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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YMCA/YMCA

YMCA 인물 41. Y일요강화와 하령회를 통해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교육자 김창제(金昶濟) 선생

by yunheePathos 2018. 12. 4.

Y일요강화와 하령회를 통해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교육자

김창제(金昶濟) 선생

 


Y창설시부터 학생회원으로 활동

교육자이면서 웅변가로도 유명했던 김창제(金昶濟) 선생은 1877년에 충청남도 보령군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문학에 뜻을 품은 선생은 일찍이 상경하여 관립한성사범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했으며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부터 학생회원으로 활동을 했다.

이미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던 선생은 한국YMCA 창설과 함께 회원으로 출발하여 전 생애를 Y운동의 지도자로 마쳤다고도 할 수 있다.

 

안동장로교회를 개척

또한 선생은 안동교회의 창설자 중의 일원이기도 했다. 당시 장로교회는 장안에다 교회를 세울 때 지역적인 면에 많은 고려를 해서 세웠다. 즉 서대문 쪽에는 새문안교회, 남대문에는 남대문교회, 동대문에 연동교회, 중앙에 승동교회를 세웠는데 마침 북촌에 있는 양반촌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19093월에 유성준(兪星濬), 박승봉(朴勝鳳), 민준호(閔濬浩), 이주완(李柱浣) 등의 양반출신들이 나서서 안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모임을 갖던 곳은 김창제 선생의 자택이었다.

현재 재동초등학교의 뒤편인 홍수례골에 위치한 선생의 자택은 안동교회의 산실로 제공되어 1년간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함흥Y를 창설하는 데 공헌

한편, 선생은 YMCA 학관 선생을 비롯해서 학생Y 및 하령회의 강사, Y의 이사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일요강화의 강사로서 크게 활약을 했다.

그리고 지방YMCA 육성을 위해서 1915년에 함경북고 경성에 있는 함일학교(咸一學校) 교감으로, 1917년에는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학교(永生學校) 교감으로 부임했다. 왜 이렇게 멀리 관북으로 옮기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선생은 그의 열렬한 애국심과 교육열을 멀리 관북에서까지 발휘했다. 그러면서 선생은 함흥YMCA를 창설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것이다. 우선 1917년에 이순기(李舜基), 현원국(玄洹國), (L. L. Young) 등을 창립준비위원으로 삼아 영생학교 학생Y를 조직했다. 이때 영 씨는 캐나다 선교부에 활동을 교섭했고 현원국 씨는 학생들을 위한 도서구입에 힘쓰면서 그 해 325일에 창립총회를 열게 되었다.

초대회장에는 캐나다 선교사 맥그레(D. M. McRae, 馬具禮), 부회장에는 모학복(毛鶴福), 서기에 이순기, 이사에는 선생을 비롯해서 허헌(許憲), 최영학(崔榮鶴), 홍기진(洪基鎭) 등이 선임됐다. 이로써 함흥YMCA는 지방Y로서는 최초의 Y로 등장하게 되었다.

 

Y가 민족운동의 구심이 되도록 활약

이밖에도 선생은 1913년에 총독부의 사촉으로 유신회 회원들이 YMCA 총회에서 그 주도권을 잡으려 할 때 Y를 지키기 위해 이에 대항했으며, 1912년에 열린 학생하령회에는 강사로 초빙되어 강연을 통해 학생들을 뜨겁게 감동시키기도 했다.

또한 1923년부터 전개된 한국농촌운동에는 핵심위원으로서 활약을 했으며 서울YMCA 이사와 YMCA연맹 이사로서 한국YMCA가 민족운동의 구심이 되게 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교육자인 선생은 3.1운동 직후에는 상경하여 이화여자중학교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고, 1926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강의했으며 8.15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받아 봉직했다.

 

글과 강연으로 애국청년운동에 헌신

한편, 선생은 문필가로서 YMCA 회보인 靑年을 비롯해서 개벽(開闢), 조광(朝光) 등 잡지와 동아조선 등의 일간신문에도 많은 글을 실었다. 그리고 뛰어난 웅변솜씨로, YMCA 일요강좌에서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열렬한 애국심으로 청년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가 신문지상과 하령회 등에서 강연한 내용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금일 경제적 상태와 학생의 각성, 신인(新人), 생명의 저축, 현대 청년의 고민, 소사(小事)는 대사(大事),,()과 인(),인내하라, 인문발달과 기독교의 공헌, 첫째날, 예수의 교훈과 유술주의등이 있다.

선생은 애국심을 가진 청년운동가로서 YMCA를 위해 많은 자원봉사를 했고, 교육자로서 제자육성에 심혈을 기울이다 8.15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하던 1947년에 별세했다.

등걸

-1981.10.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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