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YMCA 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공헌한
존 알 모트 박사
모트 박사는 1865년 5월 25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소속 평신도로서 대학YMCA운동에서 시작하여 전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즉 그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하면, 1888년부터 1915년까지는 YMCA 국제위원회의 학생부 간사로 있었고, 1895년에는 WSCF 즉 기독학생연맹을 창설하여 다년간 그 회장이 되었다. 또한, 1910년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획기적 사건인 에딘바라 대회(Edinburgh Conference)를 주최하여 그 계속위원회의 회장이 되었고, 1915년부터 1928년까지는 SVM, 즉 미국 해외 선교운동에 붐을 일으킨 학생자원봉사단(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회장이 되었다. 1912년부터 1942년까지는 국제선교협의회(Missionary International Council)의 회장을, 1926년부터 1937년까지는 YMCA 세계연맹의 회장을 지낸 위대한 평신도이다.
그는 한때 현대판 사도 바울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전세계에 그의 발이 안 미친 데가 없었다. 특히 세계 YMCA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그 가운데서 한국YMCA와 관계된 것만을 대강 연대순으로 열거해보면, 그는 1903년 한국YMCA(황성기독교청년회) 창설에 공헌했다. 즉, 1900년에는 라이언(D. W. Lyon)씨를 조사관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YMCA 창설에 기초를 닦아놓았으며, 그 조사보고서에 의하여 1901년에는 초대총무 질레트(P. L. Gillett)씨를 파송했다.
또한 1907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WSCF 창설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그는 1907년 2월에 내한하여 6천명 관중 앞에서 강연(통역은 윤치호)을 했고, 윤치호, 김규식, 김정식, 민준호 등의 한국Y 대표를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WSCF 세계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했다.
1907년 한국YMCA 회관 신축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워너 메이카(John Wanamaker)씨로 하여금 4만 불을 기부하게 함으로써 한국YMCA가 최초의 현대식 대건물을 종로에 지을 수 있게 했다.
1913년에는 한국YMCA가 일제의 탄압으로 하마터면 해산될 위기에 처했을 때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Y를 타도하기 위해 1911년에 데라우찌 총독 암살음모를 했다는 조작극을 꾸며서 105인 사건을 일으켰으며, 1913년에는 유신회(維新會)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하여 YMCA를 점령했었는데 이 때에 모트 박사는 일부러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여 사건수습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로 한국YMCA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14년에는 오늘날의 대한YMCA 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자칫하면 한국YMCA는 완전히 일본YMCA 산하에 들어갈 뻔했던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1922년 WSCF 세계대회가 중국 북경에서 열렸을 때 한국YMCA에서는 이상재, 신흥우, 이대위, 김활란, 김필례씨 등이 참석했는데, 모트 박사는 한국YMCA가 일본 Y와의 관계를 끊고 완전 독립하게 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 해 한국YWCA가 창설되었는데 이것도 북경대회에 갔다가 온 김활란, 김필례 씨 등의 주동으로 되었던 것이다.
1923년부터 한국YMCA가 농촌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모트 박사는 한국YMCA 총무 신흥우 박사와 함께 레이크 플라싯(Lake Placid)회담을 염으로써 농촌운동이 활발히 촉진될 수 있게 했다. 그때부터 YMCA 국제위원회는 재정과 기술 원조를 하기 시작하여 클라크(F. C. Clark), 어비슨(G. W. Avison), 번스(H. C. Bunce), 쉽(F. C. Ship) 등 농업전문가들이 내한하여 농민들의 경제적 향상․사회적 단결․정신적 소생운동에 큰 공헌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때에 한국Y측에서는 신흥우, 홍병선, 이순기, 계병호, 조만식, 최영균 씨 등이 그들과 같이 각 지방에서 활동했다.
1924년 한국 NCC, 즉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창설에도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리고 1925년과 1929년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NCC 운동을 지원해 주었는데, 1925년 전국교계지도자대회가 열렸을 때는 윤치호 씨가 의장으로 활약했고, 1928년 IMC 세계대회, 즉 예루살렘선교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신흥우 씨가 한국교회 대표단장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대회가 있은 다음해인 1929년 보고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모트 박사가 직접 참석하였던 것이다.
당시 모트 박사는 세계YMCA 연맹의 회장과 국제선교협의회(IMC)회장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의 Y 운동과 NCC운동도 일심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모트 박사는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공헌으로 세계평화상을 받은 바 있으며, 1955년 1월 31일 91세의 고령으로 별세했다.
등걸
-1981.5.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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