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농촌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개척자
백사당(白沙堂) 양주삼(梁柱三) 박사
-Y운동 조직화와 한국NCC 창설에 공헌
아호가 백사당(白沙堂)인 양주삼(梁柱三) 박사는 1879년 1월 25일에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출생했다. 4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그는 6세 때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유불선삼도(儒彿仙三道)로부터 시작해서 동학에 흥미를 갖기도 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만국공보(萬國公報)와 덕혜입문(德慧入門) 등의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을 읽게 되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20세가 되던 1899년에 그는 서울로 올라와 선교사들과 만나면서부터는 유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헐버트(H. B. Hulbert) 선교사의 소개장을 얻은 그는 25원을 꾸려서 1901년에 상해로 가는 선박에 오르게 되어 남감리 교회가 경영하는 상해 중서학원(中西學院)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의사가 소통되지 않아 입학마저 취소당할 뻔하기도 했으나 그는 악착같이 노력하여 입학 3년 만에 교내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받게 됐다. 그는 원장 파커 목사의 총애를 받아 세례까지 받음으로써 이 학교 학생 가운데 남감리교에서는 초대 세례교인이고 교인으로서는 윤치호 씨에 이어 두 번째가 되었다.
졸업 후, 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서 그는 1905년에 다시 영국행 기선을 탔다. 그러나 2개월 동안 그곳에서 방황하다가 미국행 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공적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민 온 교포들의 구호사업과 함께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한국인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전도사로 봉사했다. 그러는 가운데 신학공부를 결심한 그는 1912년에 선배인 윤치호 씨가 다녔던 밴더빌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3년 간 수학했으며 예일대학 신학부에서도 2년 간 수학하여 신학사 학위를 얻게 됐다. 그는 1912년에 미국에서 집사목사(執事牧師)로 안수를 받았고 1915년엔 한국에서 장로목사(長老牧師)로 안수를 받아, 남감리교에서는 처음으로 장로목사 안수를 받은 3인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1915년 1월 2일, 그는 고국을 떠나온 지 15년만에 상투 머리에 갓을 쓰고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는 서울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해 6월에 김매륜(金邁倫) 여사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협성신학교 교수가 되는 동시에 『신학세계(神學世界)』를 창간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양주삼 목사는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의 부원장(1916년), 기독교 조선감리회 초대 총리사(1930~38년), 예수교연합공의회 즉 한국 NCC 회장(1927, 1935, 1936년) 등을 역임했고 남감리교회 교리와 장정의 번역출판(1918년), 남감리교 조선선교 30년사 편저(1930년) 등의 출판활동과 함께 1920년부터는 시베리아 선교활동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는 귀국한 1915년 직후부터 YMCA활동에 가담하여, 그 해에 열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총회에서는 이사 겸 서기에 당선되었고 점차 서울Y와 Y연맹의 이사와 회장, 재단 이사장 등 중책을 역임하면서 YMCA활동을 적극 추천하였다.
Y농촌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쏟은 그는 1928년에 열린 예루살렘 세계선교대회에 신흥우, 김활란, 노블(W. A. Noble), 모페트(S. A. Moffett)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와 한국교회를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 가입하게 되는 동시에 Y 농촌사업과 에큐메니칼 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양주삼 목사는 Y멘으로서 또는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개척자로서의 활동이 컸다. 즉 1918년에 조직된 장감연합협의회 창설위원으로서 1919년엔 그 회장이 되었고 1924년엔 지금의 한국 NCC인 예수교 연합공의회 창설위원으로서 세 차례나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국 NCC는 YMCA 주도 아래서 창설되었다. 즉 세계 기독교 동향을 잘 아는 윤치호, 신흥우, 양주삼 등 YMCA 간부들이 당시에 국제적으로 크게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던 모트(J. R. Mott) 박사와 손잡고 YMCA 운동을 조직화시키는 한편, 국제선교협의회 한국지부(한국 NCC) 조직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1925년, IMC 회장인 모트(J. R. Mott) 박사의 내한을 계기로 양주삼 목사는 각 교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조선호텔에서 함께 모여 ‘조선 기독교계 대표자 협의회’를 개최하도록 하는데 힘썼으며 해마다 열리는 학생YMCA 하령회 때에는 강사로서도 많은 활약을 했다.
또한 8.15 해방 후에는 서울Y와 Y연맹 이사직을 맡아 공헌했다.
아호 백사당(白沙堂)이 말해주듯이 그는 결백한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서 성경가운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에 옮겨오신 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 목사는 6.25 당시 납북되어 그 후로는 소식을 알 수가 없다.
등걸
-1982.7.1.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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