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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24. 청년의 정신교육에 힘쓴 3.1독립운동 민족대표 이필주(李弼柱) 목사

by yunheePathos 2018. 12. 4.

청년의 정신교육에 힘쓴 3.1독립운동 민족대표

이필주(李弼柱) 목사

 


이필주(李弼柱) 목사는 3.1 독립운동의 33인의 민족대표 중의 한사람으로서 당시 감리교 정동교회의 목사로 시무했으나 그 이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체육교사였다. 그보다 먼저 이필주 목사는 구한말의 직업군인이었는데 타고난 성격이 매우 강직하고 용감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미였으며 동학난 때에는 크게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제 간단히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869119일 서울 중구 남창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몹시 구차하여 아버지가 하고 있는 실뽑는 일을 하며 가사를 도왔는데 18세 되던 해에 아버지는 쥐병(티부스)에 걸려 병사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도 그 쥐병에 전염이 되어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으므로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일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천만다행으로 살아나긴 했으나 살길이 막연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의 집 삯바느질과 품팔이를 하고 본인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실뽑는 일을 계속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살림을 꾸려나가기가 너무 힘에 겨워 낙심하고 자포자기하는 때도 많았다.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술도 마시고 바람도 피우고 깡패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집안 살림은 엉망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189022세 되던 해에 직업군인으로 들어갔다. 직업군인이 되면 약간의 월급은 받아 최저생활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4,5년 간은 졸병으로 지내다가 1895년 동학난이 일어나자 그는 전주 완산(完山)전투에 파송되었다. 거기서 그는 훌륭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돌아와서는 일약 참교(參校) 즉 오늘날의 하사로 승진되었고, 또한 부교(副校)가 되었다가 일본식 군대훈련과 러시아식 군대훈련을 받아 시위대장이 되었던 것이다. 시위대장이란 오늘날의 대통령의 호위병장과 맞먹는 요직이었다.

그런데 190233세 되는 해, 그는 갑자기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 늦게 본 두 자식이 하루아침에 죽는 바람에 마음의 변화를 입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처음 1년 동안은 예수교 진리도 잘 모른 채 다만 20-30명의 병정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았다. 그러나 차츰 진리를 깨달으면서 군복을 벗고 교회당 소제부가 되었다. 그 뒤 이필주 씨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다. 그 결과 1904년에 이르러 속장이 되었고, 그 해부터 상동교회 안에 있는 공옥학교(攻玉學校)와 청년학원(靑年學院)의 교사가 되었다. 그중 공옥학교에 대해서 그는 더 정성을 다해서 봉사했다. 왜냐하면 이 학교는 벡크(S. A. Beck)라는 선교사가 자기의 아들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막대한 돈을 희사하여 운영되는 것을 알고서는 자기의 경험을 되살려 더 열심히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상동교회 안에 있는 청년학원과 종로 YMCA학관을 번갈아 다니면서 체육교사 일을 맡아했는데, 여기에다 그는 온 정열을 쏟았다. 체육교사라 했지만 사실 그는 청년들에게 군대훈련을 시켜주는 정신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목총을 메고 목검을 채워 행진을 시켰다. 군대출신인 그는 누구보다도 용감한 자세로 군대훈련을 시켰으며 행군할 때에는 학생들에게 애국 충성이 솟구쳐 오를 수 있도록 군가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또한 이필주 씨는 교사일과 함께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성경도 배워주게 하였고, 1913년에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 안수례를 받고 왕십리교회의 초대목사가 됐다. 거기서 5년 간 시무하다가 1918년부터 정동교회 목사가 되어 옮겨갔다.

정동교회 목사로 있을 때 3.1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33인 중의 한사람으로서 체포되어 검사가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일반에게 배포했는가?라는 심문에 대하여 그는 그것은 동양 평화를 주창하여 조선의 자유독립을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권을 회복한다는 뜻이다라고 대답했으며, 또 검사가 금후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 말에 대하여 그는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당당한 어조로 대답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필주 목사는 목사가 된 뒤에도 군인정신을 십분 발휘하였던 것이다.

그는 194242174세로 소천하셨다.

등걸

-1980.3.20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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