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翰西) 남궁 억(南宮 億) 선생
그는 언론인․시인․애국투사․YMCA이사를 역임하였고 아호는 한서(翰西)이다. 1863년 12월 27일 서울 태생으로서 일제가 보기 싫어 강원도 홍천국 보리울이라는 곳에서 숨어살다가 1939년 4월 5일에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업적을 몇 가지만 든다면,
첫째, 1896년 독립협회 창설에 가담한 것과 1898년부터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한 것을 들 수 있다. 국가의 문화발전과 사회계몽을 위해서는 일간신문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황성신문의 사장 겸 주필이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옥고도 치루고 정간도 여러 차례 당했지만 이 신문의 공헌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있어서 빛나는 것이었다.
둘째는 선생의 공헌을 그의 교육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생은 1895년 민영환(閔泳煥) 선생이 설립한 흥화학교(興化學校)의 교사가 된 것을 비롯하여 1906년 강원도 양양 군수로 있을 때에 창설한 현산학교(峴山學校), 1910년에는 서울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가 되어 국사, 국문법, 가정교육 등을 맞은 일, 1912년에는 상동(尙洞) 청년학원의 원장 겸 교사로 있던 일, 1918년부터 강원도 홍천군 보리울에 낙향하여 그곳에 모곡학교를 세우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던 일 등을 들 수 있다.
셋째로 선생은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된 이래 그 회원이었으며, 초창기부터 이사로서 크게 봉사했다. 특히 좌옹 윤치호 선생과는 사돈 간이었으며, 월남 이상재 선생과는 독립협회사건과 개혁당 사건으로 함께 옥고를 치룬 동지였던 관계로 처음부터 황성기독교청년회와 관계가 깊었다. 특히 1913년 한국Y 대표로 한일Y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여 투쟁한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선생은 1918년 서울을 떠나 낙향을 하기까지의 기간 중에는 오로지 청년회에 몸담아 민중계몽에 힘썼던 것이다.
그리고 넷째,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유별난 애국정신이었다. 선생은 배화학당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무궁화로 수놓은 조선 지도를 만들어서 팔았으며, 시골에 낙향한 뒤에는 무궁화 묘목을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던 것이다. 낙향을 할 때 선생은 56세였다. 그때에 지은 시가 유명한 「기러기 노래」이다. 「원산석양 넘어가고 찬이슬 올 때, 구름사이 호젓한 길짝을 잃고 멀리가, 벽공에 높이 한소리 처량, 저 포수의 뭇 총대는 너를 겨냥해」라는 가사이다. 이 가사는 곡조가 붙여져 일정 때 많이 불리웠는데, 이 가사 속의 기러기는 나라 잃은 한민족을 뜻했고, 포수는 왜적을 뜻했던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애국정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낙향하면서 이러한 노래를 처량하게 불렀던 것이다.
이런 처량한 심경으로 낙향한 선생은 곧장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지를 사서 열 칸 짜리 예배당을 지었다. 이 예배당을 중심으로 선생은 자신의 이상향운동을 했던 것이다. 이 예배당이 모곡학교의 모체가 되었고, 이 예배당을 중심으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선생은 본래 양반출신이었으나 조금도 양반티를 안내고 농민들과 같이 살았다.
언젠가 선생은 농사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마태복음 9장 37절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는 구절을 읽고 조용히 기도를 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을 넘은 쓸모 없는 몸이오나 민족을 위해 바치나이다. 아무리 혹독한 왜놈들 앞에서도 변절하지 않게 하소서」 간절히 기도를 한 다음 시 한 수를 지었다.「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라는 시다. 이 시가 찬송가로 채택이 되어 오늘까지 불리고 있으며, 일정 때에는 교회와 학교에서 안 부르는 데가 없었다.
그리고 선생은 학교 경비를 마련한다는 구실로 민족의 꽃인 무궁화 묘목을 해마다 수 십만 주씩 길러서 온 나라에 보급했다. 이를 위하여 선생은 손수 삽을 들고 묘목에다 거름을 주었다. 십전 짜리 밀짚모자에 짚신을 신고 개똥을 주워다가 거름을 주었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학생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죽을 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실과 나무 밑에 묻어서 거름이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못보고 가지만 너희는 보게될 것이다」라는 유언을 했던 것이다.
등걸
-1980.6.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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