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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29. 계병호 선생

by yunheePathos 2018. 12. 4.

계병호 선생

 

계병호 선생은 18961014일 평북 선천면(宣川面) 당골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 당시 평북 지방의 유명한 기독교학교이던 선천 신성학교(信聖學校) 졸업생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

신성학교는 1906년 장로회 선교회 사업으로 창설된 학교로서 1912105인 사건 때에는 가장 문제가 되었던 학교이다. 다시 말해서 105인 사건은 제1대 조선총독 데라우찌(李內正毅)란 자가 한국기독교 세력을 뿌리뽑기 위하여 수 백 명의 기독교인들을 검거했다가 그중 105명을 정식 재판에 회부했던 사건이다. 1910115일 압록강 철교의 가설공사를 마치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가는 데라우찌 총독을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이 만주 안동(安東)에 사람을 보내 권총을 사다가, 선천 신성학교 천정 속에 감추어 두고 거사하려 했다는 조작극이었다. 그리하여 이 학교 학생들과 선생들은 대거 검거를 당했고 이일로 인하여 학교는 쑥밭이 되었었는데, 그 뒤 이 학교의 교장 맥큔(G. S. McCune)씨는 학교 재건을 위하여 서울중앙YMCA에서 백남진(白南震), 최경희(崔敬喜), 현동순(玄東淳), 김 일(金 一), 박영준(朴英駿) 등 우수한 선생을 초빙해 갔던 것이다.

계병호 선생은 191621세 때 이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곧 서울에 올라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의 전신) 상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193.1독립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요행히 피검을 면하여 고향에 돌아와 숨어있게 되었다.

이 숨어있는 기간에 그는 선천YMCA를 창립하게 되었다. 즉 그는 연희전문학교 학생YMCA의 회원과 중앙YMCA의 회원이었던 경험을 살려, 19196월에 선천읍 북교회(北敎會)에서 장규명(張奎明), 정도원(鄭道元), 최현칙(崔賢則), 김지일(金志一) 등과 함께 선천YMCA를 창립하여 그 초대 총무가 됐다. 그리고 일가가 되는 계()씨 부인이 희사한 2백여 평의 대지에다 80여 평의 건물을 짓고 4백 여명의 회원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상경해서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복교하여 1922년에 졸업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가 모교인 신성학교의 교사와 청년회 초우로서 활약하다가 1925년부터 중앙YMCA가 덴마크식 농촌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일 때에 YMCA연합회 간사가 되었다.

그런데 1929년부터는 다시 선천YMCA 총무 겸 관서지방 담당 간사가 되었다. 당시 YMCA 연합회는 농촌운동을 더 조직화하여, 미국에서 교육 전문가로 파송되어 온 쉽(F. T. Shippe, 沈宣燮)이란 사람을 1929년부터 관서지방에 파송하게 되었는데, 계병호 총무는 쉽씨와 짝이 되어 관서지방 농촌운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1931년에 미국으로 가서 간사 훈련을 받고 귀국한 두에는 중앙YMCA의 간사,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8.15해방이 될 때까지 충실히 봉사했다. 그는 성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8.15해방 뒤에는 서울 영락교회 창설에 활약했고, 1948년에 동 교회의 제 2회 장로로 장립, 동 교회가 경영하는 베다니 기업 주식회사 사장, 보성여자 중고등학교 교장, 영락 고등공민학교 교장, 영락 중상업고등학교 교장, 영락기도원 원장, 영락 유치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성격이 매우 온화하고 평화적이어서 그가 가는 곳에는 싸움이 없었다. YMCA간사 시대에는 항상 남북YMCA 싸움에 중재역할을 하였으며, 보이스카웃 운동, 무산아동의 교육, 삼동 소년촌 운동, 소년소녀의 캠프활동에도 선구자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 싸움을 한다면 잘못 믿는 증거입니다. 더욱이 YMCA는 교회와 교회, 교회와 사회가 잘 화합하도록 하는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그는 YMCA의 평화의 사람으로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1972년에 은퇴하여 영락교회 원로 장로로 있다가 19793384세로 서울에서 별세했다.

등걸

-1980.9.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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