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수(陸定修 또는 陸定洙) 선생
육정수(陸定修 또는 陸定洙) 선생의 아호는 삼전(三田), 본관은 옥천(沃川)이다. 1885년 2월 25일, 충청북도 옥천(沃川)에서 명문거족인 육(陸)씨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그(故 陸英修 여사의 사촌오빠)는 12세 때인 1896년에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마침 독립협회가 창설되었으므로 학당 안에서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등으로부터 신문학과 의회헌법, 만국공법(萬國公法, 즉 국제법), 영어 등을 배웠다. 그 당시의 동창생으로서는 이승만, 신흥우, 여운형, 정교, 양홍묵, 오긍선 등 명사들이 많았는데, 이들로 학교 안에 협성회(協成會)가 조직되었을 때에 그는 창설회원의 한사람으로도 활약했다.
YMCA운동에 그가 처음으로 가담한 것은 1901년 배재 대학부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였다. 때마침 미국YMCA로부터 파송된 질레트(P. L. Gillett, 吉禮泰)가 배재학당 안에 학술청년회(學術靑年會), 즉 학생YMCA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그 때 육정수 선생은 학술 청년회의 사찰(査察, 회장은 閔贊鎬)이었다.
처음에는 내무부 주사, 해동은행 주역, 중앙고보와 배재고보 등에서 영어와 역사, 지리 등도 가르쳤던 그의 YMCA에서의 행적을 간단히 말해 보면,
(1) 선생은 1906년에 정식으로 개관된 YMCA학관의 부학감으로뿐만 아니라 친접부(親接部, 오늘날의 회원부)의 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원모집 때는 최고성적을 내는 회원 중의 한사람이 되기도 했다.
(2) 1913년 유신회 사건으로 청년회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선생은 간부회원의 한사람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즉 일제에게 매수당한 회원들이 YMCA총회에 침입하여서 YMCA 이사 자리를 점령하려 기도할 때, 선생은 김창제(金昶濟), 김인식(金仁湜), 최성모(崔聖模) 등과 정회원 조사위원으로 선출되어 불법회원들을 적발했으며 그 결과 유신회 일파의 흉계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와다나베(渡辺暢) 등 일본인과 유일선(柳一宣) 등 유신회 간부들을 이사로 뽑자던 일제의 흉계는 완전히 봉쇄되고 YMCA는 정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3) 1914년 개성에서, 서울Y(당시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Y연맹체인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가 조직될 때에는 서울 중앙Y의 16명 총대 중의 한사람으로 활약하였다.
(4) 1916년 YMCA학관 창립 10주년 기념식 때에는 10년 근속표창을 받았다. 이때의 공경을 ‘중앙청년회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즉「9월 4일 본 학관 졸업생(중학 학우회)주최로 본 학관 설립자 부락만(F. M. Brockman), 관장 육정수, 이교승(李敎承) 등 3씨에 대한 10주년 기념회를 개(開)하였는데, 동 3씨는 학관 창립 이래로 교육의 임(任)에 당하여 10여년 성상의 노고를 1일과 여(如)히 경과하였으니 동일한 학교에서 여차(如此)히 장구적근(長久積勤)함은 실로 교육계의 한유(罕有)의 사(事)이었다.」라고 보도했던 것이다.
(5) 선생은 미국인 명사들이 와서 강연을 할 때에는 항상 통역으로 활약하였다. 예를 하나 들면 1916년 미국의 유명한 인류학자 스타(Star)박사가 와서 강연을 할 때였다. 그때 선생이 통역을 맡아 했는데,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약한 민족이 반드시 강한 민족에게 완전히 삼킴을 당한 예는 없습니다. 큰 고목이 거꾸러졌지만 그 뿌리에서 싹이 나오는 것처럼 약한 민족은 다 죽은 것 같지만 다시 소생할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약한 민족은 칼을 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통역을 해서, 그 당시 무단정치하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죽은목숨과 같이 살던 국민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6) 일제 말기에는 서무부 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이처럼 선생이 서무부를 맡은 것은 일제말기 YMCA 재산을 사수해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7) 8.15해방 후 선생은 다시 YMCA를 지키는데 선봉을 섰다. 해방후 대다수 Y지도자들은 새 나라를 세우는 일에 분주하여 Y를 떠났지만 선생은 그 모든 유혹과 명예를 물리치고 서울Y 부총무로 취임하여 재건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1949년4월 4일 65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선생은 YMCA를 잠시라도 떠나지 않고 일생을 Y에 바친 열렬한 Y맨이요 애국자이다.
등걸
-1980.10.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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