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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18. 우남 이승만 박사

by yunheePathos 2018. 12. 3.

우남 이승만 박사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YMCA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던가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관심거리다. 그의 정치활동이나 망명 생활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우선 YMCA와 관계하게 된 동기가 중요하다. 즉 그가 독립협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 감옥 안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 가장 큰 동기이다. 1904년 석방된 뒤 이승만 박사는 미국으로 망명갔으나 그 뒤 YMCA에 투신하게 된 월남 선생과의 연락은 끊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이승만 박사가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자 월남선생은 그를 불러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 그때 이승만 박사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을 했으나 무엇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을 적에 서울에서 그레그(G. A. Gregg)란 사람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레그 씨는 1906년부터 한국YMCA 간사 일을 보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가 학생부 간사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 요청을 받고 이승만 박사는 191010월말 경에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한 뒤 처음 6개월 동안에는 주로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그는 19115월부터 전국 순회여행을 하게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37일 동안에 호남지방과 13개 구역을 방문했으며, 33회의 학생집회에서 7,535명의 학생들과 만났다. 그는 2,300마일을 여행했는데 기차를 타고 1,418마일, 배 타고 550마일, 가마 또는 인력거를 타고 2마일을 여행했다. 그 결과 그는 광주 숭일학교, 전주 신흥학교, 군산 영명학교 등 학생 YMCA를 조직하였으며, 2회 학생 하령회를 성황리에 마치게 됐다.

그런데 이 제 2회 학생하령회가 정치 문제화되어 마침내 105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YMCA 학생운동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조직적인 학생운동으로 등장했다는 것, 더욱이 Y 학생운동은 국제적인 조직과 지도 밑에서 전개되었던 만큼, 그 당시 국내의 기독교 세력을 박멸하고자 계획했던 일제로서는 하나의 암적인 존재처럼 미워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 참석한 Y학생 수나 미국과 인근에서 초청되어 온 세계적인 지도자들의 일제의 신경이 크게 자극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항일운동의 거장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들을 선동할 뿐만 아니라 학생하령회를 성황리에 전개하는 것을 보고 일제는 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일제는 기독교인들이 데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 기도했다는 허무맹랑한 조작극을 꾸며가지고 수백명의 기독교인들을 검거하게 되었는데, 제일 먼저 검거한 것이 선천 신성학교 학생들과 서울경신학교 학생들이었다. 즉 이 두 학교에는 학생 YMCA가 조직되어 맹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주모자로 검거된 윤치호 선생은 제 2회 학생하령회의 대회장이었으며, 또 주모자로 검거된 이승훈 선생은 오산중학교 학생Y의 창설자이며, 양전백 목사는 선천 신성학교 학생Y의 창설자인 동시에 제 1회 및 제 2회 학생하령회 때의 강사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승만 박사는 이 검거소동 때 일본으로 탈출해 갔다. 그는 일본에 가서도 불을 질렀다. 그 당시 재일 한국YMCA 총무 김정식 선생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의 옛 동지였다. 우선 김정식 총무의 주선으로 YMCA 회원들과 유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24월 첫 주간에 일본 가마구라에서 학생대회를 열고 105인사건의 진상과 일제의 탄압상을 폭로했다. 그때 4월은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회관 밖에까지 만원을 이룬 유학생들은 감동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고, 거액의 회관건립기금을 희사하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가 한국YMCA 학생부 간사로 활약한 것은 불과 26개월 정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 가서도 계속 활동하여 결국 하와이 누아누(Nuanu) YMCA의 창설자(6) 중의 한사람이 되었으며, 1921년부터 범태평양협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한국YMCA운동을 지원했다.

다 아는대로 이승만 박사는 4.19 때 하야하게 되었는데 그때 만약 이승만 박사가 학생운동의 지도자였던 과거의 경력이 없었던들 제 발로 대통령 관저에서 걸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등걸

-1979.1.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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