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식 농촌운동의 개혁자
청만(晴巒) 이기태(李基台) 선생
청만(晴巒) 이기태(李基台) 선생은 1894년 6월 7일에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닮아 전형적인 한국의 선비 그대로의 천성과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학문과 글쓰기를 즐겼다. 담담하고 조용한 그의 일상생활은 극히 평범했으나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으며, 두드러지게 사회에 나타나는 일이 없었어도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YMCA와의 관계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활발히 촉진되었던 덴마크식 농촌운동에 가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청만 선생은 빈틈없는 문필가로서 YMCA 기관지인 청년(靑年)에다가 ‘농촌으로 가자’라는 제목의 글을 썼으며, ‘정밀의 농업’이라는 논문을 9회나 연재하기도 했다.
청만 선생은 정열과 지식을 겸비한 농촌운동가이며, 덴마크식 농촌운동의 개혁자였다. 그의 정열과 순정은 그의 외침인 ‘농촌으로 가자’(청년, 1926년 2월호)라는 글 중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일부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은 도회지 대 농촌문제가 제일 중대하게 된 때이다.
상공업 대 농촌문제가 또한 중대한 때이다. 자본주의는 상공업주의다. 19세기는 상공업주의가 세계를 정복한 시대였다. 그때 자본주의는 세계적 상공업주의이다. 상공업주의가 도량(跳梁)하여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농업이 무의미한 것으로 밀려나고 압박을 당하였다….
그러나 도회지가 있은 후에 농촌이 있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농촌이 있은후에 도회지가 생겼다.
성경에서 보면 가인도 밭갈고 아벨은 목축을 했다. 농촌은 창조적인 동시에 식량의 공급장이다. 그리고 영국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자유케 된 것이 농민들 때문이었다. 화란이나 카나다, 호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신, 전화, 라디오가 판을 친다. 이로 인하여 인심은 위태로와지고 도덕심은 희미해졌다.
아, 이러고서 그만 그칠 것인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또다시 자연을 애연하게 되는 것이다.
이지(理智)가 더 이상 구실을 못하게되어 영혼의 반발을 받기 시작했다. 이지로 인하여 빼앗긴 영혼이 그 고향을 사모하여, 그 고향의 신광명과 신생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요란한 라디오 소리가 듣기 싫어 이 고요하고 내적인 영혼에 귀를 기울이는 시대가 왔다. 이제는 새 시대가 왔다…. 현대문명은 그 직분을 더 이상 다할 수 없게 되어 도회지로부터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시대가 왔다. 역사의 회전이 시작되었다. 한 국가의 성쇠, 한 사회의 운명은 다 농촌에 달려있다.
농촌으로 돌아가자! 농촌! 농촌! 농촌으로! 그곳에는 진과 선과 미, 이 모든 것이 있다. 그곳에는 생명이 있고 신의 진리가 충만하다. 도회지의 아름답지 못한 것은 다 매장하고 농촌 그 위에다 신의 왕국을 건설하자!
나는 믿는다. 저편쪽 언덕이 보인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라 현실이다.」
대개 YMCA 덴마크식 농촌운동이라고 하면 홍병선(洪秉璇) 목사만을 손꼽는데, 덴마크식 농촌운동의 최초의 연구가는 청만 선생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청년지에 9회에 걸쳐 연재한 그의 조사연구논문 ‘정밀의 농업’은 그 당시에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연대적으로 제일 선봉을 달리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청만 선생은 YMCA 농촌운동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이며 성공적인 사업이었던 신촌의 ‘고등공민수양소’의 책임자로 다년간 일했다. 거기에서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양돈, 양계, 양토, 칠면조 기르는 법, 곡물증산법, 윤작법, 저장법, 비료 쓰는 법 등을 직접 가르쳤다.
8.15해방 이후 종로 YMCA 회관을 재건할 당시에는 필자와도 함께 일했는데, 선생의 그 고결한 인품과 선비다운 생활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었다.
한편, 선생은 독특한 취미와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의 필력은 대단했으며 항상 시정으로 살았다. 또한 수석수집과 함께 화초가꾸기를 즐기셨는데 그 중 매화와 난초를 가꾸는데는 일가견을 갖고 계셨다.
선생이 별세하기 3일 전 문병을 갔을 때인데, 식도암으로 극도의 진통을 느끼면서 오리같이 생긴 수석을 가리키며 ‘오리, 저것 가지고 가시오, 저 오리처럼 생긴 수석말이요!’하며 주셨다. 이처럼 선생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자상하고 멋있는 심정으로 후배를 사랑했다. 필자의 아호는 오리(鳧)이기 때문에 오리에 관한 시 즉 兎舂千山雪 鳧耕萬里波란 시를 발견하여 나에게 알려준 이도 선생이요, 이 시를 써서 족자로 만들어준 이도 선생이었다.
기억나는 일은, 1970년 1월 6일 소천(召天)하신 그 날 아침에 매화등걸에서 꽃이 피어나 향기를 풍기었던 사실이다. 부음을 듣고 달려갔던 친지와 일가친척들은 이처럼 매화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선생이 생전에 매화꽃을 몹시 사랑하셔서 매화마저도 마지막 인사를 하느라고 엄동설한에도 꽃을 피우는구나 하면서 감탄했다.
등걸
-1981.2.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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