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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26. 일생을 소년들과 함께 살아온 정성채(鄭聖采) 선생

by yunheePathos 2018. 12. 4.

일생을 소년들과 함께 살아온

정성채(鄭聖采) 선생

 


정성채(鄭聖采) 선생은 189991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수업하던 중 불려나와 1921년부터 YMCA 소년부 간사가 됨으로부터 19506.25전란으로 납북되기까지 거의 일생동안 Y안에서, 또한 Y주변에서 살아온 Y맨이며, 더욱이 정성채 선생은 소년들과 함께 살아온 지도자이다.

그는 YMCA 소년부 간사로 있던 당시에 중앙학교 교사인 조철호(趙喆鎬)씨와 함께 주동이 되어 1922105일에 소년군 또는 소년척후군이라는 운동단체를 창설했다. 이 소년군은 1908년 영국의 베이든 포웰(R. Baden Powell)장군이 창설한 보이스카웃이란 단체로서, 1518세 소년들을 중심으로 단체생활을 통해 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고 국가사회에 봉사함으로써 어릴 때부터 평화에 공헌케 함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군대식 단체이다. 이 운동은 1조를 8인으로 조직하여 서로 협동력을 양성시키는 패트롤(Patrol)제도, 공개된 문제를 진급시키는 제도, 특정한 기술을 습득한 자에게 주는 기능장(技能章) 제도 등 특색을 두고 있다. 본래부터 이 운동은 청소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사내다운 기상을 기르는 동시에 희생정신과 고상한 인격 향상에 목적이 있었던 만큼, 그 당시 한국과 같이 나라가 없어서 군인이 되고싶어도 될 수가 없었던 청소년들에게 가장 적절한 운동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년군 또는 소년척후군은 그 두 개의 명칭과 같이 통일성 없이 무질서하게 양립하게 되었으므로, 192431YMCA회관에서 서울과 인천에 있는 네 개 단체의 관계자가 모여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때에 비로소 보이스카웃은 세계 기준헌장을 통과시키고 초대 총재로 이상재(李商在)선생을 추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총재에는 유성준(兪星濬), 신흥우(申興雨) 1, 회계에 김윤수(金潤秀), 간사에 유억겸(兪億兼), 부간사에 조철호(趙喆鎬), 정성채 등이 당선되었는데, 이때부터 보이스카웃운동은 명실 그대로 YMCA 직속사업으로 발전되었다. 그로부터 보이스카웃은 학교만 아니라 각 교파 교회 안에도 많이 조직되어 전국에 166개의 지부가 설치되었으며, 자주 지방을 순회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노력하는 한편 시위행진과 전단 뿌리기 등으로 사회계몽에 앞장서기도 했다. 1927년 이상재 선생이 별세하자 한국사상 최대의 대규모 사회장이 있었는데, 그때 소년척후단원들은 정성채, 조철호 등 보이스카웃 지도자들의 지휘 하에 소년들이 정복차림으로 단기를 들고 가두와 각 지방 역두에서 구슬피 나팔불고 북 치면서 그의 영구를 호송하는 광경은 참말로 장엄하고도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이 광경은 그 당시 나라없고 군대없는 우리 민족으로서는 감격과 흥분을 자아내는 일대 쾌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보이스카웃의 개척자이며 지도자가 곧 정성채 선생이었다. 그는 1924년 중국 북경에서 열린 극동보이스카웃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보이스카웃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점차 쇠진해지는 동시에 1937년에 이르러서는 완전 해산되고 말았다. 그 뒤 19458.15해방이 되자 보이스카웃이 재건됨에 따라서 정성채 선생은 동 연맹의 이사가 되고, 48년부터 50년까지는 한국보이스카웃 연맹의 간사장이 되기도 했다.

정성채 선생은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부친은 승동교회의 교인이었다. 그러나 수송장로교회가 창설될 때 정성채 선생은 그 교회 장로로 피택되었으나 안수받기를 거절하고 조용히 또 성실하게 교회를 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뒤 교회 장로로서 교회와 YMCA의 충실한 봉사자가 되었다.

8.15해방 후에는 일반사회 활동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재외동포 협찬 동지회 부회장, 한국공사 부사장, 합중민보 발행인, 주일한국 전권대사 겸 주일본 연합군 사령부 파견 외교사절 단장, 신흥우(申興雨) 박사의 비서관, E. C. A. 농촌담당관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6.25전란을 당했다. 이때 모든 서울시민들은 피난을 했으나, 정성채 선생은 피난을 반대하면서 그들도 사람인데, 설마나혼자 피신해서 가족들에게 해가 미치면 어떡하나하면서 망설이다가 불행하게도 공산당에게 잡히어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등걸

-1980.5.15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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