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한중일YMCA 평화포럼(2017.12.16-20), Bible Study 2]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고
장윤재 (한국YMCA전국연맹 목적과사업위원장,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인류가 역사에서 배울 것은 하나도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학문으로서의 역사를 최초로 연구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믿기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어느 목사가 ‘인류는 성서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왜 그런 말을 남겼을까요.
인류의 역사는 길지만 문자 기록으로 남아있는 역사는 약 3천5백 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어느 학자가 이 중 전쟁이 있었던 해와 전쟁이 없었던 해를 나누어보았더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3천5백 년 가운데 전쟁이 한 번도 없었던 해를 세어보니 전체의 8%인 고작 280년 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92%인 3천220년 동안 인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날이 새서 전쟁으로 날이 저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류는 평화를 살다가 가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전쟁을 하다가 가끔 평화를 순간으로 맞이한다고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어느 다른 학자는 기원전 3천 년부터 지난 19세기까지 약 5천 년 동안 인류가 역사에서 살상한 인명을 추정해보았더니 대략 3천 만 명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20세기 단 1백 년 동안 인류가 전쟁을 통해 살상한 인명은 무려 1억 명이나 되었습니다. 가공할 군사과학 기술 덕분입니다. 이런 통계를 접하고 나면 왜 헤로도토스가 “인류는 역사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올해는 6.25 한국전쟁 발발 6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전쟁으로 민간인 약 250만 명과 군인 약 70만 명 등 3백 만 명 이상의 소중한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 또 다시 이 땅에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휴전’ 상태를 60년 이상을 살고 있습니다. 만약 제2의 한국전쟁이 터진다면 그것은 승자도 패자도 없고 민족 모두가 공멸하는 참혹한 핵전쟁이 될 것입니다.
평화는 인류의 중대한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예수님의 절대적인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루는 산에 올라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산상수훈’이라 불리는 이 산위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모두 8가지의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독문에서 읽은 대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애통하는 자, 운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만드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저는 이 8가지의 복들 가운데 7번째, 즉 평화를 만드는 “peacemaker”들에게 선포하신 복이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 복 중에 가장 큰 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 또는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평화는 ‘샬롬’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샬롬은 무슨 특별하고 어려운 신학적 용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일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한 나라의 인사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삶과 역사를 엿볼 수 있다고 하지요. 옛날 우리나라에서 인사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밤새 안녕하셨어요?’ 혹은 ‘진지 드셨어요?’였습니다... 얼마나 굶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밥을 먹었느냐가 인사말이 되었겠습니까! 얼마나 밤새 큰 난리가 나곤 했으면 아침인사가 “Good morning”(좋은 아침)이 아니라 ‘밤새 별 일 없었느냐’가 되었겠습니까! 이화여대에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공부하던 한 학생이 저에게 ‘밤새 안녕하셨어요?’의 가장 좋은 영어번역은 “Are you still alive thing morning?”, 즉 ‘오늘 아침 아직도 살아 계세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5천 년 역사에서 975번이나 외침을 받은 우리 민족의 고단했던 삶을 참 잘 포획한 번역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끼어 이렇게 역사가 힘든데, 이스라엘도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이라는 3개 대륙이 만나는 한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늘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 하루도 평화로울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얼마나 평화가 소중했겠습니까? 샬롬, 그 성서의 평화라는 용어는 이스라엘의 고난과 삶 한 가운데서 간절하게 피어난 소망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샬롬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평화라는 단어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물론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까지는 똑같습니다. 하지만 샬롬의 의미를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비록 지금 전시가 아닌 평시라 하더라도, 만약 우리 가운데 전쟁과 갈등과 분열의 불씨인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이 있다면 성서는 그 상태를 샬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샬롬은 적극적 평화입니다. 능동적 평화입니다. 샬롬이라는 평화는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정의입니다. 샬롬은 정의 위에 세워진 평화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특별히 돌보시는 야훼 하나님께서는 정의에 기초한 평화를 강조하십니다. 사회적 갈등과 전쟁의 뿌리가 되는 사회적 불의와 억압을 발본색원하는 것이 샬롬의 평화입니다. 사실 평화(平和)라는 한자도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공평할 평(平)자에 조화로울 화(和)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화로울 화자는 벼 화(禾) 더하기 입 구(口)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평하게 밥을 나누어 먹을 때 오는 그 무엇이 평화라는 뜻입니다. 고대 중국인들도 고대 히브리인들이 비슷하게 평화를 이해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샬롬은 정의에 기초한 평화입니다. 미국 민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가 “진정한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다”(True peace does not mean the absence of conflict but th e presence of justice)라고 했을 때 그는 성서가 말하는 샬롬의 평화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샬롬은 화해를 강조합니다. 샬롬의 반대말은 히브리어로 ‘쉐다’인데 그 뜻이 무엇이 깨지다, 쪼개지다, 상하다 입니다. 만약 공동체 구성원의 단 한 명이라도 불의와 무관심으로 그의 영혼이 깨지고 육신이 상한다면 설사 나머지 공동체 구성원이 다 행복하다 하더라도 성서는 결코 그것을 샬롬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새끼손가락이 종이에 베이면 온 몸의 평화가 깨집니다. 한 가정의 어린아이가 병들면 그 집안의 평안이 사라집니다.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로 길거리에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치면 그 사회의 통합은 무너집니다.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그것이 깨지거나 쪼개지거나 상하여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 깨지면 그것은 샬롬이 아닌 것입니다. 몇 년 전 그 끔찍했던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2003년 가을, 저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대구에 있는 한 신학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고속열차가 없어서 서울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3시간 반을 달려 동대구역에 내렸습니다. 거기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대구 지하철역에 내려가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구지하철 중앙역 쪽 터널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뉴욕이 맨해튼에서 유학할 당시 911 사태로 무너졌던 그 쌍둥이 건물더미에서 불어오던 것과 똑같은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 저는 맨해튼에 있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 위로 비행기가 아주 낮게 날아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세계무역센터에 불이 났다는 아내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뛰어가 TV를 보니 정말 거기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다 저 큰 건물에서도 불이 나는구나!’ 저는 고층빌딩 화재를 다룬 영화 “Towering”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치솟는 연기 사이로 커다란 구멍이 크게 뚫려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단순한 화재는 아닌가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건물 뒤편의 쌍둥이 건물에서 어마어마한 화염이 하늘로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잘 아시지만 첫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을 먼저 치고 난 다음 정확히 18분 뒤에 두 번째 비행기가 남쪽 건물을 파고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보았던 순간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거의 전 인류가 이 순간은 생생한 영상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냄새’로도 911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기억 가운데 사람에게 가장 오래 가는 것은 냄새의 기억이라고 합니다. 긴급구호 활동가 한비야 선생이 스리랑카 쓰나미 피해현장을 다녀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발 밑 물속에 물컹물컹 밟히던 감각의 기억은 어찌 어찌 잊을 수 있는데 냄새의 기억은 잊기 어렵다고 합니다. 쓰레기차만 옆으로 지나가도 기절한다고 합니다. 맨해튼에서 911 이후 모든 것이 주저앉은 그 ‘그라운드 제로’에서 겨우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저의 신학교 기숙사 쪽으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저는 참혹한 냄새를 맡으며 2년 동안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 했습니다. 저는 그 냄새를 ‘지옥의 냄새’(scent of hell)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지옥에 가면 반드시 그 냄새가 진동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냄새는 인간이 만든 모든 물질과 그리고 (말씀드리기 참 죄송하지만) 인육이 함께 타서 뒤섞인 냄새입니다. 저는 911 이후 종종 그 그라운드 제로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희생자들을 위해 그리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서 종종 그리 가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눈이 따가워 서 있을 수 없었던 좀 더 갈라치면 그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누가 예리한 면도칼로 코 속과 두뇌세포를 쪼개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거기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저에게 21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발 그와 똑같은 냄새가 대구지하철 중앙역 쪽에서 불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학위를 받고 귀국해 이제 겨우 그 냄새에서 벗어났다고 좋아했는데, 첫 강의를 맡아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여행을 하던 그 길 위에서 다시 그 냄새를 맡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58세의 한 남자가 1997년 IMF로 실직한 이후 어렵게 혼자 살다가 세상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혼자 죽기 억울하다고 생각하여 휘발유를 뿌려 지른 불에 아무 영문도 모르도 아무 죄도 없는 1백 30여 명의 고귀한 생명들이 대구지하철 속에서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지금도 그 지옥불 속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립니다. 지하철 근처는 얼씬도 못하고 심지어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한 개인이 깨지니 사회 전체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한 영혼이 쪼개지니 공동체 전체의 평화가 무너졌습니다. 샬롬의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남자가 정신병 환자라서 그런 극단적 행동을 했을 것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갈수록 커지는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원한으로 방화범죄자가 꾸준히 증가해왔다고 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상류층의 범죄는 17%나 줄어든 반면 하류층의 범죄가 수직상승했는데, 그 범죄자들의 연령도 청년대가 아니라 40-60대라는 겁니다. 57세의 대구지하철 방화범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사회적 정의와 상생 그리고 공존의 도덕이 무너져 샬롬의 평화가 깨진 곳에서 그 끔찍한 범죄는 소리 없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태수 시인은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이후 지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봅니다. “아 이 부끄러움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으랴, 이 경악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으랴, 우리는 사랑으로 따스하게 끌어안지 못하고 나눔과 베풂보다는 차지하고 빼앗았으며, 위로 아래로 자기밖에 몰랐다. 재앙의 불씨를 키웠다.”
그런 것 같습니다. 사회구성원 전체가 안전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영혼이 깨지거나 쪼개지거나 상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스스로 ‘재앙의 불씨’를 키우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성서는 그것을 결코 평화라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전쟁이 없는 평시라 하더라도 성서는 주님을 우리에게 평화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서의 예언자들은 그런 상태의 평화를 ‘거짓 평화’ 혹은 ‘위선적인 평화’라고 질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그리고 각자의 나라와 세계에서 경함하고 있는 평화는 어떤 평화입니까? 폭력과 불의로 만들어진 거짓, 위선적인 평화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을 주신 참 평화, 샬롬의 평화입니까?
예수님 시대에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은 군사력으로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고 평화가 왔다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그 평화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 불렀습니다. 강자 쪽에서 본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평화였습니까? 1백여 년 전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후 무력으로 모든 저항을 진압하고 내선일체로 조선과 일본이 한 몸이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말하자면 ‘팍스 자포니카’(Pax Japonica), 즉 ‘일본의 평화’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평화였습니까? 불의와 폭력으로 억지로 하나 되게 만든 평화는 서서가 평화가 아닙니다. 이런 평화를 우리는 ‘죽은 숲 속의 평화’라고 부릅니다. 숲은 원래 온갖 생명으로 활기가 넘쳐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장군 하나가 이것이 시끄럽다고 숲 속 모든 짐승과 새들과 심지어 연못의 물고기까지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얻은 침묵의 평화가 바로 ‘죽은 숲 속의 평화’입니다. 이런 평화는 사이비 평화입니다. 거짓 평화입니다. 아니, 평화를 가장한 불의입니다. 모든 생명의 소중함과 정의를 강조하는 성서의 평화는 절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이 평화가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로마의 평화’나 ‘일본의 평화’가 아닌 우리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화, 샬롬의 평화가 바로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즉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명의 길은 폭력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보복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길은 평화의 길이었습니다. 비폭력 저항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길만이 세상의 참 평화, 참 생명, 참 구원의 길이 될 것입니다.
911 때 저는 사랑하는 학생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앤드류 킴’(Andrew Kim)입니다. 애칭으로 앤디라 불렀습니다. 저는 유학시절 맨해튼의 뉴욕한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이 교회는 3.1운동 직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우신, 맨해튼 컬럼비아대학 앞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는 지금도 안익태 선생님이 애국가를 지으실 때 사용한 피아노가 보존되어 있고 저는 종종 이 피아노를 치며 어려울 때마다 힘을 얻곤 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유학생활 8년 동안 뉴욕에 공부하러 온 한국인 석박사생 수 백 명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하고 장학금을 모아주는 목회를 했습니다. 앤디 킴은 같은 교회를 다니던 신실한 한 가정의 사랑스런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민 1세대로 새벽청과시장과 생선시장 그리고 세타소 등 안 해본 일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어느 날 나에게 자기 손을 보여주면서 생선시장에서 어찌나 하루 종일 물속에 손을 담그고 살았는지 습진이 다 걸린 손을 보여준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키운 자식은 고맙게도 공부를 잘해 명문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나 한번은 일해보고 싶은 꿈을 꾸던 그 세계무역센터 북쪽타워 102층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911 그 날 그 시간에 앤디는 그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는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앤디의 장례예배를 드리던 날 저는 그의 친형이 나와 했던 인사말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런 처음 한동안 복수심에 시달렸다고 말했습니다. 중동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다 죽이고 싶은 복수심에 몸을 떨었다고 했습니다. 끔찍이 사랑하는 동생을 잃고 나니 중동사람들이 기르는 턱수염까지 가증스러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반대하도 했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911에 보복하다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려 하는데 자신은 그 전쟁을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보다 그 전쟁을 찬성해야 할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모두 의아해했습니다. 앤디의 형은 하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니 이렇게 내 가슴이 찢어져 아픈데, 만약 또 어디서 전쟁이 나면 또 다른 사람들이 지금 나처럼 가족을 잃고 이렇게 아플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기에 저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사실 전쟁이 터지면 사상자의 3분의 2는 무고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이라고 하지요. 자기처럼 또 아픈 사람이 없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앤디의 형과 같은 사람이 바로 예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중일 평화포럼 참가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평화 속에 사십니까? 이 세상이 말하는, 이 세상아 주는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 안에 거하십시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은 “Peace-maker” 즉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평화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평화를 논할 수도 있지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평화는 샬롬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정의에 기초한 평화입니다. 그것은 단 한 영혼도 깨지거나 쪼개지거나 상하지 않는 온전한 평화, 완전한 평화입니다. 그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 그리고 일터를 다스리게 하십시오. 나아가 아직도 60년이 넘도록 휴전상태로 분단되어 있는 이 민족과 나라에 넘치도록 하십시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 이 세상에 샬롬의 평화를 만들어가십시오. 평화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을 찾아 돌보고 감싸가 온 사회가 서로 화해하고 화목하게 하십시오. 시편의 아름다운 말처럼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게”(시편 85:10, 공동번역) 하십시오. 그렇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산위에 올라 이렇게 선포하시며 복을 주실 것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평화를 향한 세 개의 출애굽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세 개의 출애굽(Exodus)이 필요합니다. 이 세 개의 출애굽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출애굽은 냉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곳 분단된 한반도에서 ‘새로운 평화로의 출애굽’(Exodus into new peace)입니다. 1945년 일본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은 한민족에게 하나의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단과 전쟁과 냉전체제로의 편입을 의미했습니다. 1953년에 서명된 정전협정은 당장 눈앞의 싸움은 중지시켰지만, 전쟁은 끝내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오바마 행정부의 중국 견제를 위한 추축(樞軸, pivot)이 되었고, 신 냉전 안에, 핵무기를 포함한 무한 무기경쟁 안에 갇혔습니다. 이 결과는 파국적일 것입니다. 미국방부는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 개시 24시간 안에 1백 50만 명, 일주일 안에 6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고 추산하였습니다.
2017년 올해는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평화체제가 그것을 대체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든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온 지난 64년은 근심과 불안의 세월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영속하는 전쟁의 위협과 공포 속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정전체제는 60년으로 충분합니다! 60년의 거짓 평화(pseudo peace)도 이제 충분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출애굽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부터 항구적인 평화로의 출애굽입니다. 새로운 평화로의 출애굽입니다. 이것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198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는 한반도에 대한 성명서를 채택하면서 한반도의 분단을 세계분단의 축소판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 곧 다가오는 모든 인류의 화해를 가리키는 표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저는 여러분을 ‘새로운 빛으로의 출애굽’(Exodus into new light)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 출애굽은 눈을 멀게 만드는 핵폭탄의 섬광과 원자로가 내뿜는 치명적인 죽음의 빛으로부터 핵무기와 핵발전이 없는 세계(a world without nuclear weapons and power)를 향한 출애굽입니다. 동북아시아는 핵 위험에 있어 ‘전 지구적 폭심지’(global ground zero)가 되었습니다. 우리 지역은 이 세계에서 핵폭탄이 실제로 사용된 유일한 지역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부산으로부터 겨우 해협 하나 건너편에 있습니다. 또한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는 무려 1천 번 이상의 핵실험이 거주민들에 대한 아무 고려도 없이 마구 실시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핵무기를 직접 보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동맹국의 핵무기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총회가 아시아 땅에서 처음 열린 것은 1961년 뉴델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총회 이후 전 세계적으로 핵보유국의 숫자는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놀랍게도 아시아에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된 총 9개의 국가 중 6개가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가 4개나 있습니다. 1961년에 아시아에는 단 한 기의 핵발전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에는 117개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에 있고, 344개가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에 있습니다. 이 모든 핵발전소들은 우리의 무한 경제성장에 대한 탐닉과 소비주의적 삶에 동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핵무기와 핵발전이 한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핵무기는 군사용이고 핵발전은 평화적 민간용이라는 구분은 잘못된 구분입니다. 애초에 핵에너지는 핵폭탄을 만들기 해 개발되었습니다. 핵보유국들은 이른바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위장막 아래 핵폭탄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핵무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핵발전도 또한 문제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핵무기와 핵발전은 평화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기독교 신앙과도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우리는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지뢰밭 속에서 평화포럼을 열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핵발전 밀집도가 높은 나라입니다. 지난 2013년에는 한국과 일본과 대만의 성직자 및 평화 활동가들이 40일 동안 한국의 가장 오래된 핵발전소인 고리 핵발전소의 폐쇄를 주장하며 부산시청 앞에서 금식기도회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당시 지은 지 35년이나 된 이 발전소는 벌써 120번이나 고장이 났었습니다. 이 핵발전소의 반경 30킬로미터 안에는 무려 34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한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하면, 만약 고리에서 후쿠시마와 같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무려 1백만 명 가량 사망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로 충분합니다! 체르노빌로 충분합니다! 스리마일섬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몸이,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답고 신성한 창조세계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 위험한 빛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탐욕과 공포 위에 세워진 핵 문화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핵 산업은 우리 자신의 허욕과 안락과 세상적인 욕망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밖’에 있는 저 위험한 불을 끄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새로운 불을 켜야 합니다. 우리 밖의 죽음의 빛을 끄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생명의 빛을 밝혀야 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핵발전소로부터 생산된 전기에 더 이상 포로가 되지 않겠다는 상징적 행동으로 잠시 불을 모두 끄고 어둠 속에 머물기를 제안합니다. 대신 제 앞에 작은 촛불 하나 켜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이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이 작은 나의 불 빛, 나는 그것을 밝히리라.”(This little light of mine, I’m gonna let it shine) 내 안에 생명의 빛을 밝히십시오. 내 안에 평화의 등불을 켜십시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탐욕과 핵에 대한 망상과 유혹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영적 각성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저는 여러분을 ‘새로운 지구로의 출애굽’(Exodus to new earth)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 출애굽은 산업시대로부터 생태시대로의 출애굽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생물 종(種)과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전 지구적 규모의 ‘생태적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도전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홍수나 지진과 같은 일시적 재난에 직면했을 때에는 서로 돕지만, 기후변화에 의해 식량위기나 식수위기와 같은 장기적인 재난상황에 도래했을 때에는 서로 싸우고 전쟁을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전 인류와 교회 그리고 기독교 시민사회에 던져진 질문은 어떻게 인류가 기후변화로 인한 장기적인 재난상황 속에서 서로 싸우지 않고 상생의 평화의 길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태평양과 카리브 해와 뱅골만의 작은 섬들에 사는 소위 ‘탄소문명’의 피해자들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정의가 바로 평화의 열쇠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기후정의'(climate justice)가 우리가 말하는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의 요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후변화(climate change)가 아니라 문명변화(civilization change)입니다! 화석연료와 핵에너지에 기초한 지금의 탐욕과 정복의 문명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도,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200년의 산업시대, 이제 충분합니다! 우리는 산업시대로부터 생태시대로 출애굽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출애굽 운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회와 시민사회는 이 ‘새로운 지구를 향한 출애굽’의 신실한 여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60년의 정전체제, 이제 충분합니다! 70년의 핵 포로생활, 이제 충분합니다! 200년의 산업문명, 이제 충분합니다! 우리는 전쟁과 죽음과 불의의 지배체제로부터 출애굽하여 정의와 평화의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순례자란 두 발로 대지를 걷는 사람입니다. 차에서 내려 대지를 천천히 걷는 것이 순례입니다. 하지만 순례는 방랑이 아닙니다. 소풍이나 한가로운 산책도 아닙니다. 순례는 떠나는 것입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빌 4:7) 평화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평화에 대한 우리의 상상은 언제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불의와 전쟁과 탐욕의 체제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를 걷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례는 곧 생명을 향한 출애굽(Exodus to Life)이 되어야 합니다.
40년간의 광야생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들과 다시 언약을 세우십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의 자손이 살려거든, [이제] 생명을 택하여라.”(신 30:19) 이 언약은 당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손과도 함께 세우신 영원한 언약입니다.(신 29:15) 이 언약은 또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신 우주적 언약입니다.(신 30:19) 하나님께서는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너희 앞에 내놓았다”(신 30:15)고 말씀하십니다. 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신 30:19)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와 너희의 자손이 살려거든, [이제] 생명을 택하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제 생명을 택하여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희망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견됐던 21세기는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의와 양극화,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 종교간 갈등과 충돌, 세대 간 ․ 문화 간 단절, 그리고 영적 ․ 정신적 혼돈 등,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심각한 위기의 시대로 경험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인간의 탐욕이 문명의 멸망을 재촉하고 심지어 우주적 종말까지 예견케 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롬 8:22)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에게 “이제 생명을 택하여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now)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제’는 종말론적인 시간입니다. 그것은 카이로스의 시간, 즉 회심과 결단과 은총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생명의 길을 내놓으셨고, 이제 그만 전쟁과 폭력과 자기파멸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이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과 초대 앞에 우리는 함께 이 기도를 드리며 평화를 향한 우리의 믿음의 순례를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동행해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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