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교회의 동성애 혐오를 경계한다.'라는 좌담회에 참여하면서 들었던 몇가지 느낌이다. 참가자 대부분이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신학생들이었는데, 생활인 기독자로 앉아 있으면서 좌담회 내내 뭔가 좀 답답하다는 느낌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몇몇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존 교회 구조의 틀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 이로 인해 주류 교회와 교단의 비합리성에 대해 대단히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라는 느낌, 무형의 압박감에 스스로 생각의 폭을 좁히고 있거나 움직임이 여유롭지 않은 뭔가 막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분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문제의 전선을 넓히지 않고 교회 내의 신앙/신학 문제로만 집중하고자 하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구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인 기독자로 좌담회에 참여했을 때 가졌던 답답함의 원인을 옮겨본다.
1. 주류 한국교회에 의해 빌라도 법정에 죄인으로 다시 소환되고 있는 예수.
- '성소수자'는 신앙이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류 한국교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
예수는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어울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이웃으로 그들을 환대했으며 이웃 사랑을 하나님나라운동의 제1계명으로 선포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를 죄인으로 빌라도 법정에 세웠으며 이단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주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지금 다시 이웃 사랑의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고 조롱하며 이단으로 단죄함으로써 예수를 다시 죄인으로 법정에 소환하고 있다. 그들은 합리적인 신학토론이나 논의 과정을 만들지 않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사실인양 왜곡하며 힘으로 '불량 인간'이라는 낙인찍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 한국교회가 갖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을 탓하거나 그들이 갖는 인식의 옳고 그름에 대해 나는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주류 한국교회 지도자라고 일컬어 지는 사람들이 보이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맹신과 태도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예수는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으며 종교 장사를 하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준엄히 꾸짖으며 하나님나라운동의 새로운 언약과 비전을 선포했다. 그러나 지금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토론회나 집회에서 보이는 그들의 맹목적 폭력성은 예수를 죽이고자 빌라도 법정에 모였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의 맹신의 폭력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주류 한국교회 몇몇 지도자들에게 '성소수자' 문제는 신앙이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야 하는 생존을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이미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성소수자 문제를 대하는 주류 한국교회의 태도는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빌라도 법정에 죄인으로 세웠던 것과 같이 이 시대에 다시 예수를 죄인으로 소환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2. 성소수자에 대한 주류 한국교회의 태도는 선민의식에 기초한 반평화적, 반종교적, 패권적 교회의 한 행태이다.
- 성소수자 문제는 주류 한국교회가 안보이데올로기 대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성소수자를 전선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살육과 1억이 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죽음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 사냥과 군함을 앞세운 선교라는 이름의 식민지 착취 등 기독교는 뿌리깊은 선민의식으로 반평화적 패권주의 종교로 역사적 죄과를 쌓아왔다. 평화를 만드는 이가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비전의 선포가 무색할 정도로 반평화적인 기독교의 수많은 죄과를 주류 한국교회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슬람을 포함한 이웃종교와 성소수자를 대하는 그들의 솔직한 속내를 보면 최소한 한국 개신교 주류는 평화의 종교라 말할 수 없으며 교회가 예수운동의 담지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실정이다.
주류 한국교회는 부패한 정치권력과의 결탁을 통해 정치적 권력을 확장해왔고, 물질과 성장이라는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여 우상화했으며 양적 확대를 제일주의로 맘몬의 괴물이 되어왔다. 그 과정에서 맘몬화된 개교회와 목회자 중심의 교회구조와 권력을 강화해 왔고 시민사회의 보편적 가치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적, 문화적 지체를 보이며 교회 내부의 문제를 덮어왔다. 주류 한국교회는 21세기 글로벌한 시민사회에 걸맞는 개혁교회로 성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17세기 중세 교회로 퇴보함으로써 시민사회의 골치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성소수자 문제는 변화하는 시민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주류 한국교회가 이에 놀라며 보이고 있는 반동이자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지속시키려는 욕망의 몸부림이다. 성소수자 문제는 해방정국 이후 70년 이상 한국 교회와 정치권력에 의해 지배 수단으로 악용돼 왔던 안보 이데올로기가 시민사회의 발전에 따라 그 약효가 소멸되면서 새롭게 만들어낸 대체제일 뿐이다. 주류 한국교회는 70년 동안 누려온 주류 한국교회의 물적, 인적 영토를 지키고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성소수자 문제를 전선으로 적, 아를 구분함으로써 새로운 이데올로기 전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그들 내에 만연한 성적 타락과 부패, 범죄를 회피하고 감추며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주류 한국교회의 몇몇에 의해 기획되는 정치운동 그 이상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반평화적인 패권주의에 사로잡혔던 기독교의 역사적 오류와 죄과를 그대로 답습하는 죄악이다. 과거의 이같은 행태에 대해 통렬히 성찰하고 평화교회의 전통을 잇지는 못할 망정 또 다시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과 패권의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류 한국교회가 해방이후 분단과정에서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되는 과정에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더 이상 안보이데올로기가 성소수자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어 헤게모니 수단으로 연장되어서는 안된다. 한국 사회 가장 큰 적폐가 한국 교회라는 지적에 겸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안타깝게도 이웃사랑의 환대와 치유보다는 성소수자를 희생양으로 하는 갈등과 분열의 이데올로기 정치투쟁이 주류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있다. 주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평화, 그리고 그 향기를 잃어 버린채 자신의 들보보단 남의 티끌을 찾아 헤매는 살벌한 사냥터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3. 성소수자 논쟁은 이단논쟁이 아닌 예수운동의 신학적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 주류 한국교회의 성소수자 정치이데올로기로 드러나는 근본주의적이고 시온이즘에 기반한 제국의 신학을 정면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판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눈물짓는 이웃을 예수 사랑하듯 환대하는 이들을 이단이라는 못박기를 서슴치 않고 있다. 권력과 힘으로 학교에서, 교단에서 이들에게 이단의 낙인을 찍어 쫓아내고 있다. 한국교회 주류가 신학적 논쟁을 합리적으로 즐겨한 바 없지만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토론조차 힘으로 짓누르고 있다. 예수 당시 종교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죄인으로, 이단으로 죽였던 것 처럼 말이다.
주류 한국 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신앙인으로서의 태도 이전에 보편적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식과 합리성을 상실하고 있다. 나는 성소수자 문제를 신앙적 관점이나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대면하고자 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행해지는 그들의 독설과 폭력, 그리고 난무하는 거짓된 주장들이 결코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거짓으로 공포를 확산시키고 불안을 부채질함으로써 성소수자를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정치이데올로기로 소비하고 있다.
주장이 다를 수 있고, 신념과 믿음이 다를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이 다 각자의 모양과 성질을 갖고 태어나듯, 인간 사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태어난 인간으로서 주장의 다름을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평화의 종교인으로서 절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또한 인권이라는 시민사회의 보편적 기본 가치와 양식조차 합리적인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집단이라면 그것은 맹목적 광신으로 게토(Getto)화된 집단임을 스스로 선언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특정 사안에서 보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광기와 폭력성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 교회가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라는 시민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성숙시키는 수원지의 역할을 못하더라도 그들의 신앙이 최소한 이에 바탕할 수 있기만이라도 소망한다. 한국 교회가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평화의 도구는 되지 못할 망정, 폭력과 갈등을 조장하는 반평화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성소수자 문제를 이단 문제로 몰아가는 주류 한국교회의 주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예수운동의 정체성에 관한 신학적 논쟁이다. 주류 한국교회가 예수운동과 종교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가 준 이웃 사랑의 제1계명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단논쟁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예수운동의 신학적 정체성을 찾는 토론을 적극화해야한다. 이것이 신학이 없는 주류 한국교회에 건강한 신앙/신학논쟁이라도 만드는 최소한의 방법 아닐까.
이를 위해서는 성소수자를 신앙의 정치이데올로기로 소비하고자 하는 주류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이고 시온이즘에 기반한 제국의 신학을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선민의식에 지독하게 사로잡힌 반평화적이고 패권적인 한국 개신교의 신앙을 이겨내야 한다. 식민지 제국의 신학 그늘에서 그들의 원조에 의해 성장했던 한국 개신교가 이를 극복하고 평화로, 인권으로, 민주주의로 세계 시민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성소수자 정치이데올로기로 드러나는 주류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이고 시온이즘에 기반한 제국의 신학을 정면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4. 성소수자에 대한 주류 한국교회의 태도는 반 인권적인 것이며 시민사회의 보편적 윤리와 정의에 어긋난 것이다.
- 교회와 신앙, 신학의 테두리에서 시민사회, 인간의 문제로 확장, 토론해야
성소수자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 집단의 자연스런 한 부분이다. 이것을 전체라는 허상으로 부분을 다른 것,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처벌해서는 안된다. 부분이 전체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거나 옮고 그름을 따져야할 사안이 아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듯, 그의 형상대로 인간이 있듯, 성소수자는 자연의 일부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흑백의 우열을 나누고 노예로 지배하고자 했던 것만큼이나 더 어리석은 일이다. 시민사회의 모든 윤리가 개신교의 윤리로 모두 치환될 수 없지만, 시민사회의 보편적인 윤리가 기독교의 윤리와 구별되거나 무관할 수는 없다. 최소한 인권의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신을 말하는것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며, 인간을 말하는 것은 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권리는 하늘의 권리이고 하늘의 권리는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이다. 이와 같은 시민사회의 보편적 윤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신교의 윤리가 가능한가?
하나님나라 비전으로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예수의 사람들이 미래를 말하기는 커녕 어떻게 과거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들만의 게토일 수 밖에 없다. 주류 한국교회는 시민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그들만의 게토가 되거나 그들만의 이해관계자 리그로 축소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가 올바른 응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 전체가 그 기반을 상실할 것이며, 한국 개신교는 더 이상 예언자적 기능과 치유의 담지체로서 그 역할을 상실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미 이와 같은 병증과 징후는 넘쳐나고 있다.
성소수자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사회의 보편적 윤리와 인권의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성소수자와 관련한 논쟁을 신앙과 신학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만 가둬서는 안된다. 신앙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교회 내부의 토론만으로는 정신과 문화 지체의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바꿔갈 수 없다. 신자든 비신자든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교회 그들만의 논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관심을 잃고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시민들은 성소수자 문제를 둘러싼 개신교 내의 소란에 대해 관심보다는 경멸의 조소를 보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또한 대다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도 입을 닫고 있을 것이다.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주류 한국교회를 그들은 목회 현장에서, 학교에서 매일 같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허한 말싸움과 상처만이 난무할 것이다. 성소수자의 문제를 보편적 인권의 이름으로 그에 맞닿아 있는 신앙으로 설명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교회와 신앙, 신학의 테두리에서 시민사회, 인간의 문제로 확장해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한국교회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성장해 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류 한국교회는 이 길에서 그들만의 게토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소멸해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갈 것이다.
5. 마무리
신학적 세례를 한번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한국 교회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는 목회자들이 제공하는 일방적 정보를 분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문자주의와 근본주의 신앙적 토대에 익숙한 한국 교회 신앙인들이 목회자와 장로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이 다르고 믿음의 가지가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증거하며 함께 숙의하고 토론하며 서로를 배우는 과정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폭력으로 다름을 말살시키려 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한국 교회가 평화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갈등과 폭력의 근원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는가?
주류 한국교회가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합리적인 신학논쟁을 했었는지 기억이 없는 생활인기독자로서 성소수자 문제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지평을 넓히고 예수운동의 본류를 찾는 생산적인 토론의 과정이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어제면 이것은 주류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주신 시련이자 기회인지 모른다.
* 이 모임에서의 사소한 의문.
- 왜 '동성애'라는 개념을 사용할까? 성소수자엔 동성애자 뿐만 아니라 너무나 많은 분류가 있고 다양하다. 이것은 이성애자들의 관점에서 그들과 다른 특정인들을 악의적으로 규정짓고 비틀기 위한 사회적 개념이다 - 최소한 한국사회에서는 그렇다. 지금 그들은 성소수자의 하나일 뿐이다. 동성애라는 개념으로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든다.
* 성소수자(性少數者, 영어: sexual minority)는 사회적 다수인 이성애자, 시스젠더와 비교되는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 신체 등을 지닌 이들을 말한다. 성소수자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양성애자와 트랜스젠더, 간성, 젠더퀴어, 제3의 성 등 을 포함한다.(구글 사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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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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