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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에큐메니컬

고 서광선 박사 1주기 추모 향연 (2023.2.25) 영상, 자료

by yunheePathos 2023. 2. 27.

영원한 청년, 평화의 사도 故 서광선 박사 1주기 평화 향연饗宴

* 함께 귀한 시간을 나눠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일시 : 2023년 2월 25일(토) 14:00~15:00
○ 장소 : 철원국경선평화학교 1층
○ 형식 : 참여자들의
추모와 기억 나눔
○ 참여 인원 : 20명 내외

https://youtu.be/9Z4OA7Ono8Q


▢ 순서

진행 : #이윤희 #고양YMCA 사무총장

1. 경과 및 환대의 인사 : #이충재 #국경선평화학교 사무총장
https://youtu.be/8wr6rdbuT6s


2. 추모 영상 : 평화의 사도, 영원한 청년, 고 서광선
      https://youtu.be/YJtMliD0V4E



3. #기도 : #이창호(#한국YMCA전국연맹 지역협력국장)

https://youtu.be/5-QqysQCk-s


      기도문 보기 https://goyangymca.org/main/ebook/108

고양YMCA

'생명의 정원, 평화의 터전을 일구는 평화의 사람들'

www.goyangymca.org



4. 추모사 : 서광선 박사를 추모하며
   - #정지석 (국경선평화학교 대표, 전 한국YMCA생명평화센터 소장)
     https://youtu.be/RkLPA9-g0kg



#추모사 보기 https://goyangymca.org/main/ebook/107

고양YMCA

'생명의 정원, 평화의 터전을 일구는 평화의 사람들'

www.goyangymca.org



5. 추모의 노래 : 그리운 금강산
   - #유재선 국경선평화학교 피스메이커

6. 서광선 박사 1주기 평화 향
연 : 참가자 인사 및 기억 나눔
 
  - 참가자 인사 및 기억나눔
https://youtu.be/-auoqPBvMnI


   - #안재웅 (사)기독교민주화운동, (재)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https://youtu.be/A9qFL4qA4js


7. 감사 인사 : #정은경 (희망의소리 이사장)

8. 추모의 노래 : 다함께 겨레하나

* 기억나눔 등 영상은 정리되는 대로 안내드리겠습니다.



고 서광선 박사 1주기 추모 향연 추모사

정지석 박사, 국경선평화학교

 

 

정지석_서광선 선생님 추모사(2023.2
0.09MB

 
1주년의 추모의 의미 - 우리안에 살아계심을 증언
선생님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신지 1년이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여기, 선생님께서 마지막 메시지를 남겨두신 국경선평화학교 건축현장에 모여 선생님을 추모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선생님은 죽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우리 기억 속에 살아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선생님을 추모하는 이유요 목적입니다. 우리가 선생님을 망각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이 선생님이 죽은 날이지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선생님을 잊지 않고,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는 한, 선생님은 저희들 가슴속에, 삶속에, 실천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죽음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 55~58).
 
철원 국경선평화학교 건축현장에서 1주기추모식을 갖는 의미
선생님은 철원 국경선평화학교를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건축에 필요한 기금을 위해 많은 이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고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영상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국경선평화학교 석좌교수로 학생들에게 평화의 삶과 지혜를 들려 주셨습니다. 강의 내용은 [피스메이커 서광선]이란 소책자로 출판되어 이곳을 찾는 시민과 많은 청소년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철원에 오셔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말씀하실정도로 철원과 국경선평화학교를 좋아하셨습니다. 오늘 1주년 추모식을 이곳에서 갖는 이유이지요. 선생님이 세상 생전 마지막으로 소통을 남긴 국경선평화학교 건축현장 이 자리는 우리에게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선생님은 평화통일의 희망을 말씀하셨고, 백두산 아랫마을 선생님의 고향 강계와 혜산에 가리라, 고향방문의 꿈을 꾸셨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한탄리버스파호텔의 스파게티를 좋아하셨습니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들은 것은 대학생 시절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철원 국경선평화학교에 와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 서울 새길교회 목회시절 1년에 한번 선생님께서 설교자로 오셨을 때 뵈었고,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에서 오재식 선생님을 모시고 일할 대 가끔 뵈었고, YMCA에서 좀 더 자주 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과 자주, 깊은 만남은 철원 국경선평화학교 시절부터라고 하겠습니다. 2013년 3월 1일 개교식에서 선생님은 축사를 해주셨습니다. 제가 철원에 가는 것을 제일 축복해주신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두 가지 호칭을 쓰셨습니다. ‘정박사’라고 부를 때는 마치 제자처럼 대하셨습니다. “정박사 베리타스에 글하나 써” 또 하나는 선생님은 저를 목사로 부를 때는 ‘정목사님’하고 존칭을 하셨습니다. 제가 소이산에서 종종 선생님 건강하시길 기도하는 메시지를 전해드리곤 했는데, 꼭 전화로 응답하시면서 ‘정목사님’하고 불렀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왜 그리 부를까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단순하지 않은 선생님만의 목사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있음을 저는 어림짐작이나마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면 저의 판단이 맞았는지 선생님께 여쭤보려고 합니다. 수줍고 번잡한 것을 안좋아하는 성격도 저와 선생님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서광선의 삶의 역사적의미
선생님은 1931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나 2022년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민족의 역사를 그 삶속에 고스란히 담고 사셨습니다. 특히 20세기 고난의 민족사는 그대로 서광선의 인생사였습니다. 선생님은 민족주의자 장군의 손자임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반일 의병운동을 하시다가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목사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소년 서광선은 일제 강점기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 누구보다 민족해방을 기쁘게 맞이했고 그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하셨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공산당을 미워하고 복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분이셨지만, 성인이 되고 신학자가 되신 후에는 누구보다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 서셨습니다. 미국 유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박사학위를 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는 유신독재가 극심했습니다. 학생들이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선생님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해직교수가 되셨지요.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교수가 되어 안정된 중산층의 삶을 사실 수 있었지만, 그 분 핏속에는 장군할아버지와 독립운동권 목사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시대의 아픔과 수난을 회피하지 않고, 그 악에 맞서 싸우면서도 뒤틀어지지 않으셨고, 선으로 악을 이긴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선생님을 기억하면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철학적 신학, 존재의 희망
선생님은 신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국경선평화학교 ’석학과의 대화 – 평화의 삶을 배우다‘라는 강좌에 오셔서 3박 4일간 저희들에게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선생님 속에 평생 동안 두 번의 존재론적 질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필연적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은 장군 할아버지가 사형 당하신 후 할머니는 같이 죽자는 결의로 자녀들과 함께 죽었는데, 그때 갓난 아기였던 아버지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아 남겨두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광선 선생님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지요.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평생 잊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한국전쟁시절, 공산군으로 징집당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군의관으로부터 ’너는 집으로 돌아가‘ 해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같이 갔던 동생은 징집되어 끌려가 전쟁터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꼼짝없이 죽게된 상황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이 살게된 이유를 평생 묻고 계셨습니다. 왜 나는 그때 살았는가 아무리 물어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선생님이 철학을 공부한 것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철학에서 찾을 수 없었기에 선생님은 신학으로 옮겨옵니다. 이렇게 해서 존재론적 필연성에 대한 해답을 찾는 철학적 신학자 서광선 선생님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은 신학자의 탄생을 가져오는 질문인데, 20세기, 지금도 살아계신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도 그런 신학자중에 한 사람입니다. 몰트만은 2차 대전시절 18세 독일군 병사였는데, 함부르크에 영국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4만 명 시민들이 불타죽고, 같이 길을 가던 친구병사도 죽었는데, 어찌하여 자신은 살아있는가를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지금 당신은 어디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았고 친구는 죽었습니까?’ 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질문은 무신론자 몰트만, 수학자 물리학자가 되려했던 그를 신학자로 전환시킵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기 신학흐름을 바꿔놓는 희망의 신학, 종말론적 신학이 탄생합니다. 한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가 종말을 향해가지만, 그 종말이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희망적 종말인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비록 이 세상의 부조리함과 불합리적인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종말론의 자리에서 돌아보면 희망을 향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갖고 이 세상 불의와 맞써 싸워야 한다. 1964년 출판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책상위의 신학에서 행동하고 참여하는 희망의 신학’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몰트만의 살아남음의 경험은 서광선 선생님의 경험과 유사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신학은 결코 책상위의 신학, 강단의 신학일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시대의 부름(징조)에 응답하는 참여 신학자셨고, 민중신학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하셨고, 후반기에는 평화와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생명평화신학자로 사셨습니다. 그런 결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해직당하셨고, 감옥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 작성과정에 참여하셨습니다.
시대의 불의에 항거하여 행동하는 신학자로서 선생님의 삶은 지금 우리 후학들이 기억하고 배워야 할 점이라 저는 믿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시는 그 순간까지 선생님은 무지개를 쫓는 새 약속, 희망의 신학자셨습니다
 
선생님은 살아생전 고향, 백두산 강계와 혜산을 꼭 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종종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약해지신 것인지, 저에게 전화를 걸어 “정박사, 내가 살아생전에 정말 고향 강계 혜산에 갈 수 있을까?” 그 사무치는 육친의 소망을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저도 한스럽습니다. 선생님 모시고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대답하곤 했는데, 약속을 못 지켰습니다. 선생님의 한이 나의 한이 되고, 우리의 한이 되고, 선생님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한이 되고, 이화여대 제자들의 한이 되고, 에큐메니칼 친구들의 한이 되고, 선생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한이 되고, 선생님의 책을 읽은 독자들의 한이 되고, 선생님을 존경하는 사업가, 정치인들의 한이 되길 바랍니다. 그 한은 원한이 아닙니다. 민족 사람의 한, 희망의 한입니다. 그래서 하늘 아버지 하느님이 우리 8천만 남북한민족의 한을 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멀지 않은 그 날, 우리가 백두산 아래 선생님 고향 마을을 찾아갈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선생님과 함께.
 
2023년 2월 25일, 14:00~16:00
국경선평화학교 건축현장(김동수기념 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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