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박사(J. S. Gale, 憩一)
초대 선교사들 중 게일(憩一, J. S. Gale) 박사는 독특한 배경과 동기로 한국에 온 선교사였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Tronto)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그 대학의 학생YMCA의 파송을 받아 선교사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그는 목사도 아니었고, 신학공부도 못했던 26세의 총각이었다. 학생YMCA의 파송인만큼 어떤 기성교의 재정후원이 있는 것도 아니며, 다만 학생들의 호주머니가 그의 유일한 밥줄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용감한 선교사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국YMCA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12명 창설이사중의 한 사람이며, 1903년 10월 28일 창립총회 때는 헌장 기초위원을 대표하여 헌장초안을 설명했다. 1905년부터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회장이 됐고, 1927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줄곧 한국YMCA의 창설자, 옹호자, 이론가의 구실을 다했다.
그의 한국YMCA에 대한 공헌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공헌은 YMCA지도자의 배출 및 교회와 YMCA간의 협력관계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게일 박사는 본래 목사가 아니었다. 다만 친구들만 믿고 왔다가 토론토 학생 YMCA에서 생활비를 보내오지 못하게 되니까 1897년 장로교 선교부에 들어가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그 뒤 1900년에 연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뒤로는 유력한 평신도 양성에 주력했던 것이다. 즉 1904년 감옥에서 풀려 나온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연동교회 교인으로 맞아들이는 동시에 그 모든 지도자들을 YMCA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즉 김정식씨는 부총무가 되게 했고, 이상재씨는 교육부위원장 그 뒤는 종교부 총무가 되게 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한국YMCA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게일 박사는 한국교회의 평신도 운동을 육성했으며, 기성교회로 하여금 교회 테두리를 벗어나 깊숙이 사회에 들어가게 한 공헌이 크다.
이것은 즉 그의 일반 문화적 공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게일 박사는 저명한 문필가요, 언어학자요, 역사가, 성서번역가, 소설가였다. 더욱이 그는 한국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사랑하고 높이 찬양하는 학자였다. 얼마나 그가 한국문화를 사랑했는가 하는 것은,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그의 다음과 같은 감정 어린 어조로 슬퍼한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즉 그는,
「아, 너 한국은 망했구나! 먼 옛날 중국인들마저 군자의 나라라고 우러러보던 너 한국은 이제 사라졌구나! 선비의 나라, 서적과 문필의 나라, 아름다운 노래와 문장의 나라, 맑은 거울의 나라, 시와 그림의 나라, 효자 충신과 열녀의 나라, 은사와 신선의 나라, 그리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종교적 천재의 나라, 너 한국은 이제 사라졌구나!」하며 탄식했던 것이다.
아마 게일 박사만큼 한국의 고유문화를 잘 알고 사랑한 선교사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한영대사전(Korean English Dictionary)을 저술했다. 한국풍속지(韓國風俗誌), 구운몽(九雲夢), 춘향전(春香傳), 심청전(深靑傳), 흥부전(興夫傳)같은 한국 고전문학을 영어로 번역하여 외국에 소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존 번연의 우화소설 Pilgrims Progress를 천로역정(天路歷程)이란 이름으로 번역하는 동시에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 관한 실화소설 Vangard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의 또 하나의 큰 공헌은 처음부터 성서번역위원으로 활약하였다는 사실과 국한문 혼용 성서를 개인번역으로 낸 사실이다. 이것은 즉 그가 일반 선교사들과는 달리 독특한 걸음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찬송가도 한국교유의 가락에 맞추어 만들어야지, 무조건 서양음악을 직수입하는 것은 문화적 횡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찬익씨 같은 갓바치 출신과 임공진씨 같은 광대출신을 연동교회의 장로로 장립하여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이 때문에 교회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서 그는 서민문화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총각으로서 자기보다 3세 더 위이고 전남편의 딸을 둘 가지고 있는 과부와 결혼을 했었다. 그 과부는 동료 선교사 헤론(J. W. Heron)이 한국땅에서 순교를 하자 그 미망인과 자식들을 거두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곤당골’ 즉 고운당골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거기에다 학교와 교회를 세웠었다. 이 곤당골 교회가 오늘날의 승동교회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러브스토리는 한국민족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지면의 제한관계로 이 이야기를 설명하지 못하나, 그는 한국인의 선비정신과 사랑의 정신을 존경하면서 선교한 독특한 선교사이다.
1978년부터 연동교회는 “게일 문화상” 제도를 신설하여 상을 주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등걸
-1978.7.13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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