북 장로파, 캐나다 및 호주 장로파 등의 정식총대 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때에 김필수 회장은 취임설교에서 일 천부(天父)의 뭇, 일 구주(救主)의 지톄(支體)로써 교파를 분립(分立)은 다만 시긔(時期)와 쟝소(場所)에 의야 형식에 불과거늘 라서 정신세계에 지 영향이 혹 잇슨 즉현금에 쟝로 감리 량교파가 이를 고념(顧念)야 일톄적(一体的) 련합긔관을 조직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추강 김필수 목사는 일제 말기 한창 탄압이 심할 때는 완전히 은퇴하여 꿩 사냥도 다니고 친구들과 한시를 지어 읊기도 하며 지내다가 1948103076세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등걸

-1971.5.3.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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