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자원지도자
설봉 전택보 선생
1901년 11월 1일에 함경남도 문천국 교월리(橋越里)에서 탄생한 전택보 선생은 14세 때에 부모를 따라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부모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교회학교에 다니면서 민족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동지들과 신문을 뿌리고 만세를 부르다가 죽을뻔 했으나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나면서부터 가난하게 태어난 그는 고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팔이, 인력거도 끌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철학이나 인문 계통의 학문을 하려했으나 도중에 마음의 변화를 입어 상과를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24년인 24세 때에 고베(神戶) 고상(高商)에 입학, 4년 간의 수업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다음 고베에 있는 미국은행(National City Bank of New York)에 취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모교인 영신(永新)학교의 교사와 영흥(永興) 금융조합의 이사(理事), 조선일보의 서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6년 간의 직장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사업계에 투신했다. 그때 그는 34세로 다시금 만주에 들어가 쌀장사를 하고 명태장사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나중에는 교하현에 대규모 농장과 한국인의 집단부락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8.15해방 후 이 모든 재산을 버린 채 월남하여 1947년 천우사(天友社)라는 무역회사를 창설하게 되었다. 회사의 이름이 뜻하는 대로 그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했기 때문에 수많은 문화단체와 관계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화여대의 이사․조선일보 취체역사장 한국연구원 이사․서울여대 이사․한국신학대학 이사․숙명여대 이사․CCF 이사장․한정협회의 이사장․포푸라협회 이사장․창경원 재건위원장․국제법학회 부회장․한국UN협회의 회장…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수많은 문화단체와 관계를 맺고 활약했다.
그 중에도 YMCA와의 관계는 여간 깊은 것이 아니었다. 즉 1945년 8.15해방 직후 함흥YMCA를 재건했으며 1956년부터는 서울YMCA 이사가 되어 봉사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으로 크게 봉사한 것은 당시 YMCA가 운영난으로 큰 걱정을 하고 있던 삼동 부녀회관(三同婦女會館)을 인수한 것이다. 이 삼동 부녀회관 사업은 전쟁미망인과 윤락여성의 구호사업으로 시작한 것인데, 미국의 원조물자가 끊어지면서 YMCA는 큰 곤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천우사가 인수하여 경영하기 시작하여 사회복지법인 교남회관(橋南會館)으로 확장하였다.
그리고 현 YMCA회관을 재건할 때의 일이다. 6.25전란으로 소실된 Y 회관을 재건하기 위하여 1958년부터 재건운동이 개시되었는데, 설봉 선생은 1962년부터 제 2대 재건위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YMCA 국제위원회는 재건용으로 35만 불의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 돈은 그만한 돈을 국내에서 모금해야만 받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국내모금이 먼저 선행되어야했는데, 이 일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설봉 선생은 크게 지도력을 발휘했다. 즉 그는 제일 먼저 거액 기부를 하는 동시에 이병철, 김용주, 이한원, 최태섭 등의 재벌들로부터 거액기부를 약속받게 되었다. 정부당국으로부터도 국고예산을 타게 되었으며 모든 회원과 모든 클럽 회원들의 응분의 협조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1967년에는 현 YMCA회관의 준공식을 성대히 거행할 수가 있었는데, 그때 설봉은 이사장으로서 준공식을 주재했던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실내수영장을 비롯하여 역사적인 최신시설을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Y회원으로서의 긍지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그는 YMCA를 위하여 중대한 시기에 중대한 사명을 완수한 레이맨이었다.
한편 그는 일반 사회단체에도 자원지도자 정신을 발휘하여 대한적십자의 중앙위원으로서 별세 후 적십자 인도장 금장(赤十字 人道章 金章)을 추서받게 되었으며, 생전에는 덴마크 여왕으로부터 두 차례나 훈장(기사훈장과 다네브로그 십자훈장)을 받았다. 또한 정부당국은 그에게 4차례나 수출 최고상을 수여했고 별세 후에는 국민최고훈장 무궁화장(無窮花章)을 추서했던 것이다.
특히 그가 경제발전에 끼친 공헌은 매우 크다. 보세가공을 개척한 것이라든지, 수출무역을 개척한 것이라든지, SRI 국제기구의 극동지역 고문, UN 한국협회 회장, 구미 각국 경제외교사절단장 등을 역임한 것이라든지 그의 활약상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설봉 선생은 진실로 창의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경제계 지도자였다. 민족을 위하였고 절대로 자기를 위하여 취리와 축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아깝게도 그는 1980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이승을 영영 떠났다.
등걸
-1981.8.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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